제7장 강개, 한탄, 회고
257. 간사한 박파주야 : 신정하
258. 공산이 적막한데 : 정충신
259. 꽃이 진다 하고 : 송순
260. 구름이 무심탄 말이 : 이존오
261. 군산을 삭평턴들 : 이완
262. 금오 옥토들아
263. 나무도 병이 드니 : 정철
264. 내 나이 풀쳐내어
265. 높으나 높은 낚에 : 이양원
266. 늙기 설운 것이
267. 동풍이 건듯 불어 : 김광욱
268. 뒷뫼에 뭉킨 구름 : 정훈
269. 말하면 잡류라 하고 : 주의식
270. 문장을 하자 하니 : 안서우
271. 반넘어 늙었으니 : 이명한
272. 백설이 잦아진 골에 : 이색
273. 백일은 서산에 들고 : 이충
274. 선인교 내린 물이 : 정도전
275. 시절도 저러하니 : 이항복
276. 어와 동량재를 : 정철
277. 엊그제 벤 솔이 : 김인후
278. 역발산 기개세는 : 임경업
279. 오면 가려하고 : 선조
280. 오백년 도읍지를 : 길재
281. 일생에 얄미울손
282. 있으렴 부디 갈다 : 성종
283. 춘산에 눈 녹이는 : 우탁
284. 춘산에 불이 나니 : 김덕령
285. 터럭은 희었어도 : 김수장
286. 평생에 한하기를
287. 해도 낮이 계면
288. 화작작 범나비 쌍쌍
289. 흉중에 불이 나니 : 박태보
290. 흥망이 유수하니 : 원천석
291. 힘써 하는 싸움 : 이덕일
제7장 강개, 한탄, 회고
뒷뫼에 뭉킨 구름 앞들에 퍼지었다
바람불지 비올지 눈이 올지 서리칠지
우리는 뜻 모르니 아무럴 줄 모르노라
광해조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를, 그칠 줄 모르는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정훈은 이렇게
'강개'하였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그린 눌러 둘 수밖에 없는 심정을 가냘픈 붓끝을 빌어서
이렇게밖에 풀어볼 길이 없었다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라도 쉴 이 없다
호화히 서 있을 젠 올이갈이 다 쉬더니
잎지고 가지 꺾어진 후에는 새도 아니 앉는다
고 송강은 인생무상을 '한탄'하였다 국문학을 가리켜 '한의 문학'이라고들 한다 인생의
허무함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를, 님 여윈 쓰린 슬픔을 그저 마음속에 '한'으로 눌러두고
한숨짓는 옛사람들의 마음의 갈등을 문학의 힘을 빌어 삭혔기 때문에 '한의 문학'이 된 것이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붙였으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더라
이른바 이러한 '회고가'들이 고려의 유산들에 의하여 구슬프게 읊어졌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얼마나 절절한 회고의 정인가 한낱 사라져 버린 지난날의 꿈이라고 차갑게 일축해 버리면
그만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이렇게 문자로 정착이 되면, 만고에 남을 명작이 된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인류의 문화는 쌓여 나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엄숙하게 느껴지는 바이다.
257. 간사한 박파주야
신정하
간사한 박파주야 죽으라 설워마라
삼백년 강상을 네 혼자 붙들거다
우리의 성군 불원복이 네 죽긴가 하노라
-- 지은이: 신정하(1681__1716)
자는 정보, 호는 서암 숙종 때에 부교리를 지냈다 노소론의 당쟁에 휩쓸려 파직, 36세로 요절하였다
-- 말뜻
간사: 임금에게 바른 말로 간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박파주: 박태보가 파주목사를 지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박태보는 인현왕후(숙종비, 장희빈
사건) 폐비 사건에 소를 올려 세 번이나 혹형을 당하여 죽었다
삼백년 강상: 조선조 창업으로부터 숙종 때까지 300년 동안의 3강5상, 즉 삼강오륜
붙들거다: 붙들었다 끝내 잘 지키어 내었다
성군 불원복: 성군은 숙종 임금, 불원복은 머지 않아 다시 복위시켰다는 뜻이니, 인현왕후를
숙종 15년에 폐출하였다가 21년에 복위시켰음을 이르는 말
네 죽긴가: 박파주 그대가 죽었기 때문인가
-- 감상
장희빈의 술수에 넘어가 인현왕후 민비를 폐출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임금께 간을 하다가
고문에 죽은 박파주여, 죽음을 서러워하지 말라 그대의 그 죽음이 조선조 창업 이래 300년
동안의 강상을 그대 혼자서 붙들어 지킨 것이나 진배없도다 우리 성군 숙종께서 얼마
아니하여서 다시 복위를 시킨 것은 그대가 죽었기 때문이 아닌가
의분에 강개하는 젊은 선비의 외침이 귓전을 울리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시조의 표현으로서는
결코 과장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58. 공산이 적막한데
정충신
공산이 적막한데 슬피 우는 저 두견아
촉국 흥망이 어제 오늘 아니거늘
지금껏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나니
-- 지은이: 정충신(1576__1636)
자는 가행, 호는 만운 임진왜란 때에, 17세의 어린 몸으로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권율도원수의 심부름으로 의주에 가서 이항복을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이항복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인조 때에는 이괄의 난을 물리치고 부원수가 되고, 금남군에 봉하여졌다
-- 말뜻
공산: 인적기 없는 쓸쓸하고 고요한 산
두견: 표준어는 소쩍새 뻐꾸기와 같으나 몸이 훨씬 작다 집을 짓지 아니하고 꾀꼬리 따위의
다른 새 둥지에다 알을 낳는 습성이 있다 밤이면 옮겨 다니면서 우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다 접동새라고도 불리며, 두우, 촉조, 불여귀, 귀촉도 등등 10여 가지의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는, 시나 노래에 많이 나오는 새다 옛날 중국 촉나라의 왕 두우가 망제가 되었는데,
정승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원통하게 죽었다 그 넋이 이 새가 되어 밤이면 피나게 울어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고 한다
촉국흥망: 촉나라의 흥하고 망함 촉은 중국 상고시대에 제고의 왕자가 봉함을 받았던 작은
나라로, 뒤에 하, 은, 주를 지나 진에게 망하였다
피나게 울어: 피가 나도록 울어 소쩍새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밤새워 운다고 한다
애를 끊나니: 몹시 슬픈 것을 형용하는 말인데, 한자어의 단장이라는 것이다 끊나니의
'__나니'는 의문형 종결어미가 된다
-- 감상
인가 하나도 없는 고요하고 쓸쓸한 산에서 밤새도록 구슬프게 울어대는 두견새야! 네가
옛날 촉나라 망제의 억울한 넋이 되어 그렇게 운다고 하지만, 그 촉나라의 흥하고 망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지금껏 그렇게 목에서 피가 나도록 밤을 새워가며 슬피 울어, 듣는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두견성에 시름겨워하는 심정이 소쩍새가 밤새도록 처량하게 우는 사연을 곁들여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밤하늘을 찢으면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 소리는 정말로 듣는
이의 애를 끊는다 그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래에 공감할 것이다.
