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학습

제4장 생활의 멋 (1)

실다이 2008. 11. 18. 13:57

제4장 생활의 멋 (1) 


  124. 가을 비 기똥 얼마 오리: 김천택 87

  125. 강산 좋은 경을: 김천택 89

  126. 강호에 봄이 드니: 황희 91

  127. 거문고 대현 올려: 정철 93

  128. 건너서는 손을 치고 95

  129. 곡구롱 우는 소리에: 오경화 97

  130.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이정보 99

  131. 굴원 충혼 배에 넣은: 주의식 101

  132. 금준에 가득한 술을: 정두경 104

  133. 나는 마다 나는 마다 106

  134. 나비야 청산 가자 108

  135. 낚시줄 걸어 놓고: 윤선도 110

  136. 내 집이 길치인 양하여 113

  137. 내 한낱 산깁 적삼: 정철 115

  138. 논밭 갈이 기음매고: 신희문 117

  139. 늙은이 저 늙은이: 안민여 119

  140. 다만 한간 초당에 122

  141. 달이 두렷하여: 이덕형 124

  142. 녹양이 천만산들: 이원익 127

  143. 대막대 너를 보니: 김광욱 130

  144. 대 심어 울을 삼고: 김장생 132

  145. 대추 볼 붉을 골에: 황희 135

  146. 동창이 밝았느냐: 남구만 137

  147. 매아미 맵다 울고: 이정신 140

  148. 물 아래 그림자 지니: 정철 142

  149. 백구야 놀라지 마라 145

  150. 벼 비어 소에 싣고 146

  151. 벼슬을 저마다 하면: 김창업 148

  152. 벽오동 심은 뜻은 150

  153. 보리밥 풋나물을: 윤선도 152

  154. 비오는데 들에 가랴: 윤선도 155

  155. 빈천을 팔랴 하고: 조찬환 157

  156. 산가에 봄이 오니: 이정보 160

  157. 산 밑에 사자 하니 162

  158. 산촌에 눈이 오니: 신흠 164

  159. 삿갓에 도롱이 입고: 김굉필 166

  160. 새원 원주 되어: 정철 169

 

          제4장  생활의 멋 (1)


  멋! 멋있는 생활, 멋을 아는 생활, 멋진 인생, 멋장이!  이런 말들을 우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쉽게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생활 속에서 흔히 쓰고 있어도 정작

설명을 하려고 하면, 딱부러지게 풀이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는다  '큰사전'에서는 1)방탕한

기상  2)풍치 있는 맛  3)사물의 진미라고 풀이했고, 또 어떤 사전에는 풍류, 풍류미라고도

하였다  직역될 만한 외래어도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만큼 복잡 오묘하고,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뜻과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멋을 말뿐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까지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5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겨레의 생활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겨레는 멋을 알고 멋 속에 사는 민족이다  그만큼 예술적인 고등 정신 작용을

잘하는 민족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21세기에는 우리 겨레가 세계 문화를 주도한다는 이야기를 곧잘들 하고 있다  이제는 거의

상식화되다시피 되어 있지나 않은가 할 정도이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다른 겨레에 비하여

좀 독특한 생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날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미개민족의 상징인

양, 그런 취급을 받아 왔는데, 지금은 반대로 수준 높은 문화의 양상으로 새로운 조명을

받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한 경향은 특히 올림픽을 치르고 나서부터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왜정 때에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도

못마땅해 하던 '김치'가 요즘에는 그들의 둘도 없는 기호식품 '키무치'가 되었고, 그것을 일본

회사가 동남아 내지 미국에까지로 수출하고 있다니, 이 어찌된 영문인가?  아닌게 아니라,

따지고 보면 우리의 발효식품(김치 외에도 술, 떡 등 많다)은 세계적인, 아니 세계 정상에

있음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다음에는 '주'에 관한 것이다  '온돌' 또한 우리의 독특한 난방법인데, 이것이 요즘 서양에서

새로운 난방 양식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 화로를 끌어안고 오돌오돌

떨면서도, 따뜻하고 편한 우리의 온돌을 식민지 민족의 것이기 때문에 미개한 것, 산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천하의 몹쓸 것인 양 헐뜯던 것인데, 이제는 그것이 페치카(벽면이 온돌처럼

되어 있는 것)보다도, 스팀이나 온풍식보다도 합리적, 위생적, 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세번째로 '의'인데, 금년의 양복 바지의 유행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의 베잠방이를 닮은

바지, 곧 위쪽은 헐렁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점 좁아지는, 참으로 활동적이고 입기에 편리한

