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생활의 멋 (2)
161. 샛별 지자 종다리 떴다: 이재 171
162. 서선에 일모하니: 이명한 173
163. 세사는 금산척이요 176
164. 술먹고 취한 후에 178
165. 술 먹지 마자 하고 179
166. 술아 너는 어이하여: 김천택 182
167. 술을 취케 먹고: 정태화 183
168. 십년을 경영하여 185
169. 아해야 도롱삿갓 차려라: 조존성 187
170. 앞내에 고기 낚고 190
171. 엊그제 빚은 술이 192
172. 오늘도 좋은 날이요 194
173. 오늘은 천렵하고: 김유기 195
174. 오동에 듣는 빗발: 김상용 198
175. 오려 고래 숙고: 이현보 200
176. 용같이 한 걷는 말께 202
177. 이러하나 저러하나 304
178. 이화에 월백하고: 이조년 205
179. 자제 집에 술익거든: 김육 208
180. 재너머 성궐롱 집에: 정철 210
181. 전원에 봄이 오니: 성운 212
182. 짚방석 내지 마라: 한호 215
183. 창 밖에 국화 심어 218
184. 청류벽에 배를 매고: 윤유 220
185. 청명시절 우분분할 제 223
186. 초당의 밝은 달이: 곽기수 226
187. 추강에 밤이 드니 229
188. 태평 천지간에: 양응정 231
189. 평생에 일이 없어: 낭원군 233
190. 한 잔 먹세 그려: 정철 235
191. 헌 삿갓 자른 되롱: 조현명 239
192. 헛글고 시끈 문서: 김광욱 241
193. 홍진을 다 떨치고: 김성기 243
제4장 생활의 멋 (2)
161. 샛별 지자 종다리 떴다
이재
샛별 지자 종다리 떴다 호미 메고 사립 나니
긴 수풀 찬 이슬에 베잠방이 다 젖는다
아이야 시절이 좋을 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
-- 지은이: 이재(종실 서천군 광의 손자)
조선조 영조 때 서윤을 지냈으며, 글씨를 잘 썼다 일설에는 이명한의 작이라고도 한다
-- 말뜻
샛별: 새벽 동틀 무렵에 동쪽 하늘에 가장 크게 반짝이는 별 샐별, 금성, 명성, 효성,
계명성 등 여러 이름이 있다
사립: 사립문 시비
베잠방이: 베로 지은 짧은 홑바지
좋을손;좋을 것 같으면
-- 감상
동쪽 하늘의 샛별이 지자 부지런한 종달새가 벌써 하늘 높이 떠서 지저귀는구나! 이른 새벽,
밭에 나가 김을 매려고 호미를 들고 사립문을 나서니 길가 풀숲에 맺혀 있는 찬이슬에
베잠방이가 함빡 젖는구나! 아침 이슬이 많이 내리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하는데, 풍년이 들어
시절이 이렇게도 좋은데, 베잠방이쯤 젖는다고 무슨 상관이냐?
농촌 생활의 즐거움이 생동한다 명랑,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주옥 같은 가작이다 특히
종장의 감칠맛 나는 구절은 그 얼마나 좋은가?
162. 서산에 일모하니
이명한
서선에 일모하니 천지에 가이 없다
이화에 월백하니 님생각이 세로웨라
두견아 너는 누를 그려 빔새도록 우나니
-- 지은이: 이명한 48. 참고
-- 말뜻
일모하니: 해가 저무니
가이 없다: 끝이 없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안 보인다는 뜻
이화에 월백하니: 배꽃이 하얗게 피어 있는데, 달이 휘영청 밝으니, '이화'와 '월백'은 옛시에
많이 쓰인 소재인데, 사실 이것들은 서로 어울리어 만화경을 이룬다 요즘에 보는 것 같은
과수원이 키 작은 배나무가 아니라, 옛집 앞마당이나 뒤란에 우뚝 서 있던 수십 년 묵은
배나무에 배꽃이 만발하면 밤에도 온 동네가 환할 지경이다 달밤의 그것은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어서 사람을 꿈나라로 끌어 넣는다
새로웨라: '새로우에라'의 준말로 새롭도다 '__에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 감상
해가 서산을 넘으니 어디까지가 땅이요,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분간할 수가 없구나 앞뜰 큰
배나무에 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하늘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서 배꽃의
경관을 더욱 현란하게 해준다 이 광경, 이 환상적인 분위기는 사람이 마음을 낭만의 세계로
이끈다 님 생각이 나지 않고 배길손가 옛님의 생각이 새로워진다 두견이마저 지칠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울어대어 내 마음을 휘저어 놓는구나!
옛시조 중에서 가장 문학성을 높이 평가받는 이조년의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와 서로 맥이 통하는 시조이다 이 시조를 깊이 이해하는 데는 '이화 월백'의 경험(체험)이 선결 조건이 된다.