259. 꽃이 진다 하고
송순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허 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워 무엇하리요
-- 지은이: 송순 11. 참고
-- 말뜻
희짓는: 훼방치는 희롱하는
새워: 샘하여 시기하여 미워하여
-- 감상
아까운 꽃이 다 진다고 새들아 슬퍼하지 말아라 제가 지고 싶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에
못이겨 흩어져 날리는 것이니, 결코 꽃의 탓이 아니로다 떠나가느라고 짖궂게 훼방놓는 봄을
미워한들 무엇하랴
을사사화(명종 원년__1545년)로 많은 선비들이 죽어 가는 것을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꽃에
비유한 것인데, 인간 사회의 일을 자연 현상에 은유한 시상과 표현 솜씨가 대단하다 "꽃이
진다"는 죄없는 젊은 선비들의 죽음이고, "새들"은 세상되어가는 꼴을 바라보는 뜻있는 사람
들이며, "바람"은 을사사회의 소용돌이, "희짓는 봄"은 사화를 꾸며 득세한 집권세력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을 "새워 무엇하리요"라고 했는데, 이것은 방관, 체념이라기보다는
사필귀정을 믿는 일종의 신념, 건전한 인생관으로 보는 것이 한결 건설적, 긍정적이다.
260. 구름이 무심탄 말이
이존오
구름이 무심탄 말이 아마도 허랑하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
구태여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
-- 지은이: 이존오(1341__1371)
자는 순경, 호는 석탄 고려 공민왕 때에 정언 벼슬을 지냈다 성품이
강직 결백하여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후에 대사성에 추증되었다
-- 말뜻
허랑하다: 허황되어 믿을 만하지 못하다
임의로: 마음대로 멋대로
날빛을: 햇빛을
덮나니: 덮느냐? '__나니'는 의문형 종결어미
-- 감상
구름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허황된 말이로다 구름은 하늘
한복판에 번듯이 떠서 멋대로 돌아다니며 짓궂게도 밝은 햇빛을 쫓아다니면서 덮어 버린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구름은 의뭉한 요승 신돈이요, "광명한 날빛"은 왕의 총명을 비유한 것이다
비유가 아주 적절하기 이를 데 없어, 지은이의 곧은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기막힌 풍자다
"중천에 떠 있어 임의로 다니면서"라는 구절은 신돈의 권세와 방자함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부분이고, "광명한 날빛을 따라가며 덮나니"는 신돈의 행패를 신랄히 꾸짖은 구절이다
정의의 저항운동이 뱃속에서, 몸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에 이런 형상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리라.
261. 군산을 삭평턴들
이완
군산을 삭평턴들 동정호 너를랏다
계수를 베내던든 달이 더욱 밝을 것을
뜻 두고 이루지 못하고 늙기 설워하노라
-- 지은이: 이완(1602__1674)
자는 징지, 호는 매죽헌 병자호란 때에 공을 세우고, 효종이 북벌을
계획하자 어영대장에 발탁되었으며, 곧이어 훈련대장이 되어서는 신무기의 제조, 성곽의 개수
신축 등 전쟁 준비에 힘썼다 뒤에 포도대장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 말뜻
군산: 동정호 안에 있는 큰 산
삭평턴들: 깎아서 평평하게 하였더라면
동정호: 중국 호남성 북쪽에 있는 큰 호수 옛부터 넓고 경치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너를랏다: 넓을 것이다
계수: 계수나무 여기서는 달 속에 있다는 상상의 나무
-- 감상
병자호란의 국치 설욕에 절치부심한 효종은 송시열, 송준길 등을 기용하여 북벌책을
추진하였다 이 때에 훈련대장으로 활약한 지은이가 효종의 승하로 북벌책이 무위로 돌아가고
만 것을 강개한 노래이다
동정호 안에 있는 군산을 깎아 없애 버렸더라면, 동정호가 더욱 넓어졌을 것인데... 계수를
베어 내어 버렸던들 저 달이 더욱 밝을 터인데... 이것은 북벌의 당위성과 의지를 상징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뜻을 두고도 이루지 못한 채 할일없이 늙기가
서럽다는 것이다 무인다운 기개가 잘 나타난 호탕한 시조라 하겠다 착상이 기발하면서도
과대망상의 인상을 주지 않음은 지은이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262. 금오 옥토들아
금오 옥토들아 뉘 너를 쫓니관데
구만리 장천에 허위허위 닫니는다
이후란 십리에 한번씩 쉬엄쉬엄 니거라
-- 말뜻
금오: 해의 다른 이름 해 가운데에 세발 까마귀(삼족오)가 있다는 전설에서 온 말
옥토: 달의 다른 이름 달 속에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는 전설에서 온 말
쫓니관데: 쫓아다니기에 '니다'는 '가다, 다니다(닫는다)'의 옛말로 동작을 계속 진행한다는
뜻도 있다
구만리 장천: 아득히 멀고 먼 높고 넓은 하늘 9는 가장 많은 수의 대표로 흔히 쓰였다
허위허위: 빠르게 빨리빨리
닫니는다: 다니느냐 뛰어 돌아다니느냐 '닫다'는 달리다, 뛰다,'니다'는 기다, 돌아다니다,
'__는다'는 의문형 종결어미로 __느냐?의 뜻
이후란: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말인데, 감탄의 뜻이 섞인 '다음부터는'의 뜻
-- 감상
세월이 빠르고 덧없다는 것을 묘하게 비유한 시조다 해야, 달아, 누가 너를 쫓아다니게에
넓으나 넓은 하늘을 그렇게도 바쁘게 빨리 다니느냐 그러지 말고 이제부터는 10리에 한 번씩
쉬면서 천천히, 쉬엄쉬엄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종장이 "이후란 십리에 한번씩 쉬어 더디더디 니거라"로 된 데도 있다 모두 빨리 가는
세월을 한탄한 뜻에서 차이가 없다.
263. 나무도 병이 드니
정철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라도 쉴 이 없다
호화이 서신 제는 올이 갈이 다 쉬더니
잎 지고 가지 꺾인 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정자: 여기서는 정자나무 그 그늘 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놀고 쉬는 큰 나무 주로
느티나무가 많고, 시골에 가면 마을마다 한두 나무는 다 있다 어른들의 휴게소가 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다
호화이: 호화로이 크고, 가지가 우거져서 보기에 호기로운 것을 나타내는 재미있는 말이다
서신 제는: 서 있으실 때에는
올이 갈이: 오는(올) 사람, 가는(갈) 사람 모두 오가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이 죄다
-- 감상
멋진 비유에 재치 있는 표현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부리나케 찾아가던 사람이 정승이
죽으면 가 보지도 않는다는 이른바 염량세태를 잘도 비꼬았다 가지 뻗고 잎이 우거져서
호기롭게 서 있는 정자나무 밑에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모두 들러서 쉬고 간다 그러나
어쩌다가 말라서 잎이 지고 가지가 꺾인 뒤에는, 사람은커녕 그렇게 좋아하던 새들도 와서
앉지를 않는다 아아! 옷깃이 절로 여미어진다.
