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여류 작품
323. 아화우 흩뿌릴 제 : 계량
324. 장송으로 배를 무어 : 구지
325. 앞못에 든 고기들아 : 궁녀
326. 북두성 기울어지고 : 다복
327. 매화 옛 등걸에 : 매화
328. 죽어 잊어야 하랴 : 매화
329. 꿈에 뵈는 님이 : 명옥
330. 상공을 뵈온 후에 : 소백주
331. 당우를 어제 본듯 : 소춘풍
332. 솔이 솔이라 하니 : 송이
333. 한양서 떠 온 나비 : 송춘대
334. 철이 철이라커늘 : 진옥
335. 산촌에 밤이 드니 : 천금
336. 어이 얼어 자리 : 한우
337. 못버들 가려 꺾어 : 홍낭
338. 울며 잡은 소매 : 홍장
339. 한송정 달 밝은 밤에 : 홍장
340. 내 언제 무신하여 : 황진이
341. 동짓달 기나긴 밤을 : 황진이
342. 산은 옛산이로되 : 황진이
343. 어져 내 일이여 : 황진이
344. 청산리 벽계수야 : 황진이
345. 청산은 내 뜻이요 : 황진이
제9장 여류 작품
1장에서 8장까지는 작품을 주제별로 크게 나누어 장을 삼고, 각 장마다 작품의 초장의
첫구절을 가나다순으로 배열하였지만, 여기에서는 그 틀을 깨고, 여류 작품만을 모아,
그것을 지은이의 이름 가나다순으로 꾸며 보았다 숫자상으로 지극히 영성한 여류
작품이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하나의 특색이 있어서, 그것을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니, 여필종부이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억압된 유교적 봉건
질서에서의 여인의 활동 무대란, 불모지대였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시조 문학이라는 꽃이
피었을까?
기녀 사회, 그 불모의 사막에도 이런 오아시스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래서 그 대부분이 그들의 작품인 동시에, 지역적으로는 관서와 관북 지방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도 거기에 무슨 연유가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고뇌와 진실성을 담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 모두가 가슴에 와 닿는 인간적인
감명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표현면에 있어서는 남성들의 작품에는 한문식 표현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들 여류 작품들은
쉬우면서도 생활 속에서 우러나오는 순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려서 쓴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그것이 더욱 한국적인 향기를 풍기고 있다 여인의 섬세한 감각이 소박하면서도
박진감 있는 우리말에 실려, 구슬같이 아름다운 운율을 노래하고 있다.
323. 이화우 흩뿌릴 제
계량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 지은이:계량(1513__1550)
성은 이씨, 본명은 향금, 호는 매창, 계생 부안의 명기로, 시조 및 한시
70여 수가 전한다 황진이와 비견할 만한 여류 시인으로서, 여성다운 정서를 노래한 시편이 많다
'매창집'이 있다 1974년 부안읍 상소산 기슭에 그녀의 시비가 세워지고, 이 시조가 새겨졌다
-- 말뜻
이화우:비 오듯이 흩날리는 하얀 배꽃 특히 늙고 큰 배나무에서 펄펄 떨어져 날리는 배꽃비는
마치 눈보라 같은 장관을 이룬다
추풍낙엽:가을 바람에 쓸쓸히 떨어지는 나뭇잎 '낙엽지는 가을'의 뜻으로 보아도 좋다
하노매:하노매라! '-노매(믜)라'는 감탄형 종결어미로서 '-는구나!'
-- 감상
하얀 배꽃비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던 어느 봄날에 옷소매 부여잡고 울며 헤어진 님인데, 지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어도 한마디 소식이 없구려 서울에 계시는 무정한 님이여,
그대도 나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부안과 서울, 천리 밖에 떨어져서 몸은 못 가고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니 애가 타는구려! 꿈에만 볼 수 있는 그리운 님이여!
임진왜란 때, 의병 지휘의 공으로 통정대부가 된 촌은 유희경과 정이 깊었는데, 그가 서울로
올라간 뒤 소식이 없으므로, 이 시조를 짓고 수절하였다고 한다
의병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는 님 유희경, 남장을 하고 그를 찾아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울며
돌아온 계량은 또 이렇게 읊었다
기러기 산채로 잡아 정들이고 길들여서
님의 집 가는 길을 역력히 가르쳐 두고
밤중만 님생각 날 제면 소식 전케 하리라
'비련의 여왕'의 환상이 얼핏 머리속을 스치게 하는 그런 작품이다.