163. 세사는 금삼척이요
세사는 금삼척이요 생애는 주일배라
서정 강상월이 두렷이 밝았는데
동각에 설중매 다리고 완월장취 하리라
-- 말뜻
세사: 번거러운 세상일 세상살이
금삼척: 거문고 거문고의 길이가 석자쯤 된다
생애: 사람의 한평생
주일배: 술 한잔
서정: 서쪽에 있는 정자
강상월: 강 위에 뜬 달
동각: 동쪽에 있는 누각
설중매: 눈 속에 핀 매화꽃 기생 이름에 설중매가 많으니 그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완월성취: 달을 완상하면서 늘 술에 취함
-- 감상
달과 설중매를 벗삼아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한평생을 살아보세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겨레는 노래와 춤(가무)을 좋아하였다 노래와 춤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는 술이 없을 수 없다 그 풍조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가 보다
한문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지만, 시조의 리듬은 살아 움직인다 "서정 강상월"을 즐기면서,
동각에서 설중매를 데리고 완월장취하는 것이 '주일배의 생애'를 살아가는 보람이라고 하였다
옛선비들의 멋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164. 술먹고 취한 후에
술 먹고 취한 후에 얼음굼에 찬 숭늉과
새벽에 님 가려거든 고쳐 안고 잠든 맛과
세간이 이 두 재미는 남이 알까 하노라
-- 감상
주색을 좋아하는 어떤 한량의 넋두리가 너무도 솔직하구나 술 깰 무렵에 마시는 냉수 맛,
더구나 얼음 구멍에서 막 나온 듯한 찬 숭늉(아마도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자리끼일 것이다)의
맛은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리고 새벽녘에 일어나 가려는 고운님을 붙잡아 다시 안고 든
새벽잠 또한 남이 알까 두렵다 나 혼자서 살짝 즐기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비중은 뒤쪽에
더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65. 술 먹지 마자 하고
술 먹지 마자 하고 중한 맹세 하였더니
잔 잡고 굽어보니 맹세 둥둥 술에 떴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맹세풀이 하리라
-- 감상
안 마셔야 한다 술을 끊어야겠다 하면서 또 마시는 것이 술꾼의 생리이다 술을 끊겠다고
굳은 맹세를 하였지만, 마지 못해 잔을 잡고 보니 그 맹세가 잔에 둥둥 떠 있다 그래서 그 술을
마시면서 술을 안 마시겠다고 맹세풀이를 한다는 것이다 표현 기교이 기발함에 마음이 끌린다
같은 소재이 것으로 이런 것도 있다
술 먹지 마자 하니 술이라서 제 따른다
먹는 내가 왼가(그른가) 따르는 술이 왼가
잔 잡고 달더러 묻노니 뉘야 왼고 하노라(작자 미상)
태고 적부터 가무를 즐겼다는 우리 겨레는 술과의 만남이 도를 지나쳤던 것이 사실이다
외국 사람들이라면 차로 대신할 것도 우리 나라에서는 손님이라면 으레 '주안상'이다 게다가
'술은 권하는 맛에 마신다'는 이 과잉 친절의 주도 역시 문제가 있다 어른 앞에서 담배는
안되어도 술은 괜찮다 경우에 따라서는 담배보다 술이 해독이 더 크고 담배 탈선보다 술의
탈선이 더 심한데, 슬퍼서 한잔, 기뻐서 한잔, 취한 술을 깨려고 잠깐 마시는 또 한잔, 또
술을 끊으려고 기념으로 마시는 마지막 한잔... 그렇게 미련이 있고, 매력이 있는 술을 끊어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절도 있게 마시면 건강에도 좋다는 술을 끊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의
인생이 가엾다 알콜중독자(이것은 병자)가 아닌 바에야 과음, 폭음, 그것이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칠 지경에 이른다는 것은 이해 못할 일이 아닌가? 이런 전통, 관습 등등에 근본적인 병집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여튼 문제가 간단하지는 않은 것 같다 술에 관한 시조가 하도
많기에 한마디하여 두는 바이다.
166. 술아 너는 어이하여
술아 너는 어이하여 달고도 쓰돗더니
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즐겁고야
인간의 번우한 시름을 다 풀어볼까 하노라
-- 감상
달고도 쓴 모순의 술, 먹으면 취하고 취하면 즐거워지는 마술의 술, 그리하여 인간 세상의
번거롭고 괴로운 시름을 다 풀어 주는 고마운 술, 그래서 너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구나! 인간과
술, 이것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가.
167. 술을 취게 먹고
정태화
술을 취게 먹고 두렷이 앉았으니
억만 시름이 가노라 하직한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시름 전송 하리라
-- 지은이: 정태화(1602__1673)
자는 유춘, 호는 양파 인조 때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다 병자
호란 때에는 어가(임금이 타는 수레)를 호위하였으며, 소현세자를 모시고 청나라 심양에 갔었다
-- 감상
여러 다정한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 빙 둘어앉아서 술이 거나하게 취하여 담소하고 있노라니
모든 시름이 저절로 스르르 녹아 버리는구나! 이래서 술이 좋다는 것인가 보다 꾸밈없이
담담히, 내뱉듯이 써 놓은 것이 시조가 되었구나!
'가노라 하직하는 억만 시름을 전송하기' 위하여 술을 마신다는 착상도 기발하다 그러므로
이 시조는 그 내용보다는 표현형식에 묘미가 있다 하겠다 초장의 '두렷이'이 해석에 따라서
여럿이 마시느냐, 혼자서 마시느냐의 차이도 생길 법하다.
168. 십년을 경영하여
십년을 경영하여 초당 한간 지어내니
반간은 청풍이오 또 반간은 명월이라
청산은 들일 데 없으니 한데 두고 보리라
-- 말뜻
경영하여: 애써 일을 하여 집을 이룩하여
초당: 조그마한 초가 은자의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한데: 집 밖에 옥외에 '데'는 처격 조사 '에'가 생략된 형태임을 주의할 것
-- 감상
10년 동안을 애써 일하여 조그마한 초가 한 간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 살고 반 간은
명월이 들어 산다 그러다 보니 청산은 들여 놓을 데가 없어 밖에다 놓아 두고 바라보리라
"초당 한 간"으로 알 수 있는 청빈 속에서 자연(청풍, 명월, 청산)을 마음껏 즐기는 은자의
생활 풍경이다
10년은 짧지 않은 세월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다 그 10년을 경영하여 겨우 얻은
초가 한 간인데, 청풍과 명월이 반 간씩 차지하고 나니,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청산은 들일
데가 없어 밖에 두고 본다는 것이다 안빈 낙도의 멋을 잘도 그려내었다
다음은 같은 주제의 유사한 시조이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작자 미상).