264. 내 나이 풀쳐내어
내 나이 풀쳐내어 열다섯만 하얏고져
센 털 검겨내어 아해 양자 맹글고져
이 벼슬 다 드릴망정 도령님이 되고져
-- 말뜻
풀쳐내어: 풀어 헤쳐서 갈라내어서
하얏고져: 하였으면 하고 싶다
검겨내어: 검게 하여
아해 양자: 어린아이 모습
맹글고져: 만들고자 만들고 싶다
도령님: 총각의 높임말
-- 감상
많이 먹은 내 나이를 다 풀어 헤쳐서 백지로 돌려서 열다섯 살만 되게 했으면, 이 백발을
다시 검게 해서 소년의 모습을 만들었으면, 힘들여 쌓은 벼슬이지만 이 벼슬을 다 주고서라도
도령님이 될 수만 있다면 조금도 아까울 것이 없다 아, 홍안 청춘이 그립구나!
265. 높으나 높은 날에
이양원
높으나 높은 에 날 권하여 올려 두고
이보오 벗님네야 흔들지나 말았으며
떨어져 죽기는 섧지 아녀도 님 못 볼까 하노라
-- 지은이: 이양원(1533__1592)
자는 백춘, 호는 노저 명나라에 찾아가서 잘못 기록된 이성계의 족보를
바로잡은 공으로 가자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가 나라를
버리고 요동으로 건너갔다는 잘못 전한 소문을 듣고, 통분히 여겨 여드레 동안 식음을 끊고
비통에 잠긴 채 죽었다
-- 감상
높은 나무 위에다가 나를 올려 놓은 것까지는 좋으나, 그리고 나서는 벗님네가 그 나무를
흔들어 대니, 나는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지 않소 떨어져 죽는 것은 서럽지 않지만, 님을 다
시 못 보게 될 터이니 이를 어찌하겠소? 이 경우, 님을 임금으로 풀이하면 노래의 뜻도 잘
풀리고, 주제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사회, 특히 정시사회 같은 데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또 현실적으로
있는 일이다 지은이의 경력으로 보아 그것이 자신의 일임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중신들의
추천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간신배들의 모함과 그들의 당쟁의 수단으로 이용됨을 개탄한
시조다.
266. 늙기 설운 것이
늙지 설운 것이 백발만 여겼더니
귀먹고 이 빠지니 백발은 여사로다
그 밖의 반야가인도 쓴 외 본듯 하여라
-- 말뜻
설운 것이: 서러운 것이
여사: 대수롭지 않은 일
반야가인: 밤에 대하는 아름다운 여인
-- 감상
늙기 서러운 것이 백발만으로 알았더니, 이제 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백발쯤은 약과로다
귀가 먹고 이까지 빠져 버리고 보니, 백발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 일이다 여사는 별로 필요
하지도 않은, 있으나마나한 일이니, 백발 같은 것을 가지고 서러워 할 때는 아직도 젊음이
남아 있을 때란 뜻이다
세상 사내들아 그 얼굴만 보고도 사족을 못 쓰는 미인, 그런 미인을 한밤중에 호젓이
만났는데도, 정열의 불꽃은커녕, 쓴 외를 본 듯이 외면하게 되니, 이래도 인생이냐? 이러고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점층법으로 늙음을 개탄하였다 중늙은이 때에는 백발만 보고도 호들갑들을 떤다 그러나 좀더
두고 보아라 귀먹고 이 빠지면 백발쯤은 아직 청춘으로 보인다 좀더 나아가면 반야가인,
젊어서는 그렇게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것마저 시들해지고 결국에 가서는 쓴 외 보듯 외면하게
되니, 이제 인생은 다 되었구나 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이 먹고 늙어감을 이렇게 동물적, 형이하학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정신적,
형이상학적으로 보는 인생도 있음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67. 동풍이 건듯 불어
김광욱
동풍이 건듯 불어 적설을 다 녹이니
사면 청산이 옛얼굴 나노매라
귀밑의 해묵은 서리는 녹을 줄을 모른다
-- 지은이: 김광욱 143. 참고
-- 말뜻
나노매라: 나타나는구나! '__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이다
해묵은 서리: 여러 해 묵은 서리이니, 사람의 백발을 말한다
-- 감상
봄이 와서 동풍이 솔솔 불어 겨우내 쌓인 눈을 다 녹여 버리니, 사면의 산들이 푸릇푸릇
옛얼굴을 다시 드러내는구나! 그런데 내 귀밑에 있는 해묵은 서리, 이 백발만은 녹이지를
못하는구나 이 백발이 봄눈 녹듯이 녹아 없어져 버리는 기적은 없는가? 늙어가는 인생,
인생무상을 한번 한탄해 본 것이다.
268. 뒷뫼에 뭉킨 구름
정훈
뒷뫼에 뭉킨 구름 앞들에 퍼지거다
바람불지 비올지 눈이 올지 서리칠지
우리는 뜻 모르니 아무럴 줄 모르노라
-- 지은이: 정훈(1563__1640)
자는 방로, 호는 수남방옹 이괄의 난 때의 의병을 모아 이를 막았고,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 임금을 모시고 강화로 갔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70노구를 이끌고 의병
모집에 나서는 등, 우국충성이 지극하였다 문집 '수남방옹 유고'와 '방옹 유고'가 있다
-- 감상
광해군 말기의,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고 아슬아슬한 시국을 개탄한
노래다 뒷산 위에 뭉게뭉게 시커멓게 뭉친 험한 구름(대북파의 음모와 광해군의 행패)이 어느덧
앞뜰에까지 퍼져 왔다(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바람이 불지, 비가 쏟아질지, 혹시 눈서리가
내려서 온갖 식물들을 다 사르러뜨려 버릴지 헤아릴 수가 없다(광해군이 결국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 아우 영창대군과 김제남(선조의 장인)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출하는 등 패륜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으로 하여금 이런 패륜 행위를 감행케 한 이이첨, 정인홍 무리의 대북파의 행위에
대한 비분강개와, 이에 대하여 아무 손도 쓸 수가 없는 안타까움을, 천기 현상에다 비유하여
자연스럽게 읊었다.
269. 말하면 잡류라 하고
주의식
말하면 잡류라 하고 말 안하면 어리다 하네
빈한을 남이 웃고 부귀를 새우는데
아마도 이 하늘 아래 살 일이 어려웨라
-- 지은이: 주의식 131. 참고
-- 말뜻
잡류: 점잖지 못한 패거리 잡것들
어리다 하네: 어리석다고 한다
빈한: 가난함
새우는데: 시기하는데 미워하는데
-- 감상
말을 하면 잡것이라고 경멸하고, 반대로 말을 하지 아니하면 어리석다고 탓한다 가난하면
못났다고 비웃고, 부귀한 사람에 대하여서는 시기하고 미워한다 세상이란 이렇게 말이 많고
까다로워 헤쳐 나가기라 힘드니, 이 하늘 아래에서 살아 나간다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어려운
일이로구나! 지은이의 성품으로서 으레 있을 법한 이야기라 하겠다.