평상복이다  우리의 재래식 베잠방이, '시절이 좋을손 옷이 젖다 관계하랴'의 그 베잠방이,

허리는 신축 자재이고, 몸집이 뚱뚱해지거나 반대로 날씬해졌다 해서 뜯어고쳐야 혁대 구멍이

맞는다는 그런 융통성 없는, 엉덩이를 졸라매어 기혈의 순환이 잘 안되는 그런 것이 아니어서

생리학상으로도 그만이다  당장에라도 거리에 나가서 멋장이 젊은 여성들의 금년 유행 바지를

보라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지난날 아니 현재에 있어서도 위에서 말한 것들은 우리의 버려야 할, 개량하여야 할

것들이라면서 서양 것들을 따라가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면 그 판국이

완전히 뒤바뀌어져 가고 있는 것이 되지 않는가

  요즘의 신식 사람들은 또한 '핵가족 제도'를 마치 금과옥조와도 같이 여기는 경향이 강한데,

정작 그것이 발달한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서는 이 핵가족 제도라는 서양식 개인주의의 산물이

몰고 온 노인 문제, 비행 청소년 문제 등의 큰 사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만 하더라도 벌써, 복지 연금 망국론이 이제는 별로 새롭지 않고, 영국,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대가족 제도 예찬론이 뜻있는 학자들에 의하여 제창되고 있다고 한다

  노인 문제, 비행 청소년 문제와 같은 대부분의 사회 문제의 근본적, 인간적 해결책은 대가족

제도에 있다는 주장 아래 한국의 가족 제도가 연구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정부에서는 노인 문제 해결에 있어서, 노인 복지의 중심을 연금제가 아닌

가족 제도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결코 빗나간 생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알량한 스웨덴의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노부모를 모시자는 발상이 위대한

아이디어나 되는 듯이 말하는 이도 있지만, 생활 방식이 다른 우리까지도 해야 된다는 것은

그저 남의 뒷꽁무니나 따라다니는 주체성 없는 행동이 아닐가 하고 적이 의심스럽다

  핵가족 절대 신봉의 젊은이들도 일단 아이들을 가지게 되면, 부리나케 찾는 것이

노부모들이다  제발 좀 오셔서 도와 달라는 것이다  노인으로서도 손자와 오손도손 지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외로움이니 소외감이니 하는 것들이 어디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우리는 부모 형제 자매 등 가족 사이의 애정을 도탑게 하는 노력을 '핵가족'에 앞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글'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공공연하게 '한글'은 가장 과학적인 조직을 가진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자랑은 하지만, 이 위대한 문자 한글이 모아쓰기로 만들어져

있어서, 손으로 치는 타자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풀어쓰기로 된 알파벳을 못 당한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오늘날, 전자 타자기가 생기고 모든 것을 컴퓨터화한 이 시점에 있어서는 풀어쓰기보다

모아쓰기가 오히려 좋다  모아쓰기는 글자의 상형화가 가미되어서 읽기에도, 쓰기에도 훨씬

더 유리하다  알파벳처럼 단어가 길어져서 생기는 NATO나 UNESCO니 하는 식의 약어가 필요없고,

모아쓰기 글자는 세로쓰기에나(간판 따위에서 특히 그것을 느낄 것이다) 가로쓰기에나 모두

다 적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혹자들은 세종 대왕이 한글 창제시에 한자의 네모꼴에서 영향을

받아 네모꼴 안에 집어 넣느라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잘라서 말들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아서는 미리 오늘날의 상황까지 내다보고 만든 것이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내

생각을 그저 엉터리라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겠으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남은 어떻게 된 셈인가

  천 년이 훨씬 넘도록 우리의 생활과 문화를 이끌어 온 우리 고유의 것들을 우리는, 그것들은

모두 낙후된 것, 질이 낮은 것으로 낙인을 찍어 놓고 청산하기에 급급한 인상마저 가지게

되는데, 오히려 밖에서는 남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재인식, 재평가를 하고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물론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사는 발전하는 것, 항상 진리를

향하여 향상하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향상하는 것임을 안다면,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5천 년 문화의 튼튼하고도

전통있는 발판 위에 두 발을 굳건히 디디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현대 문명으로 재조명하면서,

국제적 미아가 아니라 세계 문화의 선구자로서의 위상을 세워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는 "긔 좋은가 하노라".