169. 아해야 도롱삿갓 차려라
조존성
아해야 도롱삿갓 차려라 동간에 비 지거다
기나긴 낚대에 미늘 없는 낚시 매어
저 고기 놀라지 마라 내 흥겨워 하노라
-- 지은이: 조존성(1553__1627)
자는 수초, 호는 정곡, 용호 두계 성혼에게 배웠으며, 백사 이항복과 교분이 깊었다 한때
정철이 당이라 하여 파직된 일이 있으나, 예조좌랑, 강화부사를 거쳐 형조, 호조참판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 호조판서로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갔다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 말뜻
동간: 동쪽 시내
비 지거다: 비가 내리었다
미늘 없는 낚시: 이른바 '강태공이 곧은 낚시'라는 것과 비슷한 것 미늘은 낚시 끝 안쪽에
있는 거르러미처럼 되어 고기라 물면 빠지지 않게 된 작은 갈고리이다
-- 감상
아이야, 도롱이와 삿갓을 준비하여라 동쪽 시내에 비가막 내려서 물이 불었다 기다란
낚싯대에 미늘 없는 낚시를 매어 가지고 낚시줄 가련다 고기들아 너 낚으러 왔다고 놀라지 마라
너희를 낚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흥이 겨워서 하는 곧은 낚시이니 조금도 겁낼 것 없다
고기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와 노는 것이다 자연을 그대로 두고 즐기는 멋이다
이른바 '호아곡' 4수 중의 하나 모두 '아해야'로 시작된다 나머지 3수는 다음과 같다
아해야 구럭망태 거두어라 서산에 날 늦거다
밤 지낸 고사리 하마 아니 늙으리야
이 몸이 이 푸새 아니면 조석 어이 지내리
아해야 소 먹여내어 북곽에 새술 먹자
대취한 얼굴을 달빛에 실어 오니
어즈버 희황상인을 오늘 다시 보와라
아해야 죽조반 다오 남무에 일 많애라
서투른 따비를 눌과 마주 잡으려뇨
두어라 성세궁경도 역군은 이시니라.
170. 앞내에 고기 낚고
앞내에 고기 낚고 뒷뫼에 산채 캐어
아침밥 좋이 먹고 초당에 누웠으니
지어미 잠깨어 이르되 술맛 보라 하더라
-- 말뜻
산채: 산나물
좋이: 원래는 됴히 잘
초당: 집 원채 밖에, 짚이나 억새 따위로 지붕을 이은 조그마한 별채
지어미: 아내 마누라
-- 감상
앞 내에서 고기 낚고, 뒷매에서 산나물 캐어다가 아침밥을 맛있게 잘 먹고 초당에 편안히
누워 풋잠이 들었는데, 마누라가 잠을 깨우며 말하기를 "술맛 좀 보시오"하더라는 것이다
조촐하고 평화로운 전원 생활의 옛모습이 그립다 공해니, 오염이니, 자연식품이니 하고
야단스러운 오늘의 도시인의 생활, 그것을 발전상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서글픔이 잎선다
이 노래 속에는 인간과 자연과의 만남이 있고, 안분지곡의 철학이 있고, 부부 사이에 풍기는
구수한 정과 평화로운 가정의 행복감 같은 것이 담겨져 있어서, 우리 선인들의 여유있는 생활에
일말의 향수를 느끼게 해준다 오늘날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일축해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르나, 반드시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데에 우리네 마음의 갈등이
생긴다.
171. 엊그제 빚은 술이
엊그제 빚은 술이 익었느냐 설었느냐
앞내에 후린 고기 굽느냐 회치느냐 끓이느냐
어이냐 니큼 차려내어라 벗님 대접하리라
-- 감상
엊그제 빚은 술이 아마도 다 익었나 보다 앞 내에서 후릿그물로 잡은 고기를 안주감으로
싱싱하게 회를 치느냐, 지글지글 굽느냐, 보글보를 끓이느냐 얼른 술상 차려 내어라 찾아온
벗님과 한잔 주고받으면서 우정을 덥히리라
집에서 빚은 자가양조의 술, 먹걸리, 동동주, 인삼주, 과실주... 아마도 텁텁한 막걸리일
것이다 그것을 내 손으로 앞내에서 그물질로 후려 온 고기__붕어, 피래미, 메기, 가물치,
모래무지... 등, 그 어느 것이든 다 좋다 회를 쳐도 좋고, 굽거나 끓여도 물론 좋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자유자재로, 임기응변으로 안주를 만들어 모처럼 찾아온 벗을 이것으로
대접하겠다는 것이다 먼데서 찾아온 벗이라면 더욱 흥이 깊을 것이다 특히 "니큼"에서 더욱
설레이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172. 오늘도 좋은 날이요
오늘도 좋은 날이요 이곳도 좋은 곳이
좋은 날 좋은 곳에 좋은 사람 만나 이셔
좋은 술 좋은 안주에 좋이 놔이 좋에라
-- 감상
'좋다(좋은, 좋이, 좋에라)'를 자주 되풀이함으로써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하니
어떻다는, 이른바 육하원칙을 '좋다'는 말로 재미있게 표현한 데 독특한 재치가 있다 어쩌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 과히 부자연스럽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은 주지 않아서 이만하면 '좋다' 하겠다.
173. 오늘은 천렵하고
김유기
오늘은 천렵하고 내일은 산행가세
꽃달임 모레하고 강신으란 글피 하리
그글피 변사회할 제 각지호과 하시소
-- 지은이: 김유기(자세한 연대 미상)
자는 대재 숙종 때의 가인 그의 12수가 전한다 김천택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 말뜻
천렵: 내에 가서 고기 잡고 술 마시며 노는 물놀이
산행: 사냥의 원말
꽃달임: 화전놀이 진달래 따위의 꽃을 붙이고 부친 지짐(부꾸미)을 해먹으며 노는 놀이
강신: 신에게 제사를 지내어 신령을 맞이하는 일 강신제
변사회: 활쏘기 모임
각지호과: 제각기 술과 과일은 가지고 오는 것
-- 감상
오늘,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 이렇게 연거푸 닷새를 각각 다른 멋진 놀이를 하면서 날을
보내니 한량들 한가하기도 하구나 그러나 이들이 노인들이라면, 할 일이 없어 한가하기도
하구나 그러나 이들이 노인들이라면, 할 일이 없어 심심해 죽겠다는 이야기는 안 나올 것이다
다양한 취미 생활은 중노년층의 여가를 무료하게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중노년 이상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부지런히 생산적인 일에
힘써야 할 청년층이 이래서야 쓰겠는가 옛날 선비들은 사정이 오늘날과 약간 달랐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에 넣어야겠지만... 그렇지만 그것도 물론 생활의 한 단면이지, 평생을 이렇게 보낸다
면 평가는 또 달리해야 할 것이다 그저 그 시대의 가인이라는 사람들의 생활의 한 단면으로
가볍게 생각하며 될 것이다 그리고 '멋있게 놀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174. 오동에 듣는 빗발
김상용
오동에 듣는 빗발 무심히 듣건마는
내 시름 하니 잎잎이 수성이로다
이후야 잎 넓은 나무를 심을 줄이 이시랴
-- 감상
크고 둥그런 오동잎에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유난히도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마음속에
시름이 많은 이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애꿎은 그 오동잎을 원망해 보는 것이다 다시는
오동나무를 심지 않겠노라고...