270. 문장을 하자 하니
안서우
문장을 하자 하니 인생 식자우환시오
공맹을 배우려 하니 도약등천 불가급이로다
이내몸 쓸데 없으니 성대 농보 되오리라
-- 지은이:안서우(1664__1735)
자는 봉거, 호는 양기옹 숙종 때에 울산부사 등을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무주의 산수를 사랑하여 한평생 그곳에 살기로 작심한 후 서울과는
발을 끊고, 첨지중추부사의 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시조 19수가 전한다
-- 말뜻
인생 식자우환시: 섣불리 글줄이나 안다는 것이 도리어 인생의 걱정거리의 시초가 된다
공맹: 공자와 맹자 학문을 뜻하는 말
도약등천 불가급: 도에 이르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 같아서 도저히 따라 미칠 수가 없다 공맹의
도를 닦는다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뜻이다
성대 농보되리라: 태평성대의 농부나 되리라
-- 감상
글을 익혀서 문장가가 되어 볼까 해도, '식자우환'이라는 말대로 섣불리 글을 안다는 것이
도리어 인생에 근심 걱정거리나 만들어 주는 빌미가 될지 모르니 안되겠다 공자, 맹자의 학문을
닦아서 학문으로 이름을 날려 볼까 해도 아서라, 도에 이르기란 하늘에 오르기만큼이나 어려우니
도무지 엄두가 안난다 어리석은 이 몸은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켜서 밭갈이하는 농부나 되어
보리라
옛시조를 보면, 이것저것 힘들고 귀찮은 일일랑은 다 집어치우고 농사짓기나 해보겠다는 것이
많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과 초야에 묻힌다는 것이 동일시되었던 옛사람의 소박한 생각이
엿보인다.
271. 반넘어 늙었으니
이명한
반넘어 늙었으니 다시 젊든 못하여도
이 후나 늙지 말고 매양 이만 하였고자
백발이 너나 짐작하여 더디 늙게 하여라
-- 지은이: 이명한 48. 참고
-- 감상
이런 심정, 지금까지 늙은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단념해 버리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더 늙지나 않았으면 하는 심정은 어느 늙은이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별로 꾸밈없이 담담하게 읊은 것이 이 시조에 친근감을 가지게 한다
늙음에 대한 새삼스러운 자각, 이윽고 다가올 죽음에 대한 불안 내지 두려움,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서 늙은이의 심정은 언제나 안정성을 잃는 것이 예사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인생의 완숙기를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수양이 되어 있는 이는 행복한 인생이라 할 것이다
보람있는 자신의 삶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272. 백설이 잦아진 골에
이색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에라
반가온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 지은이:이색(1328__1396)
자는 영숙, 호는 목은 고려 삼은의 한 사람 원나라에서 벼슬도 했으며,
귀국해서는 그가 배운 학문과 능력을 발휘하여 조정에 크게 봉사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으며, 제도를 정비하고 인재를 발탁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정도전 등
여러 문사들이 배출되었다 저서로 '목은집'이 전한다
-- 말뜻
잦아진 골에: 잦아진 골짜기에 다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머흘에라: 험하구나! '머흘다'는 험한 구름이 뭉게뭉게 낀 것 '__에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반가온: '반가운'의 아어형
-- 감상
흰눈이 거의 다 녹아 없어진 골짜기에 험한 먹구름만 뭉게뭉게 끼었구나 그런데 나를 반겨
줄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해 저무는 석양녘에 혼자 외로이 서 있어 갈 곳을
몰라 하노라
충신과 지사들(백설, 매화)이 몰락하고 간신들(구름)이 들끓는, 나라가 기울어 가는 이 판국에
몸둘 곳을 몰라 하는 지은이의 심정을 이렇게 읊은 것이다 고려의 500년 사직은 무너져 내리고,
이성계 일파의 신흥 세력은 이미 개국의 길을 달리고 있는데, 이 판국에 갈 곳 몰라 하는
지은이의 심정이야말로 '착잡함', 바로 그것일 것이다 지은이의 감회가 참으로 절실하기 때문에
읽으면 읽을수록 감회가 샘솟는다 이심전심이라고 해도 좋다.
273. 백일은 서산에 들고
최충
백일은 서산에 들고 황하는 동해로 들고
고금 영웅은 북망으로 든단 말가
두어라 물유성쇠니 한할 줄이 있으랴
-- 지은이: 최충(984__1068)
자는 호연, 호는 성재 고려 문종 때의 대유학자로서, 벼슬은 문하시중을
지냈다 사학을 일으켜, 해동공자로 추앙을 받았으며, 만년에는 구재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 말뜻
백일: 밝은 해 태양
황하: 중국 청해성에서 발원하여 발해로 들어가는 큰 강 강물 빛이 누렇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겼다
북망: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을 말한다 중국 하남성 낙양 북쪽에 있는 산인데, 일종의
공동묘지였다
두어라: 시조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사로서, '내버려두어라, 너무 신경 쓸 것 없다'는
뜻이다
물유성쇠: 만물은 성하면 반드시 쇠하는 법칙이 있다는 말 불교에서 말하는 '생자필면,
회자정리, 제행무상'이 모두 그런 뜻이다 또한 '화무십일홍'이니, '권불십년'이니 하는 것이
다 그것이다 그 이치를 깨달으면 달관의 세계관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시조의 주제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 감상
해는 서산으로 지고, 황하는 동해로 흘러 들어가고, 고금의 영웅들은 죽어서 무덤으로 돌
아간다 이것은 만유의 법칙이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는, 질서정연한 자연의 섭리다 그리고
이 법칙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또한 창해일속의 인간인 것이다 이 대자연의 섭리
를 안다면, 창해일속의 인간이 부하면 얼마나 부하고, 귀하면 얼마나 귀할 것인가 영화를
누려 보았자 영겁에서 보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인간의 삶에는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
영원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세계(저세상)에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의미한 것인가? 아니다 유한한 것이 삶이기에 삶의 가치는 존귀하다
그래서 모든 생물은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사람들은 짧은 삶이기에 더욱 알차게, 더욱
보람있게, 더욱 값지게 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의와 불의, 성공과 실패, 승리과 패배, 건설과 파괴, 긍정과 부정 등의 정과
반이 톱니바퀴인 양 서로 물고 돌아가는 것이 인간 사회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지은 원인은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또한 법칙이요 섭리이다 인과의 법칙도 어김이
없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 누린 향락이 잠깐 동안인 데 비하여 저세상에서 누릴 업보의
영원함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인생무상을 '한할' 것이 아니라, 먼저 '물유성쇠'를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두어라'를 체념이라기보다는 깨달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풀이가 될 것이다.
274. 선인교 내린 물이
정도전
선인교 내린 물이 자하동에 흐르르니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이야 고국 흥망을 물어 무엇하리요
-- 지은이:정도전(? __1398)
자는 종지, 호는 삼봉 조선조 창건의 개국 공신으로 여러 벼슬을
거쳤으나, 왕자들의 정권 다툼에 말려들어 태종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문장이 명석하고 시에도
능하였으며 새 왕조를 찬양하는 '신도가, 납씨가, 문덕곡, 정동방곡' 등의 노래(악장)를
지었다 특히 '고려사' 37권의 찬술(공저)은 특이할 만하다
-- 말뜻
선인교: 고려의 서울인 개성 자하동에 있는 다리 이름
자하동: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경치 좋은 골짜기
반천년 왕업: 왕업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업 고려의 왕업이 475년 동안 계속되었으니,
줄잡아 반천 년이다
고국 흥망: 옛나라의 흥하고 망함 물론 고려의 흥망을 말한다
-- 감상
선인교 밑을 흐르는 물이 변함없이 자하동으로 흘러 내려가는구나! 그런데 여기 개성이
서울이던 고려는 이미 망하고 말았으니, 그 500년 동안의 왕업이 이제는 이
물소리뿐이로다 그러나 이미 망한 나라, 그 옛나라의 흥망을 이제 새삼스럽게 생각해서 무엇하랴?