324. 장송으로 배를 무어
구지
장송으로 배를 무어 대동강에 띄어 두고
유일지 휘어다가 굳이굳이 매었는데
어디서 망녕엣것은 소에 들라 하나니
-- 지은이:구지(연대 미상)
평양 기생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을 뿐, 다른 기록이 없다 '해동가요'에
이 시조가 한 수 실려 있을 뿐이다
-- 말뜻
장송:크게 자란 소나무 낙락장송
배를 무어:배를 만들어 '무어'는 '무으다'라는 옛말인데, '짓다, 만들다, 구성하다,
구축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지금도 쓰이는 말이지만, 북한에서는
이 말을 '조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유일지:버드나무 한 가지인데, 지은이의 애부를 가리킨다
망녕엣것:망녕된 것이라는 뜻인데, 남의 속도 모르고 추근거리는 한량들을 빗댄 것
-- 감상
큰 소나무로 배를 만들어 대동강에 띄워 두고, 강가의 버드나무가지(평양에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경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를 휘어다가 단단히 비끄러 매어 두었기 때문에 끄떡도
하지 않는데, 어디서 망녕된 화상이 여기를 떠나서 소로 들라고 하느냐
사랑의 노래다 평양 명기 구지의 꿋꿋한 지조를 과시하는 노래다 유일지라는 애부에게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고 있는 몸이다 그러니까 짖궂은 한량들아, 부질없이 넘보지 말라
장송으로 무어 대동강에 띄운 배는 구지 자신이요, 소에 들라고 꾀는 "망년엣것"은 속도
모르는 한량을 빗댄 것 "굳이굳이"는 자신의 이름 '구지'와 의미를 중첩시켰고 "유일지"는
버들가지와 뜻을 포개었다 이른바 중의법을 써서 절묘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휘어다가"라는
어휘 선택도 자연스러우면서도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다 장송으로 무은 배니 본래 든든하기도
하지만, 게다가 또 버들가지로 단단히 매어 두었으니, 웬만한 바람에는 끄덕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넘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소에 들라"고 꾀어 보았자 어림도 없다, 이
망녕엣것아!
따라서 구지의 이 시조는, 속뜻으로는 송이의 "솔이솔이라 하니 무슨 솔만 여기는다"와
일맥상통하고, 수법에 있어서는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을..."과 견줄 만한 재기가 넘치는
표현 수법이다 여류 시인의 섬세한 감각은 이런 기적을 곧잘 만들어 낸다.
325. 앞못에 든 고기들아
궁녀
앞못에 든 고기들아 뉘라서 너를 몰아다가 넣거늘 든다
북해 청소를 어디 두고 이곳에 와 든다
들고도 못 나는 정은 네오내오 다르랴
-- 감상
궁녀의 신세타령이 처량하다 '앞못에 든 고기들', 그 좁은 세계에서 복작거리는 물고기에다
궁녀의 신세를 비유하였다 적절한 비유라 하겠다
궁녀란, 말할 것도 없이 구중심처 깊은 대궐 안에 갇혀서, 세상 형편을 모르고 기계처럼
살아가던 대궐의 나인을 말한다 물론 결혼도 못하고 한평생을 늙어야 하고,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상감과의 만남을 유일한 희망으로 가냘픈 삶을 살아야 하는, 가련한
여인들이다 운이 좋아서 상감의 총애를 받게만 되면, 후궁이 되어 권세를 누려 볼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100년 하청을 기다려야 하는 기적을 믿고 사는 여인들이다
"북해 청소를 어디 두고" 이 못에 들어왔느냐 말이다 인간 세상, 아무리 살기가 힘든
당시였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가 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를
앞세우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냐 "들고도 못 나는 정,"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등을
밀려 들어온 이 못, 오죽이나 나가고 싶기도 하랴마는 그것도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그 들고도(들어오고도) 못 나는(나가는) 심정이냐 너나 나나 다를 것이 없다 참으로 답답한
삶이다 그 답답한 심정을, 그래도 문학은 붓끝에 실어서 풀어 주었는가 보다 이러한 한이
모여서 '궁중 문학'이라는 것이 싹을 틔운 것이다.
326. 북두성 기울어지고
다복
북두성 기울어지고 경오점 잦아진다
십주가기는 허량타 하리로다
두어라 번우한 님이니 새워 무슴하리요
-- 지은이:다복
기녀라고 하여 '해동가요'에 이 한 수가 전할 뿐, 다른 기록이 없다
-- 말뜻
경오점:'경'은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눈 시간의 단위(초경, 2경, 3경, 4경, 5경)이고, '점'은
경을 다시 5등분한 것
잦아간다:밤이 깊어 간다
십주 가기:'십주'는 신선이 살고 있다는 10곳의 선경 '가기'는 아름다운 때 또는 기약이니,
아름다운 곳에서 맺은 사랑의 약속인가
허랑타:허무맹랑하다 미덥지가 못하다
번우한:번우(친구 우)는 번우(근심 우)의 잘못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글자 그대로 억지로
풀이해 보면 '사귀는 벗이 많아서 번거로운'이 될 것이다
새워 무슴하리요:시기하여서 무엇하리요 사랑에 대한 일종의 체념이다
-- 감상
북두칠성의 별자리가 기울어진 것을 보니, 3경이 다 되어가는가 보구나! 사랑의 약속이
참으로 허랑한 것이로다 아서라, 애만 태우게 하는 바람둥이 같은 님, 다른 데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님을 시샘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노류장화다운 체념이다
그러나 종장의 여운 끝에 긴 한숨이 묻어 있구나.