뜰에 오동나무를 심어 놓으면 봉황이 날아와서 깃을 들인다는 전설이 있어서 옛큰집들에서는
거의 어김없이 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특히 '벽오동'을 많이 심었는데 지은이와 같은 사대부의
집에 오동나무가 없을 리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시조가 나올 만하지 않은가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일상적인 소재에서 느끼는 감흥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175. 오려 고개 숙고
이현보
오려 고개 숙고 열무우 살졌는데
낚시에 고기 물고 게는 어이 내리는고
아마도 농가의 맑은 맛이 이 좋은가 하노라
-- 지은이: 이현보 97. 참고
-- 말뜻
오려: 올벼 일찍 익은 벼
열무우: 어린 무우 열무김치가 일품이다 계절이 맛이 이것을 당할 것이 없다
-- 감상
덜 익은 오려가 탐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남새밭에 열무는 살이 쪄서 먹을 만하게 되었는데,
앞 내에서는 낚시에 고기가 물리고, 철 따라 게가 내리는구나 벼가 익어서 벼를 베게 될
무렵에는, 상류나 논물에 있던 참게가 물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이때의 게는 속이 차고
장도 많아 게장을 담가 먹으면 그 맛이야말로 일품이다
논밭에 황금물결 일렁이는 이 무렵의 농촌은, 먹지 않아도 저절로 배가 부르다.
176. 용같이 한 걷는 말께
용같이 한걷는 말께 자넘은 매를 받고
석양 산로로 개 다리고 들어가니
아마도 장부의 놀이는 이 좋은가 하노라
-- 감상
매사냥의 남성적인 멋과 재미를 읊은 노래다 하늘을 나는 용과도 같이 잘 달리는 말을 타고,
한자가 넘는 큰 보라매를 손등에 받쳐 들고,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을 무렵 날쌘
사냥개를 데리고 산길을 간다 대장부의 놀이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일까?
매, 말, 개, 모두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어느 충복이 이보다 낳을손가 이렇게 주인을 따르고,
주인과 한마음 한뜻이 되니 그 아니 좋은가 말 대신에 자동차로, 매 대신에 총으로, 개 대신에
몰이꾼을 사서 벌이는 현대판 사냥과는 퍽이나 대조적이다 변모하는 시대 감각이 읽는 이의
마음을 휘저어 놓을 것이다.
177. 이러하나 저러하나
이러하나 저러하나 이 초옥 편코 좋다
청풍은 오락가락 명월은 들락날락
이 중에 병없는 이 몸이 자락깨락 하리라
-- 감상
이렇궁 저렇궁 말들이 많고, 못난 사람이다, 무능한 선비다 하고 입방아들을 찧는다고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초가 삼간 오막살이가 편하고 홀가분해서 좋다 게다가 청풍은 제
마음대로 오락가락하고 명월도 제멋대로 이 초옥을 들락날락하는구나 이런 가운데 병 없는 내가
자고 싶으면 자고, 깨고 싶으면 깨고 하니 이 얼마나 좋으냐 옛사람의 나물먹고 물마시고...
식의 안빈낙도의 낙천적인 심경, 그것이 차라리 인간본연의 자세가 아닐지....
178. 이화에 월백하고
이조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지은이: 이조년(1262__1343)
자는 원조, 호는 매운당 고려 충렬왕 때에 갓 벼슬하여 비서랑으로 있을 때에 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간 일이 있으며, 충혜왕 때에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리에 밝았기 때문에 모함을 받은 일도 있었다
-- 말뜻
이화 월백: (달빛을 받고 있는) 배꽃
은한: 은하수
삼경: 한밤중 자정 때 하룻밤을 다섯경으로 나눈 중간 초경은 초저녁, 오경은 새벽녘이 된다
일지춘심: 배나무 가지에 어린, 봄철에 느끼는 감상적, 애상적인 애틋한 정서를 뜻하는 말이다
자규: 소쩍새의 한자 이름 소쩍새가 표준말이고 두견새, 접동새 외에 많은 한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옛시가에 자주 등장하는 새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다정다감한 성미도 병인 듯해서 병통이 되어서
-- 감상
배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거기에 휘영청 달이 밝으니 하얀 배꽃과 밝은 달이
서로서로 어울려 배꽃은 더욱 희고, 달빛은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더욱이 밤은 깊어
은하수가 기운 삼경이라, 온 천지가 쥐죽은 듯이 고요하여 신비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고요를 깨듯이 소쩍새가 구슬프게 울어대는구나! 배꽃 가지에 서려 있는 봄날이 애틋한 애상을
소쩍새 네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이렇듯 다정다감한 내 마음도 병인 듯하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이화의 청초와 순백, 월백의 환상과 낭만, 삼경 은한의 신비감, 자규의 처절과 애원, 이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빚어 내는 봄밤의 애상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수에
잠겨 전전반측, 잠 못 이루게 하는구나! 문학적 향기가 물씬 풍기는 명작이다.