망국에 대한 슬픔이나 분함보다는 잊어버리려는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이성계의 오른팔로
개국의 일등 공신인 지은이의 이력을 생각하면, 당연하고도 남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고려인으로서의 일말의 애수와 마음속의 괴로움이 풍기는 것을 보면, 이 시조의 문학성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275. 시절도 저러하니
이항복
시절도 저러하니 인사도 이러하다
이러하거니 어이 저러 아니하리
이렇다 저렇다 하니 한숨겨워 하노라
-- 지은이: 이항복 34. 참고
-- 감상
세월(시국)이 저렇게 어수선하니, 세상일(인간사)도 이렇게 뒤숭숭하구나! 세상이 이렇게
뒤숭숭하니, 세월인들 저렇게 어수선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만사가 다 이렇게 뒤숭숭하고
저렇게 어수선하기만 하니, 나오는 것은 오직 한숨뿐이로다
팔년 풍진의 임진왜란을 겪은 세상이니 오죽이나 뒤숭숭했으랴 그 북새통에서도 당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권력 다툼은 쉬지를 않았으니, 풍전등화같은 국운을 앞에 하고 망국의
환영이 좀 그를 괴롭혔겼는가? "한숨겨워 하노라"의 한마디가 그의 무거운 심정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허약하구나.
276. 어와 동량재를
정철
어와 동량재를 저리하여 어이할꼬
헐뜯어 기운 집에 의논도 하도할사
못지워 고자자 들고 헤뜨다가 말려나다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어와: 아! 감탄사이다
동량재: 대들보감 도리와 대들보가 될 만한 좋은 재목 나라를 위하여 일할 만한 인재
헐뜯어: 헐고 뜯어
기운 집: 기울어진 집
하도할사: 많기도 많구나!
뭇지워: 여러 목수
고자자: 고자와 자 '고자'는 목수가 먹줄을 칠 때에 쓰는 먹고 자(먹통), '자'는 길이를
재는 자
헤뜨다가: 허둥대다가
-- 감상
아, 저 훌륭한 대들보감을 저렇게 해서 못쓰게 만들어 버리니, 저 일을 어찌할꼬 헐고
뜯어서 다 기울어진 집에 말썽시비도 많기도 하다 여러 목수들이 먹통과 자를 들고 허둥대기만
하다가 말려는구나!
말할 것도 없이 '동량재'는 나라의 유능한 인재를 가리키고, '뭇지위'는 권모술수나 일삼는
정치가, 당쟁에 골몰한 군상들을 가리키며 '기운 집'은 어지럽기가 말이 아닌 나라 꼴에 비긴
것이다 당쟁이라는 것이 역시 나라를 좀먹고, 겨레를 도탄에 빠뜨리는 고질임에 틀림없는데,
그래도 자꾸 으르릉거리고 인재를 헐뜯고 매장시켜 나라를 기울게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로다!
참으로 절묘한 비유다.
277. 엊그제 벤 솔이
김인후
엊그제 벤 솔이 낙락장송 아니런가
적은덧 두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이 버티랴
-- 지은이: 김인후 117. 참고
-- 말뜻
적은듯: 잠깐 동안 '덧'은 '어느덧'의 '덧'으로 '동안'의 뜻
동량재: 기둥이나 대들보감 훌륭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명당: 흔히 좋은 묏자리를 명당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훌륭한 건물의 뜻이다 임금이
조현을 받는 정전을 말하는 것이니, "명당이 기울면"에는 '나라가 기울면'의 뜻이 있다
-- 감상
엊그제 무참히도 베어 버린 소나무가 정정한 낙락장송이 아니던가 이것이 무슨 생각없는
짓이란 말이냐 그냥 놓아 두었더라면 틀림없이 구하기 어려운 대들보감이 될 것인데... 아,
이제 명당이 기울게 되면, 어느 나무로 그것을 버틸 것인가
훌륭한 인재를 그렇게 죽여 버리면, 이 나라를 누가 버틸 것이냐고 정미사화의 제물이 된
막역한 친구 임형수의 죽음을 개탄한 노래이다
정미사화는 일명 '벽서의 옥'이라 하여, 명종 2년(1547)에 전라도 양재역 벽에 문정왕후
(명종의 생모)를 가리켜 "여왕이 위에서 정권을 농락하고, 아래에서 이기가 권세를 부리어
나라가 망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인가"하는글이 씌어져 있었던 것을
이른다 이 때문에 봉성군, 송인수, 임형수 등이 윤임의 일당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퇴계 이황까지도 '문무를 겸비한 기장사'라고 불렀던 임형수는 이 시조를 지은 김인후와
교분이 두터웠다 이 시조의 지은이가 '고금가곡'에는 정철(송강)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착오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278. 역발산 기개세는
임경업
역발산 기개세는 초패왕의 버금이오
추상절 열일층은 오자서의 우희로다
천고에 늠름장부는 수정후인가 하노라
-- 지은이: 임경업(1594__1646)
자는 영백, 호는 고송 인조 때에 이괄의 난을 평정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윤으로 백마
산성을 지켜 청군을 막아 싸웠다 뒤에 명나라와 손잡고 청나라를 치려다가 붙잡혀 압송 도중
에 탈출했으나, 심기원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김자점 일당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지략과 용맹으
로 일세를 드날렸을 뿐 아니라, 후세까지도 이름을 떨친 장수다 그의 무용담을 엮은 고대소설
'임경업전'이 있다. 충주 충렬사에 모셔졌다.
-- 말뜻
역발산 기개세: 힘은 산을 뽑고, 기상은 온 세상을 뒤덮는다 이 시조의 문맥상으로는 '발산력,
개세기'라야 옳지만, 항우가 죽기 직전에 지은 유명한 시의 문구 '역발산혜, 기개세혜'가 입에
익어서 이렇게 불리는 것 같다
초패왕: 진나라를 치고 초나라를 세운 항우로서, 힘이 굉장히 세었으나 성격이
우둔하였다 한나라의 유방과 싸우다가 죽었다
추상절 열일충: 서릿발 같은 엄한 절개와 햇빛 같은 뜨거운 충성 지엄한 충절을 이르는 말
오자서: 초나라 사람으로, 아버지와 형이 초나라 평왕에게 피살되었는데, 오나라로 가서 오를
도와 초나라를 멸망시켜 원수를 갚았다
우희로다: 위로다
수정후: 중국 촉한의 장수 관우의 봉호
-- 감상
산을 잡아 뽑을 만한 힘과 온 세상을 뒤덮을 만한 기개는 항우의 다음이요, 서릿발 같은 절개
와 햇빛같이 뜨거운 충성은 오자서보다도 네가 오히려 위로다 그리하여 천년만년을 두고 씩씩한
대장부는 관우인가 하노라 무인의 기개를 무인답게 털어놓았다.
