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 담긴 고백
단국대학교 평생교육원 아동글쓰기지도자반 김난주
여덟 살부터 마흔 한 살 까지 들고 다닌 가방과 그 안의 책들이 어렴풋하다. 아쉬움으로 보냈던 이십여 년의 삶에 가만히 창을 닫고 다가오는 삶의 창을 천천히 열면서, 새 가방에 꼭 담고 싶은 것만을 지난날의 추억에서 꺼내보고 싶다.
국민 학교 다닐 적 내 가방엔 정말 재밌는 책이 두 권 있었다. 1학년은 방과 후 교실‘전래동화’반을 운영했는데, 초록색 표지의 ‘이솝우화’와 ‘전래동화’를 읽는 반이었다. 초롱불을 켜던 시절이라 캄캄한 밤에는 밖에서 놀 수 없었던 몇 년간, 나는 두 동생에게 이 두 권의 책 이야기를 하나하나씩 들려주었다. 나중엔 내용을 바꾸거나 새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재미도 맛 볼 수 있었다. 포항의 바닷가 오두막집에서 살던 유년의 추억은, 그렇게 자유와 이야기 재미가 넘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허가 땅에서 쫓겨 서울 달동네로 이사를 해야 했다. 곧 중학시절을 맞은 나는 문고판 김소월 시집 한 권을 사면서도 어머니의 꺼질 듯 한 한숨소리를 들어야 했다. 학력고사를 앞 둔 고 3 때도 해법수학 한 권을 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반장이었던 내 짝꿍이 자기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해법수학 한 권을 사주며 친구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던 그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학창 시절의 그 커다랗고 무겁기만 했던 가방엔, 교과서와 공책 외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틈만 나면 도서관에서 맛있는 책을 공짜로 읽는 재미와, 좁은 방에서 가족들 몰래 비밀일기를 쓰는 재미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어린왕자’, ‘오만과 편견’, ‘수레바퀴 밑에서’'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등은 정말 맛있는 책이었다.
스무 살부터 내 가방엔 수첩과 스프링공책이 들어앉아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십 번 넣었다 뺐다 해서 너덜너덜해지면 치열한 일년이 또 지나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곤 했다. 어디에서 누굴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메모하고, 책 읽고 맘에 드는 문장을 골라 쓰거나 연상되는 생각과 느낌을 모두 낙서처럼 남겼다. 얇디얇은 ‘나와 너’를 읽고 순식간에 넓고 깊어지는 느낌에 놀랐던 흔적도 남아있다.
스프링공책에 그림과 글로 남겨진 것을 친구들과 군대 간 후배들에게 보내면서 많은 이들과 두터운 관계도 맺을 수 있었다. 지금도 책꽂이에 있는 연 2권의 수첩들이 묵은 맛을 담은 채 소리 없이 속삭이고 있다. 그러나 삶의 고비마다 열어보곤 하며 몇 차례 훑고 나니, 타인의 느낌과 생각을 먹고 담기만 하는 습관, 지난 세월의 말에만 연연하는 습관이 도무지 소용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80년대 말에는 퇴직금을 몽땅 털어 워드프로세서를 샀다. 내 가방엔 자주 워드프로세서와 종이, 책, 수첩이 들어 있었다. 돈 버는 일과 무관한 일에 참여하면서 내 돈은 자주 그렇게 흘러나가기 일쑤였고, 결혼 후에도 눈 딱 감고 노트북까지 샀다.
커다란 가방에 두꺼운 워드프로세서를 넣고 걸어 다니거나 전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던 때에 비하면, 티코와 마티즈에 싣고 다니는 가방안의 얇은 노트북은, 국민 학교 때 읽었던 것만큼이나 재미난 그림과 글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취향의 노래와 감동 깊었던 영화도 들어 있다.
내 가방과 책이 나의 용량이나 상태에 맞게 적절하게 변해 온 것이 정말 고맙다. 오늘도 내 가방에 후배들 삶의 의미를 찾을만한 숱한 고백들을 담고 길을 나선다.
2006. 11. 19. 김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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