179. 자네 집에 술익거든
김육
자네 집에 술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집에 꽃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덧 시름 잊을 일 의논코자 하노라
-- 지은이: 김육(1580__1658)
자는 백후, 호는 잠곡 조선조 선조__효종 때의 실학파의 선구자로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박학다식하여 해동명신록, 송도지, 감개록집 등 많은 저서가 있다
-- 감상
가까운 친구보다 더 좋은 벗은 없을 것이다 집에서 빚은 술이 익어도 서로 부르고, 제 철이
와서 꽃이 피어도 함께 구경하는 친구야말로 백년껏 시름 달랠 벗이 아니고
무엇이랴 "백년덧"의 '덧'은 어느덧의 '덧'이니 '동안'의 뜻이다 그것이 문맥상 어감상으로는
'백년껏'처럼 쓰인 것이다
술이 생기면 같이 마시고 싶은 친구, 꽃이 피면 함께 보고 싶은 벗, 궂은 일 좋은 일 다 서로
의논하고 도와주고 싶은 벗! 비록 관포지교는 못 되더라도, 좋은 벗을 가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좋은 벗은 젊었을 적에도 필요하지만, 나이가 들어 늙어 가면서 더욱 그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젊었을 때에는 얼마든지 새로 사귈 수가 있고 다시 사귈 여유도 있다 그러나
늙어서 새 벗을 얻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젊어서 사귄 좋은 벗을 끝까지 지키는 노력은 값진 인생길의 보람이 된다 '백년덧 시름 잊을
일 의논할' 벗은 놓치지를 말아야 하겠다.
180. 재너머 성궐롱 집에
정철
재너머 성궐롱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타고
아이야 네 궐롱 계시냐 정좌수 왔다 하여라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성궐롱: 성씨인 권농을 예전에는 음편상 그렇게들 불렀다 '권농'은 마을에서 농사를 지도하는
직책을 가진 사람 여기에서는 성혼을 가리킴
언치 놓아: '언치'는 말이나 소의 안장이나 길마 밑에 까는 털헝겊인데, 여기에서는 소 등에
얹어 놓고 타는 깔개를 이른다
지즐 타고: 눌러 타고 지질러 타고 흥에 겨워 힘주어 탔다는 뜻이다
정좌수: 정철 자신을 가리킨다 좌수는 한동네의 어른을 말한다
-- 감상
고개 너머에 있는 성권농 친구네 집에 술이 익었다는 말을 어제 듣고, 소를 타고 놀러 간다
하도 흥에 겨워서 외양간에 누워 있는 소를 발로 걷어차 일으킨다 미워서가 아니다 타는 것도
그냥 가만히 타는 것이 아니라 힘을 주어 질끈 눌러서 타는 것이다 이만하면 그 흥이 얼마나
도도한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지 않은가
그러는 동안에 어느덧 벌써, 성권농 집 대문에 와서 호통이다 소를 타자마자 곧 성권농 집에
나온다 시상과 표현이 이렇게도 잘 융합된 시, 특히 옛시조에서는 참으로 접하기 힘든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송강의 글 솜씨가 참으로 놀랍다.
181. 전원에 봄이 오니
성운
전원에 봄이 오니 이몸이 일이 하나
꽃은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
아이야 대 비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 지은이: 성운(1497__1579)
자는 건숙, 호는 대곡 명종 때의 학자로서 을사사화 때 보은에 은거하면서 금서 풍월로 세
월을 보내었다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 말뜻
전원: 논밭과 동산 나아가서 그것들이 있는 농촌 자연의 경치가 좋은 곳의 뜻으로 쓰인다
약밭: 약초를 심은 밭
-- 감상.
전원에 새봄이 찾아오니, 나의 할 일이 참으로 많구나! 꽃나무는 누가 옮겨 심고, 약초밭은
언제 갈 것인가 아이 놈아, 얼른 가서 대나무를 베어 오너라 그것을 쪼개어서 삿갓부터 먼저
결어야겠다 비올 때에 써야 되지 않겠느냐
봄의 농촌은 참으로 할 일이 많다 그러나 모두가 즐거운 일들이어서 마음은 한결 가볍기만
하다
비슷한 노래로 다음의 시조가 있다
전원이 봄이 오니 이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뒷뫼에 엄 기는 약을 언제 캐려 하나니(작자 미상)
성운의 시는 두 수가 전하는데, 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요순 같은 임금을 만나 성대를 다시 보니
태고 건곤에 일월이 광화로다
취하여 수역춘대에 격양가를 부르리라
성운은 아버지가 부정(종 3품) 벼슬까지 하였으나, 형이 을사사화에 억울한 화를 입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80평생을 전원에 묻혀 살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명사 서화담, 이토정, 조남명
등과 사귀며, 시와 거문고와 그리고 학문과 자연과 함께 평생을 마친 지은이의 풍모를 우리는
이 시조에서 느낄 수 있다.
182. 짚방석 내지 마라
한호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엔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이야 박주 산챌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 지은이: 한호(1543__1605)
자는 경흥, 호는 석봉 선조 때의 명필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격려로 서예에 정진하여 왕희지,
안진경의 필법을 익혀, 해서, 행서, 초서 등의 각 체에 모두 뛰어났다 당시 중국의 서체와
서풍을 모방하던 데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경지를 확립하여 석봉류의 강건한 서풍을 창시하였다
그리하여 추사 김정희와 더불어 근세 조선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
-- 말뜻
솔불: 관솔불
혀지: 켜지 본디 '혀다'에서 '혀다'와 '켜다'의 둘로 변천된 것
박주 산채: 변변치 못한 술과 나물 안주
-- 감상
짚방석을 내올 것 없다 수북이 쌓인 낙엽엔들 못 앉겠는가 오히려 그것이 더욱 멋있지
않느냐 일부러 관솔불도 켤 필요없다 어제 진 달이, 지금 막 동녘 하늘에 떠오르지 않느냐
얘야, 갓 익은 막걸리하고 안주는 산나물로 족하니 사양하지 말고 얼른얼른 내어 오너라
낙엽 위에 앉아 돋아오는 새달을 바라보면서, 이 밤을 다정한 벗과 함께 유쾌히 보내리라
산촌의 풍류 생활이, 안빈낙도의 옛선비들의 여유만만한 생활 태도가 우리의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더욱이 이 시조에서 느끼는 자연과 인간의 친화는 하나의 도통한 경지를 이루고 있다
짚방석 대신에 낙엽을, 솔볼 대신에 돋아오르는 달을... 이리하여 자연이 인간 속에
끌어들여지고, 그 경지에서 박주산채로 인간 친화의 한때를 즐긴다 이 경우, 자연과 인간은
하나로 융화되어 이미 둘이 아니다 그의 글씨만큼이나 독창성 있는 자연과 인간의 융화라
하겠다.