    124. 가을 비 기똥 얼마 오리 첨부이미지


  가을 비 기똥 얼마 오리 우장 직령 내지 마라

  십리길 기똥 얼마치 가리 등 앓고 배 앓고 다리 저는 나귀를 크나큰 당채로 쾅쾅 쳐 몰지 마라

  가다가 주가에 들거든 쉬어 가려 하노라


  -- 말뜻

  기똥: 그까짓

  우장 직령: 우장은 비옷, 직령은 옛날 무관의 웃옷의 한 가지  깃이 곧게 되어

있어서 이렇게 부른다

  당채: 당나라에서 들어온 말채찍

  주가: 술집  주막


  -- 감상

  가을비가 오면 그까짓 얼마나 오겠느냐  우비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리고 고작 10리

길인데, 등 앓고 배 앓고 게다가 다리까지 저는 비루먹은 나귀를 괴롭힐 것이 무엇이냐

가을비 맞으면서 걸어서 가다가, 주막에 들러서 한잔 하고 쉬면서 그 비 그어서 가면 되지

않느냐

  느긋한 여유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하고도 소박한 그 멋이 익살스러운 표현에 잘 어울리어,

모르는 사이에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이러한 옛선비들의 낙천적인 성격, 낭만적인 생활

태도를 비생산적이라고 일축할, 이른바 현대 산업 사회의 맹렬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4시간을 뛰어야 할 인생도 마음 가짐만은, 옛사람의 이 느긋함을 힘써 가지도록 하고 싶다

  중장이 파격이니 엇시조가 분명하다.



   125. 강산 좋은 경을 첨부이미지

                              김천택


  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내 힘과 내 분으로 어이하여 얻을소냐

  진실로 금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 지은이: 김천택  39. 참고

  -- 말뜻

  강산: 강과 산  산천이니, 산하니, 산수니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다툴 양이면: 다툴 것 같으면  다툰다면

  두고 노니노라: 내 앞에 그대로 놓아 두고 자유로이 즐길 수 있다


  -- 감상

  이 강산, 이 좋은 경치를 만일 힘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다툰다면, 힘없고 지체 낮은 나의

차례는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것만은 금하는 사람이 없기에 나도 마음대로

노닐며 즐길 수가 있다

  세속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권력이나 금력 따위에 초연하면서 오로지 자연 속에서 인생을

즐기는 옛선비의 생활 태도가 재치 있는 표현으로 잘 그려져 있다  읊노라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가작이다.



   126. 강호에 봄이 드니 첨부이미지

                                황희


  강호에 봄이 드니 이몸이 일이 하다

  나는 그물 깁고 아이는 밭을 가니

  뒷뫼에 엄 기는 약은 언제 캐려 하나니


  -- 지은이: 황희(1363__1452)

  자는 구부, 호는 방촌  조선 태조__세종대에 벼슬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품이 청렴 원만하고 매우 너그러웠으며, 만년에까지 글 읽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어진

재상으로서 평생토록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았다


  -- 말뜻

  하다: 많다

  엄 기는: 움이 자라는  움이 돋아서 커가는


  -- 감상

  봄철의 전원 생활의 즐거움을 바빠서 죽겠다고 엄살을 피우는 식의 표현이 익살수럽고도

멋있다

  지난해 쓰던 헌 그물을 꺼내다가 손질하랴, 텃밭을 갈아서 남새를 키우랴, 뒤산에 자라는

약초를 캐랴, 할 일이 참으로 많구나!  봄이 되면, 농촌의 자연은 무섭게 성장을 한다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보아 주어야 그것들은 우리에게 혜택을 가져다 준다  자연과 함께 숨쉬는

농촌 생활의 목가적인 편모이다.



    127. 거문고 대현 올려 첨부이미지

                                  정철


  거문고 대현 올려 한과 밖을 짚었으니

  얼음에 막힌 물 여울에서 우니는 듯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를 좇아 마초나니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대현: 거문고의 넷째 줄의 이름

  과: 대과  첫째 과  과는 거문고 줄을 받치는 기러기발


  -- 감상

  대현 위에 올려놓고 한과 밖을 짚는 거문고 줄 위에서 율동하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눈에

선하구나  그 소리 또한 얼마나 맑고 아름다우냐  마치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

게다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의 반주가 더없이 절묘하구나!

  구성진 거문고 소리를 "얼음에 막힌 물이 여울에서 우니는 듯"하다 했고, '널따란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반주라도 하듯이 장단을 맞춘다는 착상이나 시정이 송강의 붓끝 아니고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청각에 호소한 음률의 표현이지만, 그 뒤에 숨은 시각적 영상이

더욱 선명한 명작이다.