327. 매화 옛 등걸에
매화
매화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엄직도 하다마는
춘설이 난분분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 지은이:매화
황해도 곡산 출신의 기생으로, 해주감사 홍시유와의 정사가 전해진다 일설에는 평양
기생이라고도 한다 시조 6수가 전하는데, 모두 애틋한 사랑을 노래한 것들이다
-- 말뜻
옛 등걸:낡은 그루터기
춘설이 난분분:봄눈이 어지러이 휘날리는 모양
필동말동:필둥말둥 필지 말지
-- 감상
매화나무의 늙고 낡은 등걸에도 새봄이 돌아오니, 예전에도 그렇게 소담스럽게 꽃이 피던
가지인지라, 이 봄에도 다시 예쁜 꽃이 필 것 같기도 하지마는 그러나 봄눈이 하도 어지럽게
휘날리어 날씨가 몹시 불순하니, 필지 말지 하구나! 젊었을 시절에는 매화같이 아름답던
나였지만, 이제 늙어가는 신세가 한탄스럽기만 하구나!
시커멓고 우툴두툴한 줄기에 야들야들한 분홍꽃이 앙징스럽게 무수히 달려 있는, 늙음과
젊음이 공존하는 매화도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이것을 인생과 결부시켜 보는 일도 전혀 뜻
없는 일은 아닐 것 같다.
328. 죽어 잊어야 하랴
매화
죽어 잊어야 하랴 살아 그려야 하랴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웨라
저 님아 한말씀만 하소라 사생결단 하리라
-- 지은이:매화 327. 참고
-- 감상
차라리 죽어서 깨끗이 잊어버려야 할지, 아니면 굳이 살아서 죽도록 그리워하기만 해야 될
것인가, 죽어서 잊어버리기도 어려운 일이요, 그렇다고 살아서 그리워하기만 한다는 것도
사람으로서 차마 할 일이 못된다 갈피를 못잡고 괴로워하는 이 내 마음을 나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
해결책은 단 하나, 님께서 똑 잘라서 한마디만 하소라(해주면 좋겠구나, 원하고 바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러면 내 태도도 결정된다 님으로 인하여 하는 고민이니 님의 한 말씀은
나에게 사생의 결단을 내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얼마나 매서운 말이며 겁주는 말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마음의 갈등,
이것이 사랑의 괴로움이라는 것인가 내뱉듯이 꾸밈없이 한 말이지만 사랑에 마음 졸이는
여인의 심정이 솔직하면서도 상당한 심각성을 띠고 독자의 가슴을 울린다
쉽사리 단념하지 못하는, 특히 일부종사라는 정조 관념에 젖어 있는 옛여인의 심정을 여기에서
역력히 읽을 수가 있다
다음의 시조 3수도 매화의 지음이라는 작품이다 비슷한 심정을 읊은 것이 분명하다
평생에 믿을 님을 그려 무슨 병 들손가
시시로 상사심은 지기하는 탓이로다
두어라 알뜰한 이 심정을 님이 어이...
야심 오경토록 잠 못 이뤄 전전할 제
궂은비 문령성(들려 오는 말방울 소리)이 상사로 단장이라
뉘라서 이 행색 그려다가 님의 앞에...
살뜰한 내 마음과 알뜰한 님의 정을
일시 상봉 그리워도 단장심회 어렵거든
하물며 몇몇 날을 이대도록....
329. 꿈에 뵈는 님이
명옥
꿈에 뵈는 님의 신의 없다 하건마는
탐탐히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보리
저 님아 꿈이라 말고 자주자주 뵈소서
-- 지은이:명옥:화성(수원) 기생
-- 말뜻
신의:믿음과 의리
탐탐히:자꾸자꾸 몹시
꿈이라 말고:꿈이라고 생각 말고
-- 감상
꿈에 뵈는 님은 믿음성이 없다고들 하지마는, 못 견디게 그리울 때에는 꿈이 아니면 어찌
만나볼 수가 있겠는가 님이시여! 꿈이라도 좋으니 자주 만나게만 해주십시오 꿈속에 그리는
님, 꿈속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아쉬운 님에 대한 애틋한 정감이 여성답게 잘 표현되어 있다.