183. 창 밖에 국화 심어
창 밖에 국화 심어 국화 밑에 술을 빚어
술 익자 국화 피자 벗님 오자 달 돋아온다
아이야 거문고 청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 말뜻
청쳐라: 청줄을 쳐서 가락을 맞추어라 청줄은 거문고 여섯 줄 중의 과상청과 과외청을 뜻한다
-- 감상
창밖에 국화 심고, 국화 밑에 술 빚어 두었더니 이제 술 익고, 국화 피고, 게다가 벗님네
찾아오고, 또 둥근 달이 둥실 솟아오른다 얘야! 거문고를 꺼내어 청줄을 쳐서 소리를 맞추어라
밤새도록 놀아 보리라
꽃과 술과 달과 거문고, 이만하면 흥이 일지 않겠는가 거기에 벗이 오니 더 바랄 것이 또
무엇이랴 이래서 인생이란 즐거운 것, 그까짓 부귀영화는 탐내어 무엇하리 이렇게 풍류로
인생을 즐길 줄 알던 옛선비는 인생의 본질을 살고 간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게 한다.
184. 청류벽에 배를 매고
윤유
청류벽에 배를 매고 백은탄에 그물 걸어
자넘은 고기를 눈살같이 회쳐 놓고
아이야 잔 자주 부어라 무진토록 먹으리라
-- 지은이: 윤유 98. 참고
-- 말뜻
청류벽: 평양 모란봉의 부벽루에서 연광정으로 내려오는 대동강가에 있는 바위로 된 절벽
경치가 매우 좋다
백은탄: 청류벽 건너편 능라도 남쪽에 있는 여울인데, 물놀이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것을
청류벽과 함께 보통 명사로 풀이한 이가 있는데, 그것은 평양을 모르는 이의 잘못이다
눈살같이: 하얀 생선회가 눈같이 신선해 보인다는 뜻
-- 감상
평양은 옛부터 멋과 풍류의 고장이요, 청류벽 밑의 대동강은 흥과 뱃놀이의
명소였다 거기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백은탄에 올라가 천렵을 하게 되는데,
고기잡이 회쳐 놓고 한잔 기울이면 그것이 바로 신선놀음이었다 거기에 평양 기생의
간드러진 권주가가 곁들면, 참으로 도끼자루 썩는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두고 온 산하'이기에 더욱 그립기만 하구나 애타게 그리운 북녘의 산천이여!
이 시조는 지은이 윤유가 평양감사 때에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면서 읊은 노래이다 바위
병풍을 두른 듯한 청류벽 밑에 배를 매어 놓고, 맞은편 백은탄 여물목에 그물을 친다 백은탄은
능라도 때문에 둘로 갈라진 대동강의 동쪽 물줄기가 능라도 남쪽에서 서쪽 물줄기로 달려드는
여울목이다 천렵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거기에 그물을 치고 자 넘은 고기(아마도 잉어일
것이다 대동강은 잉어가 유명하다)를 잡아서 회를 친다 눈살같이 하이얀 신선한 회를 앞에
놓았으니, 안 마시고 배길소냐 술잔 좀 자주자주 부어라 그리고 춘심아 '수심가' 한마디
불러 보아라 '무진토록' 먹으리라 오늘 하루 나를 잊고 즐겨 보리라! 98번 시조를 아울러
감상하라.
185. 청명시절 우분분할 제
청명시절 우분분할 제 나귀목에 돈을 걸고
주가이 어디메오 묻노라 목동들아
저 건너 행화 날라니 게 가 물어 보시소
-- 말뜻
청명시절: 청명 무렵 청명은 24절기가 하나인데, 춘분과 곡우 사이
우분분: 비가 어지러이 뿌리는 모양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모양
주가이: 술집이 주막이 주격 조사 '__가'가 안 쓰인 것에 주의
행화: 살구꽃 살구꽃은 한국적 정취를 흠뻑 머금은 꽃이다 예전 농가에는 한 그루쯤 반드시
심어져 있어 봄의 정취를 정겹게, 그리고 먼저 알려 주는 꽃이기도 하다
-- 감상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에 '양산도'라는 것이 있는데, 그 가사에 "차문주가하처재요,
목동이요지행화촌이라"는 것이 있다 "말 좀 물어 보자, 술집이 어디메냐"하고 물었더니,
"목동이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키더라"는 것이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목에다가 엽전 돈꿰미(술값에 쓸 참이다)를 건 나귀 등에 앉아
흔들리면서 행화촌으로 술집을 찾아간다
이것이 동화나 신화처럼 들리는 오늘의 현실이 원망스럽구나 문명도 좋고 경제 성장 또한
나쁘지 않지만, 이런 낭만을 이제는 영영 찾아볼 길이 없어지고 말 것인가? 문명의 어느 한
귀퉁이에 이런 낭만을 한번 재현해 보는 방법은 없을까?
평생에 한하기를 회황 적에 못난 것이
초의를 무릅쓰고 목실을 먹을망정
인심이 순후하던 줄을 못내 부러워하노라(작자 미상).