    128. 건너서는 손을 치고 첨부이미지


  건너서는 손을 치고 집에서는 들라 하네

  문 닫고 들자하랴 손치는 데를 가자 하랴

  이 몸이 두 몸 되어 여기저기 하리라


  -- 감상

  건너편에서는 손을 치며 오라 부르고 이쪽 집에서는 들어오라고 보챈다  문 닫고 집으로

들어갈까, 손 치며 부르는 데를 가 볼까  이야말로 두 손에 떡이로구나  이것도 못 버리고

저것도 버릴 수가 없다  에라!  이 몸이 둘이 되어 여기도 가고 저기도 들면 얼마나 좋을까

  유원지 등에서의 한 장면을 연상해도 나쁠 것이 없다  여러 벗의 부름, 여러 님의 반김

풍류객에게는 이런 경우가 흔히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집에서는 들라 하네"의 집은 자기 집이니 마누라의 바가지인 모양이요, 그렇게

되면 "건너서 손을 치는" 것은 시앗의 앙탈이 되니 상황은 상당히 심각해진다  그러면 '이

몸이 두 몸 되어 여기저기 하리라'는 두 여인을 거느린다는 뜻이 되므로 봉건 사회에서의

축첩제도를 희화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문 닫고..."의 구절에서는 자중과 나아가서는

수신제가의 뜻까지 포함시켰는지도 모른다.



    129. 곡구릉 우는 소리에 첨부이미지

                                  오경화


  곡구릉 우는 소리에 낮잠 깨어 일어보니

  작은 아들 글읽고 며늘아기 베짜는데 어린 손자는 꽃놀이한다

  마초아 지어미 술 거르며 맛보라고 하더라


  -- 지은이: 오경화(연대 미상)

  자는 자형, 호는 경수  시조 3수가 전하나 신원은 미상이다


  -- 말뜻

  곡구릉: 꾀꼬리 우는 소리의 한자 의성어

  며늘아기: 며느리의 애칭

  마초아: 때마침  시조 종장 첫머리에 감탄의 뜻을 겸하여 흔히 쓰인다

  지어미: 마누라  아내


  -- 감상

  꾀꼬리 우는 소리에 낮잠을 깨어 일어나 보니, 작은 아들은 책을 읽고, 며늘아기는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는데 손자 놈은 그 옆에서 꽃놀이에 여념이 없다  때마침 마누라는 익은

술을 거르면서 잘 익었는가 맛을 보라고 한다

  과거 우리 보통 가정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전원에 위치한 평화로운 가정 생활을

그렸다  핵가족 운운하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거의 맛보기 어려운 정겨운 정경이다

.


    130. 꽃 피면 달 생각하고 첨부이미지

                                     이정보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 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려뇨


  -- 지은이: 이정보  96. 참고

  -- 말뜻

  완월장취: 달을 벗삼아 즐기면서 거나한 기분으로 오래도록 노닌다


  -- 감상

  아름다운 꽃, 밝은 달을 보면 한잔 술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술이라면 의당 벗과

더불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데에 멋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리운

것이 친한 벗인데, 그 벗과 달 밝은 밤에 꽃 아래에서 한잔 건네면 더 부러울 것이 또 무엇이랴

  화조월석에, 벗님네와 더불어 담론의 꽃을 피운다는 생각만 해도 쾌남아의 가슴 설레는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작자 미상의 이와 비슷한 주제를 가진 시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으니, 비교하여 보라


  꽃피자 술이 익고 달밝자 벗이 왔네

  이같이 좋은 때를 어이 거저 보낼소니

  하물며 사미구하니 장야취를 하리라(작자미상)


  4미는 꽃, 술, 달, 벗을 가리키며 그것들이 고루 갖추어졌다 해서 '사미구'라 하였다


.

   131. 굴원 충혼 배에 넣은 첨부이미지

                                   주의식


  굴원 충혼 배에 넣은 고기 채석강에 긴 고래 되어

  이적선 등에 얹고 하늘 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새고기 났거니 낚아 삶다 어떠리


  -- 지은이

  주의식(자세한 연대 미상)  자는 도원, 호는 남곡, 숙종 때에 무과에 올라 칠원현감을 지냈다 

가객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성품이 매우 공손하고 의젓하여 군자의 풍도가 있었다  시조 14수가

전하고, 그림에도 능하여 특히 매화를 잘 그렸다


  -- 말뜻

  굴원 충혼: 굴원의 충성된 넋  굴원은 중국 전국 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회왕을 섬겼는데,

간신의 모함으로 강남으로 귀양을 가서, 5월5일 멱라수에 빠져 죽었다

  채석강: 중국 안휘성에 있는 강인데, 이태백이 이 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에 취하여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다가 빠져 죽었다

  긴 고래 되어: 이태백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미화하여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이백기선비상천)'고 읊었다

  이적선: 이태백이 하도 시를 잘 짓고 속인을 벗어났다 하여, '인간 세상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이렇게 불렀다