330. 상공을 뵈온 후에
소백주
상공을 뵈온 후에 사사를 믿자오매
졸직한 마음에 병들까 염려러니
이리마 저리차 하시니 백년동포 하리이다
-- 지은이:소백주
광해군 때의 평양 기생 '해동가요' 주에 "광해군 때에 박엽이 평안도관찰사로 있을
때, 손과 더불어 장기를 두면서, 기생 소맥주에게 이 노래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 말뜻
상공:상국, 상신이라고도 하는데, 정승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장기의 상과 궁의 뜻을 담은
것
사사:일들 여러가지 일 장기의 사
믿자오매:'믿으므로'의 높임형이다
졸직:성품이 옹졸하고 고지식해서 융통성이 없다 장기의 졸
이리마 저리차:이렇게 하마, 저렇게 하자 장기의 마, 차
백년 동포:백년해로 평생을 부부로 같이 살다 장기의 포
-- 감상
대감을 한 번 뵈온 뒤부터 만사를 그저 믿을 따름이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셔서 옹졸하고 좁은 이 생각에 혹시나 대감의 사랑을 잃어버릴 것 같은 걱정으로 병이
될까 염려되었는데, 이렇게 하마, 저렇게 하자 자상한 말씀이 계시니 더 말할 것이 뭐
있겠나이까 그저 백년까지-평생토록 대감을 모시겠나이다 온몸, 온 정성 다 바치어
모시겠나이다
위와 같은 뜻인데, 여기에 장기의 말 이름이 다 들어 있다 상공은 상궁, 사는 사, 졸은 졸,
병은 병, '이라마...'의 마는 마, 차는 차, 백년동포의 포는 포이니, 음상사에서 오는 즉흥적인
중의법이기가 막히게 묘함을 어찌하랴 여류 작품에서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음을
생각하면, 그녀들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지켜 주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331. 당우를 어제 본듯
소춘풍
당우를 어제 본듯 한당송을 오늘 본듯
통고금 달사리하는 명철사를 어떻다고
저 설 데 역력히 모르는 무부를 어이 좇으리
-- 지은이:소춘풍
성종 때의 함흥 명기로, 재색 겸비의, 인생을 달관하고 자유분방하게 산 명기
업어가는 사람도 없었던 함경도 두메 산골의 박색 과부가 행운유수의 노승과의 하룻밤
사이의 사랑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출생부터 탈속적인 그녀는 총명이 과인하여, 다섯살부터
쌍룡사에서 불경을 배워,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무불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절에
불공 왔던 어느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영흥으로 나와 기생이 된 그녀는 천하 한량들의 풍류의
벗이 되어 이름을 떨쳤다 그 소문이 서울에까지 자자하여, 성종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선상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궁중 연석에만 참석하여 거경대식들과 풍류로 세월을 보냈으며,
이런 재치가 넘치는 노래들이 거침없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 말뜻
당우:도당씨와 유우시, 곧 요임금과 순임금, 여기서는 태평스럽던 요순시대를 말한다
한, 당, 송:중국의 한, 당, 송나라로, 학문이 크게 발달했던 시대
통고금 달사리:고금 일을 통달하고 사리에 밝음
명철사:총명하고 사리에 밝은 선비
역력히:뚜렷이 똑똑히
무부:무인 무사
-- 감상
학문과 풍류를 아울러 좋아하였던 성공 임금께서 문무 백관과 더불어 술잔치를 베풀고
소춘풍을 불러 술을 따르게 하였다 이때에 문관인 영상 앞에 술을 따르고 이 노래를
불렀다
태평하였던 요순 시대이며, 문물이 발달했던 한, 당, 송에 이르도록 모르는 일이 없는 똑똑한
선비님들을 마다하고, 제 설자리도 분간 못하는 무부를 따르겠느냐는 뜻이다 이는 무신을
얕본 수작이니, 문신들은 좋아라고 했겠지만, 무신들이 어찌 가만 있었겠는가 발끈한
무신들에게로 태연히 나아간 소춘풍은 이번에는 이런 노래를 불렀다
전언은 회지이라 내 말씀 허물 마오
문무일체인 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를 아니 좇고 어이리
그랬더니 무신들의 노여움도 봄눈 녹듯 풀리고, 다시 화락한 분위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제도 대국이요 초도 역대국이라
조그만 등국이 간어제초하였으니
두어라 이 다 좋으니 사제사초하리라
라는 노래를 읊어 결론을 지었다 제나라와 초나라(문,무신을 비유)는 다 큰 나라이고
등나라(자신을 비유)는 작은 나라이니, 제나 초를 다같이 즐거이 섬기겠다는 것이다 만당의
흥이 한층 고조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종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소춘풍에게 호피 등을
상으로 내렸다고 한다
한낱 기녀의 몸으로 감히 상감 앞에 나간 것만도 대견하고, 기라성 같은 문무백관을 떡
주무르듯 한 소춘풍의 재주와 솜씨도 놀랍지만, 당시의 화기애애했던 조정 풍경이 소춘풍
같은 여류 풍류를 낳을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마음이 흐뭇함을 느낀다.
