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과 촛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누가복음 11:34~36)
몸소 길이 되신 예수, 그 예수님의 길이 보이는가. 당신의 눈은 성하다. 그러나 시기, 질투, 탐욕이 가득한가. 그렇다면 당신의 눈은 성하지 못하다. 위 본문의 앞부분에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위 본문 뒷부분에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니 재물의 노예가 되지말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고 했다. 이것이 새롭게 살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가장 맛없는 감은 무슨 감일까? 영감? 아니다. 절망감이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감은 무슨 감일까? 그건 바로 기대감이다. 환경과 상황이 아무리 열악할 지라도 스스로 기대감을 지니고 있을 때는 냉혹한 현실에 주눅 들지 않는다. 엄혹한 현실에 길들여지는 마음, 절망감이 당면한 문제보다 더 큰 문제점이다. 삽질만 하면 풍요롭고 안정될 것 같은 곳에서 재물에 마음이 붙잡혀 살기를 인정하고 허용하는 것은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물이 가장 큰 힘이라고 믿는 절망감에서 해방될 때,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천안살림교회 최형묵 목사님은 대학시절에 독재 정권과 싸우면서 숨가쁘게 살았다. 온 세상을 금방 뒤엎을 것처럼! 그 즈음 세계 기독청년들이 대회를 열었는데 북구 핀란드 학생이 촛불을 들고 나온 것을 보고도 깊이 공감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신다. 삶의 무의미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어서 촛불을 밝혔다는 말을, 이제야 공감하게 되었다고. 한국 대학생들의 현실이 지금 그렇다. 기회의 출구 자체를 차단당하는 현실! 어디 청년들 뿐인가. 많은 국민들이 절망감에 시달리며 요절하거나 자살하는 작금을 볼 때,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러나 절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절망만 보인다. 절망에 무릎 꿇게 된다. 무학대사와 이성계가 이런 대화를 했다고 한다. 태조는 무학대사가 오늘따라 돼지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무학대사는 태조가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응수 했단다. 또한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이 보이는 법이라고 말했단다. 촛불을 밝히는 기대감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보이기 때문이다. 눈이 성한 사람은 지금도 춧불을 밝혀 기대감을 나타낸다.
하느님을 섬기는 진정한 태도는 하느님이 부여해주신 생명의 결을 따라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사회의 희망이다. 바리새파들이 예수님에게 기적을 요구하자, 예수님은 기적을 바라는 그들을 악한 세대라고 부르며 '요나의 기적' 외에 더 이상의 기적은 없다고 질책하셨다. 요나의 기적이란 거듭남의 기적이다. 새롭게 살아가는 길이다. 몸의 등불, 성한 눈을 밝혀 예수님이 몸소 내신 새 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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