  -- 감상

  굴원의 충성된 넋을 뱃속에 넣은 고기가 채석강의 큰 고래가 되어, 이태백을 등에 업고 하늘로

올라갔으니, 지금의 고기는 굴원의 충혼을 머금은 고기가 아니라 새로 난 고기이므로, 이제는

낚아서 삶아 먹은들 어떠하랴  아마도 지은이가 뱃놀이를 하면서, 그의 역사 지식을 동원시켜

본 것이리라

  다음 세 편의 노래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재미있다


  초강 어부들아 고기 낚아 삶지 마라

  굴삼려 충혼이 어복리에 들었나니

  아무리 정확에 삶은들 변할 줄이 이시랴(이명한)


  초강의 어부들아 그 강 고기 낚지 마라

  굴삼려의 원한이 들었나니 어복중에

  삶기는 삶으려니와 충혼조차 삶길소냐(정철)

  (굴원은 벼슬이 삼려대부였으므로, 그를 가리켜 '굴삼려'라 불렀다)


  묻노라 멱라수야 굴원이 어이 죽다터니

  참소에 더러인 몸 죽어 묻힐 따이 없어

  창파에 골육을 씻어 어복리에 장하니라(성충).



    132. 금준에 가득한 술을 첨부이미지

                                   정두경


  금준에 가득한 술을 슬카장 거후르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그지없다

  어즈버 석양이 진타 마라 달이 조차 오노매


  -- 지은이: 정두경(1597__1673)

  자는 군평, 호는 동명자  이항복의 문인으로, 나이 14세에 별시에

급제하였고, 약관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예조참판, 제학에 이르렀다  병자년에 '비어절무

십조'를 들어 상소하기도 하였다  문장이 호방하고 풍자적이었다


  -- 말뜻

  금준: 금항아리  술단지를 미화한 말이다

  슬카장: 실컷  마음껏

  거후르고: 술잔을 기울여 마시고  오늘날에도 되살려 쓸 만한 옛말이다

  어즈버: 아!  시조 종장 첫머리에 많이 쓰이는 감탄사이다

  진타 마라: 다 지나간다고 걱정하지 말라

  오노매: '오노매라'를 줄인 형태  '__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__는구나!'


  -- 감상

  지은이가, 학자이며 시평가인 홍만종의 집에서 친구들과 담론의 꽃을 피우는 자리에서

불렀다고 한다

  금항아리에 가득한 술을 뜻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실컷 마시고, 취한 뒤에 담소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노니, 즐거움이 한이 없다  아!  해가 다 져 간다고 아쉬워하지 마라

동쪽 하늘에 달이 돋아오니, 밤을 도와 마시면 더욱 좋지 아니한가

  뜻 맞는 친구와의 술자리는 이렇게도 즐거운 것, 인생의 즐거움이란 별것이 아니다  술 있고,

벗 있고, 달만 있으면 그만인 것을....



    133. 나는 마다 나는 마다 첨부이미지


  나는 마다 나는 마다 금의옥식 나는 마다

  죽어 관에 들 제 금의를 입으려니 자손의 제 받을 제 옥식을 먹으려니 죽은 후

못할 일은 분벽사창 월삼경에 고운 님 다리고 주야동침하기로다

  죽은 후 못할 일이니 살아서 아니하고 뉘우칠까 하노라


  -- 말뜻

  금의옥식: 비단옷에 이밥이니, 호사스러운 생활의 뜻이 된다

  분벽사창: 하얗게 회를 바른 벽과 비단 커튼을 친 창이니, 아름답게 꾸민 안방이다

  월삼경: 달이 밝은 한밤중

  주야동침: 밤낮으로 미인과 잠자리를 같이함


  -- 감상

  모든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비단옷에 기름진 이밥 먹는 호의호식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어서 널 속에 들어갈 때에 비단옷을 먹게 될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내 소원은

무엇이냐  죽어서 못할 일은 분벽사창에서 한밤에 님을 안고 즐기는 일, 이 일만은 죽어서는

못할 일이니, 살아 있을 적에 실컷 하지 못하면 죽은 뒤에 후회할 일이 아니겠느냐  고운

님과의 정사가 인생 최대의 낙이라는 의미인가 보다

  늙어서 정력에 자신이 없어질수록 그것에 대한 욕구나 불만은 가속적으로 더해지는 경향이

생기는 데서 이런 시조도 생겨 나는 것 같다  그러나 부질없는 향략 추구의 몸부림으로

몰아붙이기에는, 이것이 가엾은 인간성의 한 단면이기도 함을 어찌하랴.



    134. 나비야 청산가자 첨부이미지


  나비야 청산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꽃에서 푸대접하더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 감상

  나비야, 초목이 우거진 푸른 산으로 가자  범나비 너도 같이 가자  무슨 뚜렷한 목적이 있어서

가는 길도 아니니, 가는 데까지 가다가 해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가서 자고 가자  만일, 꽃에서

푸대접을 하거든 잎에서라도 자고 가면 되지 않느냐  구름같이, 물같이 흘러다니는 자유의

몸인데 거리낄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느냐?