332. 솔이 솔이라 하니
송이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만 여기는다
천심절벽에 낙락장송 내 긔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 볼 줄 이시랴
-- 지은이:송이
강화 기생으로 박준한이라는 해주 선비를 사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말뜻
천심절벽:천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천야만야한 높은 절벽
내 긔로다:내가 곧 그것이로다
초동:땔나무하는 아이
접낫:작은 낫
-- 감상
지은이의 이름 '송이'와 솔을 연관시켜 재치있게 풍자하였다
'솔이, 솔이'라고 하니, 나를 무슨 솔로 아느냐 아무데나 나 있는 그런 흔적 예사 솔이
아니다 천길이나 되는 천야만야한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서 있는 낙락장송, 그것이 바로
내로다 저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의 길 아래에 있는 나무꾼 아이의 하찮은 낫쯤은 걸어 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내가 한낱 노류장화의 기생이지만, 아무개나 함부로 범접할 수 있는
그런 내가 아니다
옛날의 이름있는 기생들은 시와 글을 곧잘 지었고, 그림과 글씨를 익혔으며, 노래를 부르고
해서 우리 역사 위에 여류 문화의 꽃을 피웠다 또 그들은 곧잘 정절을 지켰고, 한 님을
죽도록 사랑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송이라는 기생도 어엿한 여류 문인다운 기개와 위엄을
이 시조에서 아낌없이 보여 주고 있다
그녀가 정을 준 박준한이라는 해주 선비를 진사 급제하고 돌아오는 길에 강화에서 다시
만나 하룻밤을 지냈는데, 그 밤이 너무나 짧아서,
닭아 우지마라 일 우노라 자랑 마라
반야 진관의 맹상군이 아니로다
오늘은 님 오신 날이니 아니 우는 어떠리
라고 읊었으며, 이별 후 소식이 없는 그를 생각하여,
남은 다 자는 밤에 내 어이 홀로 깨어
옥장 깊은 곳에 자는 님 생각는고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라고 읊었다.
333. 한양서 떠 온 나비
송춘대
한양에 떠 온 나비 백화총에 들었구나
은하월에 잠깐 쉬어 송대에 올라 앉아
이따금 매화춘색에 흥을 계워하노라
-- 지은이:송춘대:평남 맹산 기생이라고만 전하고 있다
-- 말뜻
백화총:온갖 꽃들이 무더기로 피어 있는 것
은하월:억지로 풀자면, 은하수에 뜬 달 기생의 이름일 것이다
송대:소나무 언덕 이것은 지은이 자신
매화춘색:매화가 핀 봄의 아름다움 '매화춘'은 역시 기생 이름일 것이다
-- 감상
먼 한양에서 날아온 나비(한양에서 온 한량)가 꽃밭에서(미녀들에 둘려싸여) 노는구나!
은하월, 송춘대, 매화춘... 번갈아 가면서 잘도 놀아 대는구나 웃음 파는 기녀의 몸으로,
이꽃 저꽃두루 찾아 다니면서 웃음 파는 기녀의 몸으로, 이꽃 저꽃 두루 찾아 다니면서
즐기는 님을 어찌 탓할 수 있으리요 더욱이 한 남자를 붙잡아 두고, 한눈 파는 것을
시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생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여자인지라 은하수 기우는 달밤을 독수공방하는
외로움이야 남다를 바가 있겠는가 이리 뒤치락 저리 뒤치락, 하면서도 하염없이 체념하여야
하는 이 신세... 그러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몇 날이던고 시정에 눈이 뜨일 수록
'다정도 병인 양하여', 시름은 한결 더 밀도가 높아질 것이다.
334. 철이 철이라커늘
진옥
철이 철이라커늘 섭철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일씨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 지은이:진옥
진옥은 본래 평안북도 강계의 기생인데, 때마침 그곳에 귀양살이 온 송강을 정성껏
섬기어 마침내 그의 소실이 되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가야금과 노래를 잘한 진옥은 송강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으며, 진옥으로 해서 송강의 귀양살이는 그리 괴롭지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나날이 즐겁기만 하였다 두 사람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한 수씩 읊었다 먼저
정철이 이렇게 읊었다
옥이 옥이라커늘 번옥만 여겼더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일씨 적실하다
내게 살송곳 있으니 뚫어 볼까 하노라
번옥은 인조의 가짜 옥이니 진옥이 대가 된다 살송곳은 남자의 성기를 은유하였다
이를 지체없이 받아서 화답한 노래가 이 시조라고 한다
-- 말뜻
섭철:불순물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 변변치 못한 쇠의 뜻
정철:섭철과 반대의 순수한 좋은 쇠 송강의 이름 정철을 빗댄 것
골풀무:쇠를 녹이는 불을 피우는 데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가 원뜻이지만 여기에서는,
남자를 녹여대는 여자의 그것을 은유한 것
-- 감상
"철이 철이"하기에 섭철쯤으로 생각했는데, 두고두고 섬기어 보니 진짜 철(정철)이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가 있으니, 그것으로 흐물흐물하게 녹여 버리겠다
송강이 '번옥인가 했더니 진옥이 분명하다 그러니, 내 살송곳으로 뚫어 보겠다'는 데 대하여,
진옥의 '섭철인 줄 알았더니 정철이 분명하니, 내 골풀무로 녹이겠다'는 구절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정면 대조로, 진옥의 기발하고 재치있는 재주를 짐작케 하는 재미있는 시조다.