279. 오면 가려하고
선조
오면 가려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허하노라
-- 지은이:선조 대왕: (1552__1608)
조선조 제14대 임금으로, 이퇴계, 이율곡 등의 대학자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고, '유선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으나, 임진왜란의 7년 풍진으로 나라가 몹시
피폐하였다 시호는 소경, 능호는 목릉(경기도 양주군에 있음)
-- 감상
선조 5년에 재상 노신이 굳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때에 선조 임금이 이
노래를 지어 은쟁반에 써서 중사를 시켜 이것을 한강 건너에서 전하였다고 한다
오기가 바쁘게 가려 하고, 한번 가면 다시 올 줄을 모르니, 오노라 가노라 하다가 결국 만나
볼 날이 전혀 없구나 오늘도 또 간다고 떨치고 나서니 그를 슬퍼하노라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이 이토록 인간적일 수가 있을까?
옛날의 명신들은 나오기를(취임하기를) 더디게 하고, 물러가는 것(사임)을 빨리함을 명분으로
삼았다 오늘에 비하여 아주 대조적인데, 그럴수록 임금의 신임은 더욱 두터웠던 모양이다.
280. 오백년 도읍지를
길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지은이: 길재(1353__1419)
자는 재부, 호는 야은 포은 정몽조, 목은 이색과 더불어 여말삼은의 한
사람 일찍부터 정몽주, 이색, 권근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순유박사가
되었다 이방원(조선 태종)이 태자가 되어 태상박사를 주었으나,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켜 받지
아니하였다
-- 말뜻
오백년 도읍지: 고려의 서울 개성을 말한다 고려 왕조가 475년이니 줄잡아 500년이다 도읍
지는 서울로 정한 곳이니, 곧 송도 개성을 말한다
필마로: 필마는 한 마리의 말이라는 뜻으로 필마단기의 준말이니, 혼자서 말을 타고
의구하되: 옛모습과 다름이 없이 여전하건만
인걸: 뛰어난 인물들
어즈버: 아! '어져'와도 통하는 감탄사이다
태평연월: 태평한(평화로운) 세월
꿈이런가: 꿈이던가 ㄷ과 ㄹ은 서로 넘나드는 음이다
-- 감상
고려가 조선으로 바뀐 무렵, 여말 충신들에 의하여 불려졌던 이른바 '회고가'의 하나로서,
흥망성쇠와 인생무상을 읊은 노래인데, '감개무량'이라는 말이 이토록 절절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것이 '강개무량'으로 돌출하려는 형국이다
고려 500년 동안의 서울이었던 송도를 혼자서 말을 타고 돌아들어서 보니, 산천(자연)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건만, 인걸은 간 곳이 없구나! 인사는 몹시도 변해 버렸구나 아,
지난날의 태평스럽던 세월이 꿈만 같도다! 자연은 변함이 없건만 인생은 너무도 무상하구나!
시조의 정형에서 한 자의 어긋남도 없는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참으로 운율적인 시조다
그래서 더욱 인구에 회자되는 시조이다.
281. 일생에 얄미운손
일생에 얄미울손 거미 외에 또 있는가
제 배알 풀어내어 마냥 그물 널어 두고
꽃 보고 춤추는 나비를 다 잡으려 하더라
-- 감상
세상에 얄밉기는 거미 말고 또 있을까 항상 제 밸(창자)을 풀어 내어 그물을 널어 두고(거미
줄을 쳐 놓고)꽃을 보고 춤추며 즐거이 날아다니는 천진스러운 나비들을 다 잡으려고 하는구나!
"얄미울손 거미"는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인의 무리를,
"꽃 보고 춤추는 나비"는 풍류를 아는 선비를 비유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철저한 은유가
독자에게 몹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시조다 지은이를 안다면, 내용의 구체적인 실마리는
좀더 풀릴 터인데 지은이를 알 수 없음이 안타깝다.
282. 있으렴 부디 갈다
성종
있으렴 부디 갈다 아니 가든 못할소냐
무단히 싫더냐 남의 말을 들었느냐
그래도 하 애닯구나 가는 뜻을 일러라
-- 지은이: 성종(1457__1494)
조선조 제9대 임금 이름은 혈,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백가와 성리학에 밝고,
서화와 사예에도 능한 명군으로서, 재위 기간 중 파란없이 문운이 일었고, 선대(세종, 세조)에
이룩한 문화가 비로소 꽃을 피웠으며 문물 제도가 정비되었다 '여지승람' '동국통감' '동문선'
'오예의' '두시언해' 등을 간행하여 교육과 문화 진흥에 힘썼다
-- 말뜻
갈다: 가겠느냐" '__ㄹ다'는 의문형 종결어미로서, '__ㄹ 것이냐?'의 의미
무단히: 까닭 없이 괜히
-- 감상
성종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여지승람'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던 유호인이 늙은 어머니
를 봉양하고자 굳이 지방관직으로 물러가려 할 때에 만류하다 못해 술잔을 권하면서 읊은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내 곁에 있으려무나 그래도 꼭 가야 하겠느냐 아니 가면 안되겠느냐?
까닭도 없이 서울 벼슬이 싫단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남의 말을 듣고 충동이 되어 그러는
것이냐 어쨌든, 애닯고 매우 서운하구나 그래도 가야 한다면 네 생각이나 속 시원히 말해다오
이것은 임금의 신하에 대한 태도라기보다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태도와 진배없다 성종 임금의
인간미 넘치는 성품이 흐뭇하기만 하다.
283. 춘산에 눈 녹이는
우탁
춘산에 눈 녹이는 바람 건듯 불고 간데 없다
적은덧 빌어다가 머리 우희 불리고저
귀밑의 해묵은 서리를 녹여 볼까 하노라
-- 지은이: 우탁(1263__1343)
자는 천장, 호는 역동 고려 충선왕 때에 감찰규정을 지내다가, 왕이
부왕의 후비를 범하자, 이를 극간하고 은퇴하였다 후에 충숙왕이 다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때마침 송나라에서 갓 들어온 정자학을 해득하여 후학에게 가르쳤는데, 그것이 우리 나라 이학의
시초가 된다 경사와 역학 공부에 전념하여 대가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역동 선생'이라 불렀다
시조 2수가 전한다
-- 감상
봄 산의 눈 녹인 따뜻한 바람을 잠깐 빌려다가 내 머리 위에 불게 하여 해묵은 서리(백발을
녹여 보면 어떨까 눈을 녹인 봄바람도 못 녹이는 머리 위의 서리)백발 다 같은 조물주의
자연 현상이건만, 어이하여 이다지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늙음을 단적으로 알리는 백발이란 정말로 야릇한 것, 그것이 보기가 싫어서 사람들은
새치 뽑기를 하다가, 다음에는 염색이라는 것을 해서 감추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부질없는
일이고, 어리석은 노력이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당랑거칠이니 말이다.