  거침없이 내뱉은 듯한 표현인데, 읊으면 읊을수록 감칠맛 나는 멋진 시조이다  자연이 곧

나요, 내가 곧 자연이니 그럴 수밖에... 작품 속의 주인공은 행운유수의 풍류객일까, 꽃을

찾는 나비를 등장시켰으니 여색을 즐기는 한량일까  그 어느 것도 다 좋다  구애될 것은 하나도

없다  꽃에서 푸대접하더든 잎에서 자고 가도 하나도 신경쓰일 것이 없다는 불기의 자유인이니

거리낄 것이 무엇이랴.



    135. 낚시줄 걸어 놓고 첨부이미지

                                  윤선도


  낚시줄 걸어 놓고 봉창에 달을 보자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리 맑게 난다

  남은 흥이 무궁하니 갈길을 잊었단다


  -- 지은이: 윤선도  110. 참고

  -- 말뜻

  봉창: 배에 있는 창을 말한다

  하마: 벌써  이미

  밤들거냐: 밤이 들었느냐?  '__거'는 과거시제 보조어간

  자규: 두견새, 소쩍새, 접동새, 불여귀, 귀촉도 등의 다른 이름이 수없이 많다  그만큼

옛시인들의 입에 오르내린 새인 것이다

  잊었닷다: 잊었더라  잊었도다  '__닷다'는 뜻을 강조하는 종결어미


  -- 감상

  앞 내에 배 띄우고 밤낚시를 즐기는 모양이다  잠깐 낚싯줄을 걸어 놓고 봉창에 비친 달을

쳐다본다  벌써 밤이 깊었는지 소쩍새 우는 소리가 처량하게 들려 온다  그 소리 맑기도 하구나

하늘에 달 뜨고 소쩍새 울음 소리 먼데서 들려오니 잔잔한 물 위에 부서지는 달빛이 더욱

흥겹구나!  갈 길을 잊었노라  이 경치, 이 흥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냐

  자연에 흠씬 젖어 푹 빠져 버렸구나  낚시가 무슨 고기 잡으려는 낚시냐  낚싯줄 드리워

두고 봉창에 비치는 달 구경이나 하자  밤하늘을 가르며 먼데서 들려 오는 자규의 맑은 소리나

들어 보자  남해 바다에 띄워 놓은 밤배에서 즐길 수 있는 고향악이요 낭만의 영상이다  "갈길을

잊었닷다"는 화룡점정이다

  해남반도 남쪽 멀리 바다 끝에 보길도라는 낙도에는 고산이 벼슬을 물러나 강호 생활을 했던

유적지가 있다  넓은 못을 파고, 산더미 같은 바위를 여기저기 날라다 놓았다  아름드리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부용동이라 일컫는 연못에는 연잎이 우산 같다  고산이 살던 집은,

왜정 때에 흔적을 없애 버리고 국민학교를 지었다  거기서 얼마 안되는 거리에는 바닷물이 내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배를 띄우고 낚시를 즐겼던 모양이다  그의 '어부사시사'가 여기서

태어났다

  동녘 멧부리에서 달이 솟아오르고, 숲에서 자규 소리 들려 오면, 비록 고산이 아니더라도

시흥이 절로 샘솟을 듯한, 여하튼 그런 곳이다  고산이 자연을 좋아했는지, 자연이 고산에게

산을 좋아하게 했는지, 아리숭한 그런 고장에서 이 시조가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고산이나

자연보다도 조물주에게 먼저 고개가 숙여진다.



    136. 내 집이 길치인 양하여 첨부이미지


  내 집이 길치인 양하여 두견이 낮에 운다

  만학천봉에 외사립 닫았는데

  개조차 짖을 일 없어 꽃 지는 데 조오더라


  -- 말뜻

  길치: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호젓한 외딴 곳

  만학천봉: 일만 골짜기와 일천 봉우리이니, 높고 험한 산이 겹겹이 싸여 있는 것  깊은 산골

  외사립: 사립은 대나 싸리 따위로 엮은 시골집의 대문짝  외사립은 그것이 한짝만으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말한다  아주 초라한, 시늉만의 대문

  조오도라: 졸더라


  -- 감상

  한낮에 소쩍새가 우는 산골  만학천봉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산골, 드나드는 사람도 없이,

외사립을 하루종일 닫아둔 채 개조차도 짖을 일이 없어 너무 밑에서 졸고 있다  너무너무

조용하구나  고요의 극치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졸고 있는 개의 머리 위로 펄펄 꽃잎이

떨어진다  정중의 동이다  조용히 떨어지는 꽃잎의 움직임이 있어, 이 숨막힐 듯한 고요가

더욱 고요해지고 한결 맑아진다.