335. 산촌에 밤이 드니
천금
산촌에 밤이 드니 먼데 개 짖어 온다
시비를 열고 보니 하늘이 차고 달이로다
저 개야 공산 잠든 달을 짖어 무엇하리요
-- 지은이:천금 생존 연대 및 신원 미상
-- 말뜻
짖어 온다:먼데서 짖는 소리가 들려 온다는 뜻인 듯하다 '짖어 운다'로 된 데도 있다
시비:사립문을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창문, 출입문'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잠든 달:고요한 달 쓸쓸한 달 외롭게 보이는 달
-- 감상
산마을에 밤이 찾아 오니, 먼데서 개 짖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아스라이 들려 온다 무슨 일이
있는가, 그 누가 찾아오지나 않는가 하고 창문을 열고 보니, 싸늘한 하늘에 휘영청 밝은 달만
둥실 떠 있구나 하도 호젓한 산골이라 달을 보고 개가 짖는구나 그것도 텅 빈 산에 쓸쓸히
잠들어 있는 외로운 달을 보고서 말이다 개도 사람이 그리운가 보다
숨막힐 듯한 고요 속에 승화된 외로움이 있다 깊이 규방에서의 님 그리는 정, 사람 기다리는
한, 이런 시상이 밑바탕에 깔려 있음이 분명하다.
336. 어이 얼어 자리
한우
어이 얼어 자리 무스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질까 하노라
-- 지은이: 한우(연대미상)
-- 말뜻
얼어 자리:얼어서 자랴? 추위에 혼자 얼어서 잘 필요가 있겠는가
원앙침:원앙을 수놓은 베개 원앙은 암수의 의가 기막히게 좋다고 한다 그래서 신혼부부의
베개는 반드시 원앙침이었다
비취금:비취새를 수놓은 이불이라고 하는 이도 있으나, 비취색의 아름다운 이불로 보는 것이
좋겠다
찬비 맞았으니:'한우를 만났으니'의 뜻이 담겨 있는 중의적인 표현이다
-- 감상
당대 제일의 풍류 한량 임 제가 벼슬도 마다하고 천하를 편력하다가 재색 겸비의 한우를
만났다 한 수 떠보았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잘까 하노라
'한우가'라는 시조다 이 한우가에 화답한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얼어서 자신다니 거 어찌된 말씀이오? 원앙침, 비취금, 이 좋은 잠자리를 어떡하고 얼어서
잔단 말입니까? 오늘은 찬비를 맞아서 몸이 얼었으니, 따뜻한 이불 안에서 따뜻한 몸을 녹여
보시오 이 한우가 따뜻이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은근한 정담인가
임백호는 천하를 두루 돌아다녀, 그의 발자취가 안 미친 데가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평양
미인이 가장 마음을 끌었던 모양이다 '패강가'라는 한시 한 수가 그것을 말해 준다
평양의 아가씨들 봄놀이를 가는데
강가의 수양버들이 애를 끊네
하늘하늘 실버들로 비단을 짠다면
그대 위에 옷이나 한 벌 지어 줄 것을
(패강아여답춘양 강상수양정단장 무한병계약가직 위군재작무의상).
337. 묏버들 가려 꺾어
홍낭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손대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지은이:홍낭
조선조 선조 때의 함경도 종성 기생 당시 문인이며 시인이요, 서화에도 능하고 퉁소를
잘 불었다는 풍류 남아 고죽 최경장과 정이 깊었다 고죽이 종성부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종성에서 밤낮으로 이레 동안을 달려 서울까지 찾아온 일이 말썽이
되어, 고죽이 벼슬을 내놓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으나, 고죽은 방어사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상경 도중에 죽었다
-- 말뜻
묏버들:멧버들 산버들
가려 꺾어:가리어 꺾어 골라 꺾어서
님의손대:님에게 '-손대'는 -에게
새잎 곧:새잎만 '-곧'은 뜻을 강조하는 토씨
날인가도:나인가도 나인 듯이 나인 줄로
-- 감상
멧버들을 싱싱하고 좋은 것으로 골라 꺾어서 그리운 님께 보내 드립니다 주무시는 창 밖에
고이고이 심어 두시고 늘 보소서 그리고 그 버들가지에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들랑, 그것이
나인 줄로 생각하시고 날 본 듯이 반겨 보아 주소서
여인다운 애정의 표시다 고죽이 경성을 떠나 서울로 올라오게 되자, 홍낭이 영흥까지
배웅하고 함관령에 이르렀을 때, 날은 저물고 궂은비마저 내리는 속에서, 그를 그리는 나머지
이 노래와 함께 버들가지를 보냈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애정의 표시 방법인가.
338. 울며 잡은 소매
홍장
울며 잡은 소매 떨치고 가지 마소
초원 장제에 해 다 져 저물었네
객창에 잔등 돋우고 새워 보면 알리라
-- 지은이:홍장
고려 말엽의 강릉 명기 강원감사였던 박신과의 애절한 사랑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일설에 이명한의 작이라고도 한다
-- 말뜻
초원 장제:아득히 먼 긴 둑 '초원장제'로 된 데도 있다
객창:나그네 방의 창문 나그네가 머문 집 여관방
잔등 돋우고:다 꺼져 가는 등잔불을 밝히고 등잔불은 심지를 돋우면 불이 더 밝아진다
-- 감상
제발 가지 말라고, 울면서 꼭 붙잡고 놓지 않는 옷소매를 매정하게도 뿌리치고 가지 마오
저 멀리 아득히 보이는, 풀이 우거진 긴 둑 위로 저녁해가 뉘엿뉘엿 넘어가 이제 해는 저물
대로 저물었습니다 쓸쓸한 여관방에서 깜박깜박 꺼져 가는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고 하룻밤을
새워 보면, 괜시리 뿌리치고 왔다는 생각이 들어, 이 내 심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별의
애틋한 심정이 객창에서 외로이 새워 보면 한결 더해질 것입니다
강릉 명기 홍장이 강원감사로 있다가 떠나가는 박신을 보내면서 읊은 노래라고 한다.