186. 초당의 밝은 달이
곽기수
초당의 밝은 달이 북창에 비꼈으니
시내 맑은 소리 두 귀를 절로 씻네
소부의 기산영수도 이렇던둥 만둥
-- 지은이: 곽기수(1549__1616)
자는 미수, 호는 한벽당 광해군 때의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시문으로 세월을 보낸 사람
'한벽당 문집'이 있다
-- 말뜻
소부: 중국 요순 시대의 은사 흔히 허유와 아울러 쓰인다
기산영수: 기산은 중국 하남성에 있는 산이며 영수는 안휘성에서 회수로 흘러드는 강인데,
기산을 지나간다 소부, 허유의 고사로 더욱 유명하다 허유는 요임금이 그에게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하자, 귀가 더러워졌다고 영수로 달려가 귀를 씻었다 소부는 소에게 물을
먹이려고 영수에 갔다가 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소리를 듣고, 그런 더러운 물을 소에게 먹일 수가
없다고 상류로 몰고 가버렸다고 한다
-- 감상
초당에 비친 휘영청 밝은 달이 북녘 창을 비스듬히 비치고 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 포착한
감각이다 거기에 옆 냇가에서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두 귀를 절로 씻어 준다 맑고 깨끗한
물소리라는 뜻이다 어느 음악이 이 자연의 선율보다 더 아름다우랴 냇물에 귀를 씻는다 하니
소부, 허유의 고사가 생각난다 이만하면 나도 소부, 허유와 벗삼을 수 있지 않을까
초당에 비친 달, 내 귀를 씻어 주는 시냇물 소리, 이 자연 경관도 좋거니와, 소부, 허유를
본받을 수 있는 지은이의 유유자적함 또한 멋스럽다 이 어디에 세상에 속기가 있는가 오염과
공해에 찌들린 현대인이 이런 정경에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가?
.
187. 추강에 밤이 드니
월산대군
추강에 밤이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라
-- 지은이: 월산대군
조선조 성종 임금의 형님으로, 이름은 정, 자는 자미, 호는 풍월정 서사를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나, 그의 시작이 중국에까지 널리 애송되었다 함 고양의 북촌에 별장을 짓고 일생을 자연
에 묻혀 지냈다
-- 말뜻
추강: 가을의 강 가을철의 싸늘한 강
차노매라: 차구나! '__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무심한: 별다른 욕심이나 잡념 따위가 없는 허허한 마음
-- 감상
가을 강에 밤이 찾아오니 물결이 차구나! 낚시는 드리우나 고기도 아니 무는구나 그래서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가 홀로 쓸쓸히 돌아오는구나!
초, 중, 종장의 끝머리를 모두 '__노매라'로 끝맺음으로써 계절적인 배경에서 주는 스산함을
배제하고 오히려 경쾌한 리듬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되풀이와 다짐의 효과이다 특히 가을
밤의 강의 싸늘하고 쓸쓸한 풍경이 적절한 소재와 적절한 구성으로 짜여져 있어서 운치를 더해
준다
"물결이 차노매라" "고기 아니 무노매라" "빈배 저어 오노라" 등의 구절은, 말 그대로는
부정적인 표현이지만, 그 문의는 오히려 매우 긍정적이며 여유있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풍성함이 엿보이므로, 지은이의 문학성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준다.
188. 태평 천지간에
양응정
태평 천지간에 단표를 둘러메고
두소매 늘이혀고 우줄우줄 하는 뜻은
인세에 걸린 일 없으니 그를 좋아하노라
-- 지은이: 양응정(1519__ ?)
자는 공섭, 호는 송천 벼슬은 공조참판, 대사성을 지냈으며, 시문에 능하였고,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 말뜻
단표: 도시락과 표주박
늘이혀고: 늘어뜨려 끌고 구속적이 아닌 차림새를 말한다
우줄우줄: 흥겹게 걷는 모양
인세: 인간 세상
-- 감상
태평한 세상에 밥 담을 도시락과 물 떠마실 표주박 하나 어깨에 둘러메고, 두 소매를 늘어뜨려
끌면서 춤이라도 추듯이 우줄우줄 흥겹게 거니는 까닭은, 세상에 아무 것도 거리낄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다 '죽장망혜 단표자로 천리강산 유람'하는 옛방랑 시인이
머리에 떠오른다 청빈 속에서도 언제나 인생을 유유자적하는 여유있는 생활 태도,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 털끝만큼도 거리낄 것이 없는 호연 활달한 기개,
대인 군자의 풍모가 이 아닌가?.
189. 평생에 일이 없어
낭원군
평생에 일이 없어 산수간에 노니다가
강호에 임자되니 세상일 다 잊었노라
어떻다 강산풍월이 긔 벗인가 하노라
-- 지은이: 낭원군(? __1699)
선조 임금의 손자, 효종의 당숙으로 이름은 간, 호는 최락당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시가
에 능하였다 '산수한정가' '애국도보가' '자경가' 등 시조 30수를 남겼다
-- 감상
평생에 별로 할 일이 없이 한가로워, 산수간을 노닐면서 강호의 주인이 되고 보니 세상일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산과 풍월, 그것이 둘도 없는 친한 벗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벗삼아 담소하고 애락할 줄을 알던 옛사람은 그 자신이 곧 자연이요,
따라서 신과도 통하는 정신세계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신이 자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그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나' 역시 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천도교의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은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일전중생 실유불성)'는 것도 다 그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하느님이니 부처니 신이니 하는 것이 모두 자연적 존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0. 한 잔 먹세 그려
정철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줄이어매여 가나
유소보장에 만인이 울어예나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숲에 가기곧 가면 누른해 흰달 가는비
굵은눈 소소리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젯납이 휘파람 불 제야 뉘우친들 어이리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산놓고: 꽃나무 가지를 꺾어, 하나 둘 셈을 하면서 한잔 먹고 한가지, 두잔 먹고 두 가지...
