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그리운 성거산 물매화
김난주
(한국상담매체학습연구소 연구원)
12월 초에 영화 ‘쌍화점’을 개봉했는데 1월 중순이 지나도록 찾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고려 말, 공민왕은 자주국방을 꾀하고 외래문화의 오랜 뿌리를 뽑아내려고 사대정신과 싸웠다. 친원세력과 원나라의 부적절한 만남이 충렬왕 때부터 팔십여 년 동안 고려의 자주 국력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이 영화가 은유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병법 책이 있는 서고에서 원나라 공주였던 왕후와 건룡위의 수장이 연모에 빠져드는 장면은, 개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과 공동체의 이익이 어떻게 바꿔치기 되곤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마음이 걷기 시작한 지점 뒤로 성거산이 둥글게 품고 있는 천흥리가 보인다. 성거초등학교 앞에서 성거도서관 있는 쪽으로 우회전해서 좁은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작은 사과밭, 포도밭, 배밭이 천흥리 집과 집을 잇고 있다.
천안 북면, 성거읍, 입장면에 걸쳐 뻗어있는 성거산에서 신령한 힘을 발견하고, 고려 태조는 국운을 위해 제사를 드렸다. 원의 충성스러운 사위 왕 시절에 이르면, 남북조시대 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왕건의 발자취는 무색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11km 정도 들어가면 마을 한가운데 60cm 간격으로 동쪽 서쪽에서 마주 보고 서있는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있다. 고려 목종은 중국 요나라가 침입했을 때(1002년) 천흥사를 세우고 불상을 모셔서 적을 내쫓으려고 했다. 그 천흥사 터 대부분은 1959년에 저수지와 수로에 자리를 내 주어야 했고,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에워싸고 마을이 들어섰다.
천흥저수지에서 3km 정도 오르면 만일사와 만일고개가 있다. 저수지 갓길을 따라가면 몇몇 가든을 지나 성거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제법 깊숙이 자리 잡은 저수지 물가엔 친구나 가족과 낚시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많다. 어느 때에는 인동초가 길가에 제법 길게 군락을 이루고 나와 앉아 피운 금은화를 만날 수 있고, 어느 때에는 안개가 촉촉해서 한결 새하얘 보이는 조팝나무 꽃을 만날 수도 있다. 또 어느 때에는 연한 분홍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어 볼우물처럼 귀엽기 그지없는 고마리 꽃도 만난다. 산길 양옆에 핀 나무꽃과 풀꽃에게 하나하나 인사를 나누고 새살을 떨다보면 어느새 만일사에 이른다.
만일사(晩日寺) 법당 앞에 있는 탑은 고려 전기에 세워졌다. 암반지대석에 화강암으로 오층을 올려놓은 것을 1970년에 법당을 보수하면서 마애불 앞으로 옮겼는데, 실수를 해서 1층 몸돌을 거꾸로 옮겨놓았다. 꼭대기 머리장식은 언제 무엇 때문에 없어졌는지, 네모난 받침돌만 있다. 만일사 관음전 뒤편 축대 위에는 작은 자연동굴이 있다. 동굴 속 암벽에 조각된 불상이 앉아있는데 미완성인 채다. 머리는 직사각형이고 양쪽 귀가 길게 늘어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부처님 얼굴은 시멘트로 되어있다. 만일사 비구니께서 부정 타지 않게 돌보는 것이 또 있는데 우물이다. 염불로 철저하게 위생관리 한 용한 물이라, 목을 축이는 것까지만 허락해 주신다. 만일사까지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특권인 셈이다.
백제시대에는 성에 양 날개가 달린 듯 익성까지 축조했기 때문에 성거산성은 삼국시대 때 직산 위례산성의 익성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성스러운 산꼭대기가 군사통신기지가 되면서 성거산성(문화재자료 263호)은 파손되었고, 이 일대는 난시청 지역이 되어 유선방송 힘을 빌어야 TV 시청이 가능하다. 천 년 세월이 외세침략으로 얼룩졌던 탓일까. 이렇듯 성거산에는 없어진 것도 많고 곳곳마다 상처다.
성거산 계곡에 큰물이 나서 나무와 풀과 돌까지 상처를 얻을 때가 있다. 십여 년 전 어느 해에는 상류에서부터 큰 돌들과 조개껍데기 조각이 섞인 모래가 물에 휩쓸려내려와서 마당바위샘까지 덮친 후 저수지로 흘러내렸다. 가족들이 산책을 하러 올 때나 등산을 할 때, 샘물을 떠가는 사람들이 좀 많았던가. 마당바위샘물 긷는 데까지만 오가던 사람들은 목표지점을 잃어버린 상실감 때문에 오래 섭섭했을 것이다. 신령한 힘이 고인 물을 마시지 못하는 마음은 시름시름 앓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큰물이 나거나 우기가 길면, 시름을 달래주는 친구들이 여름 끝에 찾아온다. 바로 물매화다. 작년 9월에도 물매화가 만개했었나보다. 키 작은 물매화가 가느다란 쇠뜨기와 어우러져 핀 것처럼, 풍요롭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야생초들의 어우러짐이야말로 평화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2009년 1월, 시린 한겨울. 밤낮으로 등산 동호회원들이 시산제를 올리러 성거산을 찾고 있다. 산을 닮은 사람들이 정겨운 사회의 평화를 기원하며 술 한 잔 올리는 뜻이 고맙다. 성거산 신령한 힘도 얻어서 하나 된 나라를 세웠던 태조왕건과, 외세가 간섭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공민왕의 뜻을 마음 가운데 심어본다. 시절이 너무 추워서인지, 이 한겨울에 물매화가 그립다. 이번 주말에는 가족들의 따뜻한 손을 잡고 성거산을 오르며, 야생초 씨앗들이 준비하는 계절을 보고 오리라.
천안아산좋은뉴스 2009. 1. 20
물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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