339. 한송정 달 밝은 밤에
홍장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대에 물결 잔 제
유신한 백구는 오라가락 하건마는
어떻다 우리의 왕손은 가고 아니 오는고
-- 지은이:홍장 338. 참고
-- 말뜻
한송정;강릉 경포 호숫가에 있는 누대로서 관동 팔경의 하나인데, 이곳에서의 달구경은
일품이다
물결 잔 제:물결이 잔잔할 적에
유신한:신의가 있는 갈매기는 사람과 달라 거짓을 모른다
어떻다:시조 종장 첫머리에 잘 쓰이는 감탄사로서, 여기에서는 '어째서'의 뜻이다
왕손:임금의 후손 귀공자의 뜻으로도 쓰인다 '왕손은 가고 아니 온다'는 옛한시의
"왕손귀불귀"를 인용하여 쓴 말이다
-- 감상
한송정에 달이 밝은 밤에 경포대에 올라 보니, 경포의 물결이 잔잔하기도 하구나 신의가
있는 갈매기는 오늘도 변함없이 오락가락 날고 있건만-날아갔다가도 다시 날아오기도 하건만,
기다리는 우리의 왕손은 어이하여 한번 가고 다시 올 줄을 모르는고?
시조에서의 왕손은 아마도 박신일 것이나, 왜냐하면 강릉부사가 경포의 뱃놀이에서 홍장의
애인 박신을 골리려고, 홍장을 선녀로 꾸며 다른 배에 태우고는, 박신에게 홍장이 그대를
그리다가 죽어서 선녀가 되어 오늘밤 찾아왔다고 말하자, 박신은 홍장을 미친듯이 찾았으므로,
결국 그 마음이 진정임을 알고 살아있는 홍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 시조와
연관이 된다
후에 송강 정철은 이 이야기를 '관동별곡'에서 '홍장고사'라고 읊었다.
340. 내 언제 무신하여
황진이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 지은이:황진이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 황진사의 서녀로 태어나, 절세의 미모와 뛰어난 재질로
시문에 능하여, 많은 한시와 구슬 같은 시조를 남기었다 또 노래와 서화에도 능하여 많은
문인, 석학들을 매혹시킨 개성 명기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한 수의 시조로 벽계수를
사로잡은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렇듯이 자유분방하면서도 다정다감한 그녀였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린다
-- 말뜻
월침 삼경:달이 져버린 한밤중으로 풀이할 수도 있으나, 깊어진 달밤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온 뜻이:찾아 온 생각이 찾아 온 기억이
-- 감상
제가 언제 님을 한번이라도 속인 일이 있기에, 신의가 없다 하십니까 달도 다 기운 한밤중에
님께서 찾아온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야 낸들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시조는 서화담의 노래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오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63)
에 화답한 것이라고 한다 비록 스승과 제자의 사이지만 이성으로서의 애정을 은근히 느끼게
된 것은 진이나 화담이나 다름이 없었으리라 그래서 이런 노래들이 오고간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것을 순수한 애정으로 승화시킨 데에 화담의 고매한 덕성과 진이의 반짝이는 총명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이다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하는 화담의 은근한 연정을
넌지시 받아서,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인데, 그것을 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구절은
체념하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더욱 간절한 애정을 담고 있다.
341. 동짓달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지은이:황진이 340. 참고
-- 말뜻
한 허리:큰 허리 긴 허리 또는 허리의 한가운데
춘풍 이불:봄바람처럼 따스하고 향긋한 이불
서리서리:긴 물건을 잘 서리어 놓는 모양
어론 님:어른 님 님을 높여서 하는 말 또 '얼으온 님'으로 보아 꽁꽁 얼은 몸의 님,
이리하여 '정든 님'으로 보는 것도 좋다 '동짓달'과 잘 어울린다
-- 감상
1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달 기나긴 밤의 그 긴 허리를 잘라 내어, 봄바람처럼 따스한
이불 속에 잘 서리어 넣어 두었다가 정든 님께서 오신 날 밤에 그것을 굽이굽이 펴서 짧은
봄 밤을 길게 지내 보리라
당대의 명창 이사종과 정열을 불태우던 무렵의 작품이다 그야말로 상냥한 여인의 섬세한
마음씨가 여지없이 살아 숨쉬는, 예술적 향기가 그윽한 주옥 같은 노래다 그의 대표작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한 허리를 베어 내어"를 "한 허리를 들어 내어"로 한 데도 있는데, 운율이나 이해면에서는
그것이 더 좋아서 그렇게 부르는 이도 많다.