무진무진: 한없이 끝없이 무궁무진
거쩍: 짚 따위를 허술하게 짜거나 엮어서 깔개나 덮개 등으로 쓰는 물건
줄이어매여: 꽁꽁 졸라매어져서
유소보장: 호화롭게 꾸민 상여를 말한다 '유소'는 깃발 따위의 가장자리에 붙이는 오색실이나
노로 만든 술 '보장'은 고급 휘장(장막) 여기서는 그것을 두른 상여를 말한다
울어 예나: 울면서(곡을 하면서) 따라간다
어욱새: 억새풀 지붕 따위를 이는 데 썼다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백양: 은백양 사시나무
가기곧 가면: 일단 가기만 하면
누른해: 누런 해 참으로 절묘한 말이다 묘지에서 쳐다보는 기분 나쁜 뿌연 해다
흰달: 밝은 달이 아니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달이다
가는비: 가랑비 시원스럽게 내리는 비가 아니라 구질구질하게 내리는 음산한 비
굵은눈: 함박눈이 온 천지를 뒤덮고 펄펄 내린다 눈밖에는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소소리바람: 음산한 바람 몸속으로 파고드는 으스스한 바람 회오리바람일 수도 있다
잿납이: 잿빛(회색) 납이 납은 원숭이의 옛말
휘파람: 원숭이의 구슬픈 울음 소리를 말한다
-- 감상
'장진주사'라는 사설시조로 멋진 권주가이다 사람이 한번 죽고 나면, 거적을 덮어 지게에
짊어지고 가나, 유소보장 호화로운 상여에 만인이 울면서 따라가나, 일단 북망산천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외롭고 쓸쓸하고 을씨년스럽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냐 부귀와 영화도 살았을
적의 일이지 한번 죽어지면 모든 것이 다 일장춘몽이다 공수래 공수거하는 인생, 그러니까
살아 생전에 후회없이 즐겁게 지내 보세 자, 이 술 한잔 더 받게 그리고 만수무강 누려 보게
그려!
초반부의 꽃을 꺾어서 술잔 수를 셈하면서 즐기는 낭만적인 정경과, 후반부에 그려진 무덤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는 대조적이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한다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과 퇴폐적인 정조로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으나, 북망산천의 묘사는 영상미의 극치를
보여 주는 걸작이다.
191. 헌 삿갓 자른 되롱
조현명
헌 삿갓 자른 되롱 삽 짚고 호미 메고
논뚝에 물 보리라 밭 기음이 어떻더니
아마도 박장기 보리술이 틈없은가 하노라
-- 지은이: 조현명(1690__1752)
자는 치회, 호는 귀록 영조 때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사람
-- 말뜻
자른 되롱: 짧은 도롱이 도롱이는 짚 따위로 엮어서 만든 비옷의 한 가지 어깨 위에 걸쳐
입는다
물 보리라: 논물을 보아야겠다 논에 물이 알맞게 대어지는가 어떤가 물고를 검사하는 것을
말한다 물고는 논두렁을 잘라서 낸 도랑으로 물이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흐르게 한 것
발 기음: 밭에 난 잡초 그것을 호미로 제거하는 것을 기음맨다고 한다
아마도: 종장 첫머리에 흔히 쓰이는 감탄의 뜻을 가진 말로서, '짐작하건대'의 뜻이다
박장기: 박 조각으로 만든 장기 옛날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공예품이다
틈없은가 하노라: 박장기를 두고 보리술을 마실 틈이 없구나
-- 감상
마치 옛농촌의 비오는 날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다 헌 삿갓을 머리에 쓰고, 짧은 도롱이를
어깨에 걸치고 한 손은 삽을 메고, 또 한 손에는 호미를 들고, 들로 나가 삽으로 논의 물고
내고, 호미로 밭의 기음매고... 이렇게 바쁜데, 어디에 박장기 두고 보리술 마실 겨를이 있단
말이냐 바빠도 즐겁기만 한 것이 농사짓기인가 보다.
192. 헛글고 시끈 문서
김광욱
헛글고 시끈 문서 다 주워 후리치고
필마로 추풍에 채를 쳐 돌아오니
아무리 매인 새 놓이다 이대도록 시원하랴
-- 지은이: 김광욱 143. 참조
-- 말뜻
헛글고 시끈 문서: 어지러이 흩어져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귀찮은 문서
후리치고: 내동댕이치고 미련없이 내던지고
필마로: 필마단기으 준말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서
매인 새 놓이다: 매여 있는 새가 풀려 났다
-- 감상
지은이의 '율리율곡'의 8째 수이다 벼슬살이의 번거로운 일들을 미련없이 깨끗이
내동댕이치고, 말에 채찍주어 가을 바람을 가르면서 내 고향 강호로 돌아오니, 후련하고
시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자유를 잃고 매여서 살던 새가 놓여서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간다고 해도 이렇게 시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야인이 되어 전원 생활을 시작하는 옛선비의
심정은 과연 이런 것이었던가?
193. 홍진을 다 떨치고
김성기
홍진을 다 떨치고 죽장망혜 짚고 신고
현금을 두러메고 동천으로 들어가니
어디서 짝잃은 학려성이 구름 밖에 들린다
-- 지은이: 김성기(연대 미상)
자는 자호, 호는 조은, 이은 숙종 때의 가인 거문고와 퉁소의 명인으로, 서호에 배를 띄우
고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김천택과 사귀었으며, 시조 8수가 전한다
-- 말뜻
홍진을 다 떨치고: 속세의 먼지를 모두 털어 버리고 속세를 떠나서
죽장망혜: 대나무 지팡이와 짚신 옛 나그네의 행장이다
현금: 거문고
동천: 산수에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학려성: 학의 울음 소리
-- 감상
속세의 먼지를 훨훨 떨어버리고 대지팡이와 짚신을 짚고 신고, 거문고를 둘러메고 경치 좋은
골짜기로 찾아 들어가니, 짝 잃은 학의 울음 소리가 하늘 높이 구름 속에서 들여온다 이곳이
선경이 아니고 무엇이며, 이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랴 신선은 속세를 멀리 떠난 별천지에
살았고, 그 신선은 학을 타고 퉁소를 불면서 하늘을 날아다녔다 비록 몸은 학을 타지
못하였을망정, 그 마음은 이미 학을 타고 구름 속을 날고 있다 훨훨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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