284. 춘산에 불이 나니
김덕령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몸에 내 없은 불이 나니 끌 물 없이 하노라
-- 지은이:김덕령(1567-1596)
자는 경수,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조선의 조자룡'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조좌랑으로 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20대 젊은 나이에 호익 장군이란
칭호를 하사 받았다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왜군이 감히 범접하지도 못하
였으나, 왜군과 내통하였다는 이몽학의 모반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잡혀서 혹독한 고문에 못
이기고 30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뒤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의 시호를 받았다
-- 말뜻
못다 핀 꽃: 할 일을 못다하고 죽어가는 자신을 가리킨 것
내 없은 불: 연기도 안 나는 불 알아주는 이 없는 억울한 심정
-- 감상
봄 산에 산불이 나니 아직 다 피지도 못한 아까운 꽃이 다 타 버리는구나 그런데 저 산에
난 저 불은 그것을 끌 물이라도 있지만, 이내 몸에 연기도 없이 타는 불은 끌 물조차 없으니,
이런 안타까운 노릇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억울하고 절통한 지은이의 심정의 표현이다
현명하지 못한 임금과 간신배가 득실거리는 상황에서 진정한 애국 충렬이, 유용한 명장이 화를
입고, 국운이 더욱 기울어져 버리는 실례를 우리는 역사상에서 흔히 접할 수가 있다 젊은 용장
김덕령의 경우도 그것의 하나이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라는 것이 왜적의 공격은 막아낼 수도 있다는 의미라면,
지은이의 안타까운 심정이 읽는 이의 울분으로 폭발하려는 충동을 누를 길이 없다 훌퓽한
인재가 불의의 희생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 조선조 500년의 역사, 그중에서도 이른바 당쟁이 소용돌이 치던 시대의 무슨무슨 사화니,
무슨무슨 옥사니 하는 사건들은 아까운 인재의 손실의 연속이었다 미운 사람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 버리는 일을 식은죽 먹기처럼 하였으니 말이다
저 영국의 대시인 밀턴은 왕을 단두대로 보내라는 글을 지어 의회파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지만,
왕당파가 승리한 뒤에도 밀턴의 인물을 아껴서 그를 용서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은
'실락원'과 같은 불후의 세계적 명작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겨레는
영원히 번영할 것이다.
285. 터럭은 희었어도
김수장
터럭은 희었어도 마음은 푸르렀다
꽃은 나를 보고 태없이 반기거늘
각시네 무슨 탓으로 눈흘김은 어째오
-- 지은이: 김수장 21. 참고
-- 말뜻
터럭;머리털 머리카락
태없이: 뽐내는 빛을 보이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각시네: 아가씨들 색시들 '__네'는 복수를 나타낸다
무슨 탓으로: 무슨 까닭으로 어째서
눈흘김: 눈을 흘겨봄 백안시
어째오: 어쩐 일이오 웬일이오
-- 감상
꽃은 자연의 미인이요, 각시는 인간의 미인이다 백발에 대한, 늙은이에 대한 꽃과 각시의
보는 눈이 이다지도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이냐 겉은 늙었어도 속은 젊은 나를, 자연의 꽃은
제대로 보아 주는데 인간의 각시는 바로 볼 줄을 모른단 말이냐 각시네야! 그 얕은 생각,
그 얄팍한 우주관을 버리고 꽃한테서 좀 배워라 겉도 보고 속도 볼 줄 아는 그런 깊은 마음,
심안을 길러 보아라 마음을 닦으면 얼굴도 더욱 예쁘지고 눈도 한결 빛날 것이니라 청춘에게
외면 당하는 늙은이의 넋두리만은 아닌 것 같다.
286. 평생에 한하기를
평생에 한하기를 희황적에 못 난 줄이
초의를 무릅쓰고 목실을 먹을 망정
인심이 순후하던 줄을 못내 부러워 하노라
-- 말뜻
희황적: 희황의 시대 먼 옛날 태평하던 시절을 말한다 희황은 중국 상고 시대의 임금인
태호 복희씨를 말한다 그의 성덕이 해와 달같이 밝아서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
초의: 풀로 만든 원시적인 옷 성장의 반대
목실: 나무 열매 이것을 먹는다는 것은 호의호식의 반대를 뜻한다
순후: 순박하고 후하다 꾸밈과 되바라짐이 없음을 뜻한다
-- 감상
아득한 옛날, 태호 복희씨의 태평성대에 태어나지 못한 것이 평생에 한이로다 비록 풀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살았을망정, 인심이 순후하였던 것이 부럽기 그지없구나
오늘의 문명인, 특히 도시인이 외치고 싶은 말들이다 산업사회니, 경제 성장이니 하는 것이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향상시켜 주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것은 편의와 더불어 공해를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인데도 각종 질병은 자꾸 늘어나기만 하고,
특히 고혈압이니 당뇨병이니 암이니 하는 성인병은 더욱 극성을 부리고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새삼스럽게 자연을 다시 찾고, 자연식이라는 것을 구하기에 골몰하니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그보다도 더 염려되고 걱정되는 것은 정신적 타락이요 범죄의 증가라는, 어쩌면 인류의
멸망까지도 예측하게 되는 일들이 자꾸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말세적인 현상이다 물질
만능주의, 쾌락제일주의, 황금만능사상, 이런 것들이 정신적 폐허에서 비온 뒤의 독버섯
생겨나듯, 순후한 인간성을 좀먹어 가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예고하는 것인가 또한 정신적인
타락자에게는 문명의 이기나 금은보화가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오늘의 위정자는 눈에 보이는 전시 효과적인 건설보다, 오히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정신문화의 재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을 꼭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287. 해도 낮이 계면
해도 낮이 계면 산하로 돌아지고
달도 보름 후면 한 가부터 이저 온다
세상의 부귀공명이 다 이런가 하노라
-- 말뜻
낮이 계면: 낮이 겨우면 낮이 지나면
한 가부터: 한쪽 가로부터
이저 온다: 이저러져 온다
부귀공명: '부'는 돈이 많은 것 '귀'는 신분이 높아지는 것 '공명'은 나라와 사회에 공을
세워 그 이름을 드날리는 것으로 옛부터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여 마지않던 인간 세상의 이상
-- 감상
온 세상을 환히 밝히는 저 두렷한 해, 만인이 우러러보는 저 해도 낮이 지나면 산이나 강으로
기울어 들어가게 되고, 밤하늘을 비추는 밝은 달, 만인이 한결같이 우러러보는 저 달도 보름이
지나면 한쪽 가에서부터 이지러지기 시작한다 뜨면 지고, 차면 기우는 것이 해와 달이므로
언제까지나 영원히 불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와 달이다 세상의 부귀와 공명이라는 것도
다 그렇게 덧없는 것이니, 그것에 연연할 것은 조금도 없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 그렇다, 즐겁다고 해서 넋을 잃을 필요가 없다 즐거움이란
괴로움의 표리일 뿐, 그 즐거움이 극에 달하면 괴로움에로 곤두박질하는 것이 천리이다 반대로
괴로움이 극에 달하면 즐거움에로 되돌아가는 법이니, 괴로움에서 좌절할 필요 또한 없는 것이
인생임을 알아야 한다
흥이 있으면 망이 있고, 성이 있으면 또한 쇠가 있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라는
것이다 생자필멸, 회자 정리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생한 자는 반드시 멸하고,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간 사회의 진리요, 우주의 도리이다 그래서 부귀 공명은 자연 속에서 부침하는 한낱의
물거품이지 인간 본연의 가치는 아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추구에 골몰한 것이 또한 인생이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인가.