    137. 내 한낱 산깁 적삼 첨부이미지

                                    정철


  내 한낱 산깁 적삼 빨고 다시 빨아

  되나된 볕에 말리고 다리고 다려

  나는 듯 날란 어깨에 걸어 두고 보소서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산깁 적삼: 산뜻한 생명주(생견)로 지은 적삼  적삼은 홑저고리

  날란: 날씬한


  -- 감상

  한 벌의 산뜻한 생깁 적삼을, 정성드려 빨고 또 빨아, 세디센 여름날 햇볕에 말려, 정성껏

다리고 또 다려서,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이 날씬한 그 어깨에다가 걸어 두고 보시오

  하얗게 빨아서 잘 다름질한, 잠자리 날개같이 산뜻한 생명주 적삼을 어깨에 걸친(답답하게

입은 것이 아니라 가볍게 걸친 것이다)미인의 날씬하고도 세련된 몸매가 눈에 선하다  한 폭의

인물화, 미인화가 틀림없구나.



    138. 논밭 갈아 기음매고 첨부이미지

                                   신희문


  논밭 갈아 기음매고 돌통대 기사미 피워 물고

  콧노래 부르면서 팔뚝춤이 제격이라

  아이는 지어자 하니 허허 웃고 놀리라


  -- 지은이: 신희문(연대 미상)

  자는 명유  시조 14수가 전한다


  -- 말뜻

  돌통대: 대통을 흙이나 나무 따위로 만든 담뱃대

  기사미: 잎담배를 썰어서 만든 것을 말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카자미'라는 일본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 시조는 많은 의문점을 안고 있다  지은이의 신원조차 분명치 않으니 더욱 그렇다

출전은 최남선 본 '청구영언'이다

  팔뚝춤: 팔춤  팔뚝을 주로 놀리면서 추는 춤인가 보다

  지어자 하니: 지화자 하고 흥을 돋우니

  허허하고: 허의 원음은 '후'이고, 속음은 '허'이니, '허허' 또는 '후후'하는 웃음소리의

의성어이다


  -- 감상

  농민들의 즐거운 행락 장면의 한토막 같은, 흥겨운 농촌 풍경이다

  논밭의 기음매가 끝났다  돌통대에 기사미 담배 피워 물고 콧노래 부르면서 얼씨구 팔뚝춤이

제격이로구나  곁에서는 '지화자 좋다'로 흥을 돋우니 웃음 보따리가 터져 나온다

  이런 한때가 있음으로 해서 고된 농사일도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농요가 있고, 농악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일들을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이 선명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니, 그것으로

이 시조는 제구실을 독톡히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가벼우면서도 흐믓한 감동을 던져 주는

가작이다.



    139. 늙은이 저 늙은이 첨부이미지

                                 안민영


  늙은이 저 늙은이 임천에 숨은 저 늙은이

  시주가 금여기로 늙어 오는 저 늙은이

  평생에 불구문달하고 저로 늙는 저 늙은이


  -- 지은이: 안민영  104. 참고

  -- 말뜻

  임천: 숲과 샘이니, 산림천석으로 은사가 숨어 사는 곳

  시주가: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노래 부름

  금여기: 거문고와 바둑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는, 늙은이의 고상한 취미 생활

  불구문달: 명성이 널리 알려지기를 구하지 아니함


  -- 감상

  늙음을 한탄하기만 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그 늙음을 즐기는 인생도 있어 퍽이나

대조적이다  늙으면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따라서 '외로움'이라는 것이 늙은이의 인생을

괴롭히게 마련이다  그 고독을 어떻게 달래느냐, 그 고독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노후의

행, 불행이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 같다  시와 술과 노래와 거문고와 바둑 등,

이만한 수준의 취미를 가졌다면 능히 그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불구문달"의

인생관이 서 있다면 늙음이나 죽음도 오히려 즐거울 것이다

  취미가 다양한 사람은 노후의 고독을 덜 느낀다  주체 못할 정도로 남아도는 시간과 무료를

취미 생활을 하면서 달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확실한 생활을 가지고 있는 사람(예컨대 음악가,

화가 등의 예술인이나 취미산업의 경영자 등)이 일반적으로 장수를 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취미는 젊어서, 적어도 30__40대까지에는 길러 두어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140. 다만 한간 초당에 첨부이미지


  다만 한간 초당에 전통 걸고 책상 놓고

  나 앉고 님 앉으니 거문고는 어디 둘꼬

  두어라 강산풍월이니 한데 둔들 어떠리


  -- 감상

  초라한 한 간짜리 오막살이  전통('전동'의 원말  화살을 넣어 두는 통)은 벽에다 걸어 놓고,

바닥에 책상을 놓고 나 앉고 님이 앉으니 거문고 놓을 곳이 없구나  에라, 나는 강산풍월

주인(자연을 벗삼고 사는 인생)이니, 강산풍월을 노래하는 거문고야 바깥에 놓아 둔들 어떠하랴?