342. 산은 옛산이로되
황진이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르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 지은이:황진이 340. 참고
-- 말뜻
주야에:밤낮으로
인걸:뛰어난 인물
오노매라:오는구나!
-- 감상
산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는 그 산이지만, 물은 옛날의 그 물이 아니로다 그렇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흘러만 가니 옛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훌륭한 인물도 저 물과 같아서 한번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를 않는구나!
황진이 자신의 주변 인물, 또는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 만한 훌륭한 인물을 생각해도
그만이다 인생이란 역시 덧없는 것임을 느끼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변하지 않는
산과 변하는 인사를 대비시켰으나, 그러나 실상 큰 눈으로 보면 산도 또한 변하는 것,
우주만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제행무상이니 말이다.
343. 어져 내 일이여
황진이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지은이:황진이 340. 참고
-- 말뜻
어져:'아!' 감탄사
내 일이야:나의 하는 일이여!
그릴 줄:그리워 할 줄
이시라 하더면:있으라고 붙들었더라면
-- 감상
아, 내가 한 짓을 좀 보아라 이게 무슨 꼴이람 막상 보내 놓고 나면 이렇게 더욱 그리워질
줄을 미처 몰랐단 말이냐 제발 나를 버리고 가지 말고, 있으라고 만류하였던들 이렇게 뿌리치고
가버리지는 않았을 것을... 하필, 말리지 못하고 보내 놓고 나서 더욱 그리워하는 이 심정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구나
당혹해서 마음에도 없는 엉뚱한 행동을 하기가 일쑤인 것이 사랑의 생리임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불꽃은 이성을 녹여 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에, 이런
계산 착오가 흔히 생기는 법이다 그리하여 식은 뒤에 '후회'라는 것을 곧잘 하게 된다 이성이
녹아 버리는 일이 없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제맛이 날 수가 없는 사랑이다 황진이는 역시
사랑다운 사랑을 할 수 있었던 그런 여인이었던가 보다
이 시조는 참 멋있는 작품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341)'에 못지 않은 시적 향기가 풍기는
작품이다 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자재롭게 구사한 솜씨 또한 그냥 보아 넘겨서는 안될 것
같다 내용적으로 연모와 회한의 정도 지극하거니와 표현된 형식 또한 일품이라 하겠다
대원로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님은 "이 한 수의 시조가 나의 스승"이라고 하였다 이 시조가
하도 좋아서 가람이 시조 공부를 시작하였다는 그런 시조다
황진이를 죽도록 짝사랑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가는 이웃떠거머리 총각 홍윤보의 영구가
진이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는데, 진이의 속적삼을 내다가 덮어 주었더니 비로소
떠났다고 한다 여기에서 노류장화의 신세에 회한을 느끼고, 순진한 총각의 목숨을 건 진실로
사랑에 감동되어 이 시조를 지었다는 말도 있으나, 이 시조를 감상하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는
못한다.
344. 청산리 벽계수야
황진이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지은이:황진이 340. 참고
-- 말뜻
청산리:푸른 산속
벽계수:푸른 시냇물 이것은 종친 벽계수를 빗댄 말이다
수이:쉬 쉽게 빨리
일도창해:한번 넓은 바다에 이름
명월:밝은 달인데, 황진이의 예명이기도 하다 '벽계수'와 아울러 이른바 중의법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공산:쓸쓸한 산에 가득 차 있다
-- 감상
푸른 산속을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아, 쉽게 빨리 흘러감을 자랑하지 말아라 일단 바다까지
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를 못한다 때마침 밝은 달이 공산에 가득 비치어 있으니, 쉬어서
달 구경도 하면서 천천히 어떠하랴?
당시 종친의 한 사람인 벽계수라는 이가 하도 근엄하여 딴 여자를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높았다 마침 그가 개성에 와서 만월대를 산책할 때에 황진이가 이것을 알고 일부러
따라가서 이 노래를 건넸더니, 벽계수는 그의 서재와 미모에 끌려 하룻밤의 시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 비유는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벽계수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345. 청산은 내 뜻이요
황진이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 지은이:황진이 340. 참고
-- 감상
청산과 녹수, 변함없는 푸른 산과 자꾸 흘러가서 한때도 머무르지 않는 물, 변함없는 내 뜻과
변덕스러운 님의 정을 이것들에 비유한 착상이 평범하면서도 신선미가 있어서 좋다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졸졸 소리를 내어 울면서 흘러간다
가만히 청산을 바라보고 녹수를 굽어보노라면, 평범한 인간도 철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
자연을 자연으로 볼 줄을 아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세계를 넓히고, 깊힐 수 있으며, 그것은
인생을, 세계를,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우주를 볼 수 있는 심안이 열린 사람은 인생이 창해일속임을 알게 되어, 진지 겸허한 인생관의
소유자가 된다고 하였다
황진이의 시조를 읽고 있으면, 이런 생각까지 떠오르게 되니 웬일인지 모를 일이다 과연
그녀는, 불세출의 여류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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