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와 탱자 잎
김난주
광주 시민의 피가 아직 마르지 못한 지금, 탱자 꽃이 하얗게 핀 오월이다. 5.18 부상자들과 유족들이 겪으며 살았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는, 그 때의 피가 마를 새 없었다는 증거다. 사회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서 간첩 혹은 불순분자로 내몰리거나 전과자로 낙인 찍혀 산 삼십 년. 따돌림을 당한 아픔이 극심해진다고 하는 오월이라, 가시와 껍데기를 뚫고 나와 웃음 짓고 있을 탱자 꽃을 보러 천안향교를 찾았다. 후삼국 통일의 병참기지로서 천안을 낳고 보살폈다고 할 수 있는 왕자산 자락에 범나비를 먹여 살리는 탱자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천안의 진산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태조산인데,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를 보면 王字山이라고 되어있다. 그 왕자산 남서쪽 유량동 190-1번지에 천안향교가 있다. 향교 담 옆에 탱자나무(도나무 110호)가 있는데 1982년에 520살이었으니 지금은 550살이 되어간다. 둘레가 1.3m고 키가 7.5m라서 휘휘 늘어진 가지가 갈라져 내리지 않도록 여러 개의 쇠막대기로 받쳐 놓았다. 교육관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사방에 향기를 풀어주면서 참 가르침의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강화군 갑곶리에 있는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8호)와 사기리에 있는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는 천안 나무보다 동생인 듯하다. 강화도에 처음 탱자나무를 심게 된 이유는 고려와 조선을 침략한 몽고군이 행궁 성벽 밑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죄수 유배지에 탱자를 둘러 심었다고 한다. 담장은 어찌어찌 뛰어넘을 수 있지만 이 울타리를 뛰어넘기는 워낙 어려워서, 그러려고 했다가는 적군이든 죄수든 단단한 가시에 옷이 찢기고 살마저 찔려버린다.
80년 5월 광주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민중민주의 대변인으로 다시 태어난 셈인데, 대부분 사회가 쳐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그 가시가 몸과 맘에 박힌 채 고립되어 살았다. 그 때의 기억이 같은 강도로 되풀이되는 것을 겪었고 불면증과 중독증에 빠졌으며 회피, 피해의식, 불신, 무력감 등의 정서적 불안과 강박을 겪으며 살았다. 탱자 가시에 찢기고 찔린 듯! 인간다움이라는 품위를 포기하기엔 너무 젊은 때 무력감의 오랏줄에 묶여 잠 한 번 편히 못 자고 칼처럼 예민하게 선 채, 가족과 이웃들에게 날 세우며 산 사람들.
유자나 귤보다 맛없는 과실이라고 하지만, 호랑나비가 가장 맛나게 먹는 주식이 탱자나무 잎이다. 어미가 잎 뒤에 알을 낳으면 그 잎을 먹고 산단다. 우리가 이웃에 살고 있는 5.18 부상자와 유가족들을 품어서 범나비 알로 낳으면, 이들이 5.18 트라우마-PTSD-를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 정도는 못되더라도 탱자나무 울타리에서 먹고사는 것만이라도 해결하면 그 남은 삶이 늦게나마 편할 텐데.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반민중 비민주와 타협할 정도로 생존을 위협받지 않아서 탱자 꽃향기 깃든 들바람에 날아올라 어깨춤 추는 그들을 후손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천안아산좋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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