288. 화작작 범나비 쌍쌍
화작작 범나비 쌍쌍 유청청 꾀꼬리 쌍쌍
날짐승 길짐승 다 쌍쌍하다마는
어찌 이내몸은 혼자 쌍이 없는고
-- 지은이
송강 정철의 지음이라고 하고, '대동시림'과 '연주시격'을 엮은 유희령이 지었다고도 한다
-- 말뜻
화작작: 꽃들이 찬란하게 울긋불긋 피어 있는 모양
범나비 쌍쌍: 화사한 차림의 범나비가 짝을 지어 날아다니는 모양
유청청: 버드나무들이 푸릇푸릇한 모양
날짐승 길짐승: '날짐승'은 날아다니는 짐승 곧 새, '길짐승'은 기어 다니는 네 발 가진 짐승
날짐승과 길짐승은 금수라 하여 만물의 영장인 '사람'과 대조되어 많이 쓰여 왔다
-- 감상
울긋불긋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을 찾아다니는 범나비들도 짝을 지어 쌍쌍이 날아다니고,
푸릇푸릇한 버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꾀꼬리들도 다 짝이 있어 쌍쌍이로다 그뿐이랴 온갖
날짐승, 길짐승 같은 미물들도 다 쌍쌍이 짝을 지어 즐겁게 사는데, 어인 일로 이내 몸은
사람이면서도 짝을 못 짓고, 홀로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고?
홀몸의 탄식이 처량하다 음과 양이 화합해야 모든 영위가 원만해지기에 짝을 짓고 쌍쌍이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세상에는 독신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동서고금의 장
수자를 보면 독신자보다 부부해로하는 사람이 많다는 한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도 쌍쌍이
좋은 것이 뻔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하늘의 뜻이요,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89. 흉중에 불이 나니
박태보
흉중에 불이 나니 오장이 다 타 간다
신농씨 꿈에 보아 불끌 약 물어 보니
충절과 강개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
-- 지은이: 박태보(1654__1689)
자는 사원, 호는 정재 숙종 3년에 알성시에 장원 급제하여, 수찬,
어사를 거쳐 파주목사를 지냈으므로 '박파주'라고 한다 인현왕후 폐비를 강력히 반대하다가
진도로 유배되던 도중에 노량진에서 죽었다 뒤에 영의정을 추증되었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썩 잘 썼다
-- 말뜻
신농씨: 중국 고대 삼황의 한 사람으로, 농사와 의약을 가르쳤다고 한다
강개: 불의를 보고 정의감이 불타 슬퍼하고 한탄함
-- 감상
가슴속에 불이 일어나니 오장 육부가다 타 들어간다 인류 최최로 약을 만들었다는 신농씨를
꿈에 만나 불 끌 약을 물어 보았더니, 생리적으로 생긴 병이 아니라 임금님에 대한 충절과
불의를 미워하는 울분에서 생긴 불이기 때문에, 그 불은 끌 약이 없다고 하더라
장희빈과 그 앞잡이들의 간교한 책동으로 어진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 극간을 하다가 도리어 모진 고문과 형벌을 받고 죽은 지은이가 그 울분을 토로한
생생한 고백이다.
290. 흥망이 유수하니
원천석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붙였으니
석양에 지나는 손이 눈물겨워 하더라
-- 지은이: 원천석 211. 참고
-- 말뜻
흥망이 유수하니: 흥하고 망하는 것이 운수에 매여 있으니 흥하고 망하는 것이 하늘 뜻에
달렸으니
만월대: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터
오백년 왕업: 고려 왕조는 475년간 계속되었다 왕업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사업, 업적
목적: 목동의 피리 소리
-- 감상
고려의 충신이었던 지은이가 옛서울인 개성을 돌아보면서, 지난 날을 회고하고 세상의
무상함을 슬퍼한 '회고가'의 백미이다
흥망성쇠라는 것이 다 운수(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러서, 고려 왕조는 이미 망하고
그렇게도 화려하던 왕궁은 지금 덩그렇게 터만 남았구나! 그 왕궁 터인 만월대에는 지난날의
번영은 어디 가고, 지금은 쓸쓸히 시들어져 가는 가을 풀만 엉성하게 우거져 있구나 고려
500년의 왕업이 이제 와서는 한낱 목동의 구슬픈 피리 소리에 담겨져 남아 있을 뿐이니 구슬픈
피리 소리만 들려오니, 해질 무렵에 이곳을 지나는 길손은 눈물겨워하는구나!
만월대와 추초, 500년 왕업과 목적, 그 번영과 쇠잔, 그 영화와 무상이 참으로 대조적이다
고려 왕조의 500년 영화의 역사적 상징인 만월대의 그 호화롭던 궁전의 자취는 어디 가고,
이제 시들어가는 가을 풀만 우거진 쓸쓸한 터만을 남기고 있으니... 또한 서슬이 퍼렇던 500년
왕업의 권위는 찾아볼 길이 없고, 한낱 목동의 구슬픈 피리 소리만 들려 오니, 그가 비록 고려의
유민이 아닐지라도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역사의 현장이 가 볼 수 없는 곳이어서 더더욱 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이제 우리가
그 자리(만월대)에 설 수가 있게 된다면, 이중의 감회가 구름처럼 피어오를 것만 같다 고려의
흥망성쇠와 민족 분단의 비극의 발자취를 아울러 더듬을 수 있을 만월대! 과연 언제나 밟아 볼
날이 올런지....
291. 힘써 하는 싸움
이덕일
힘써 하는 싸움 나라 위한 싸움인가
옷밥에 묻혀 있어 할일 없어 싸우놋다
아마도 그치지 아니하니 다시 어이하리요
-- 지은이: 이덕일(1561__1622)
자는 경이, 호는 칠실 임진왜란에 의병을 모아 싸웠고, 뒤에 월사
이정귀의 천거로 절충장군에 올랐다 충무공의 인정을 받고 그 휘하에서도 공이 컸다 광해군 때에 세상이 어지럽게 돌아감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 비분강개하여 시조 '당쟁상심가' 28수를
지었다 함평 월산사에 모셔졌다
-- 감상
기를 쓰고 하는 저 싸움들 그 싸움은 과연 나라를 위한 싸움인가 그것이 아니로다 옷밥에
겨워서, 배가 불러 할 일이 없어서 하는 싸움이로구나! 그것이 암만 해도 그치지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당쟁을 개탄한 노래다 더욱이 광해군 시절의 어지럽던 세태, 난마같이 헝클어진 왕실과 조정,
당쟁을 위한 당쟁을 일삼는 무리들, 그것은 바로 망국 전야의 형국이었다 어찌 뜻있는 선비의
강개가 없었을 소냐 "힘써 하는 싸움" "옷밥에 묻혀 있어" 등의 소박하면서도 세련미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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