안빈낙도하는 풍류객의 매인 데 없는 생활이 눈에 선하다

  무예의 상징인 화동개, 글 읽어 지식과 도덕을 닦는 책상, 예술, 풍류를 익히는 거문고뿐,

장농, 옷걸이, 밥상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구나  옛선비의 글을 읽고, 사람의 도리를 배우고,

무예와 풍류를 익히어 고차원적인 인생을 탐구하는 생활을 노래했다  그것을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하였으니 얼마나 즐거웠으랴

  옛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의 본질을 외면하지 않고 살려고 하였다  이 점은 현대인도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41. 달이 두렷하여 첨부이미지

                                이덕형


  달이 두렷하여 벽공에 걸렸으니

  만고풍상에 떨어짐직 하다마는

  지금 취객을 위하여 장조금준 하노매


  -- 지은이: 이덕형(1561-1613)

  자는 명보, 호는 한음  선조 13년 나이 갓스물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항복, 이정립 등과 함께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며, 서른 살에는 이미 벼슬이 예조참판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임진란 수습에 힘써 영의정에 올라, 호성, 선무 공신이 되었다  어렸을

대는 이항복과 특히 절친하여 기발한 장난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글씨를 잘 썼다


  -- 말뜻

  두렷하여: 둥글어서  '밝다'는 뜻도 들어 있다

  벽공: 맑고 높은 푸른 하늘

  만고풍상: 비바람, 서리 등을 겪은 오랜 세월

  장조금준 하노매: 아름다운 술통을 오래도록 비추어 주는구나!


  -- 감상

  휘영청 밝은 달이 높푸른 하늘에 둥그렇게 걸려 있구나  비바람 겪어오는 오랜 세월 동안에

어쩌면 떨어짐직도 하건마는,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하늘 위에 높이 떠서 오늘까지

술취한 나그네를 위하여 이렇게 이 좋은 술통을, 이 흥겨운 자리를 훤하게 비추어 주는구나!

  달 아래에서 베풀어지는 술자리는 한결 흥이 솟는 법, 그것이 허물없이 친구와의 것이라면

더더욱 흥겨운 것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이태백은 달까지도 좋아하였는가 보다

  다음의 시조가 그것을 말해 준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이백이 기경비 상천 후이니 눌과 놀러 밝았는다

  내 역시 풍월지호사이라 날과 놔이 어떠니.



      142. 녹양이 천만산들 첨부이미지

                                  이원익


  녹양이 천만산들 가는 춘풍 매어 두며

  탐화봉접인들 지는 꽃을 어이하리

  아무리 사랑이 중한들 가는 님을 어이리


  -- 지은이: 이원익(1547__1634)

  자는 공려, 호는 오리  광해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 선조 임금을 호위하여 공신이 되었다  폐모론에 반대하다 홍천으로 귀양갔으나,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 말뜻

  녹양: 푸른 버들

  천만사: 천가닥 만가닥이나 되는 많은 실  버드나무의 늘어진 많은 실가지를 뜻한다

  탐화봉접: 꽃을 찾아 다니는 나비  탐은 즐긴다는 뜻


  -- 감상

  버드나무의 푸른 실가지가 천가닥 만가닥인들, 지나가는 봄바람을 어이 붙들어 맬 수 있으며,

꽃을 찾아 다니는 벌나비인들 지는 꽃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봄이 가고 꽃이 지는 것은

조물주의 조화요, 대자연의 섭리이다  그러니 인간의 사랑이 제아무리 중한들 뿌리치고

떠나가는, 혹은 세상을 버리고 가는 님을 어떻게 할 도리가 있겠는가

  지은이는 인품이 대쪽같이 곧아서 의절을 굽히는 일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에, 어진 재상

유성룡을 정인홍 등이 모함하는 것을 영의정인 그가 적극 변호하다가 파직된 일이 있으며,

또 광해군의 폐모를 반대하여 귀양도 갔었다  그러면서도 인조반정 후에 폐위된 광해군을

처형하려는 논의에도 극력 반대하였다  천명을 거스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그의 인생관이다

지은이의 너그러운 사람됨을 이 시조에서 역력히 읽을 수 있지 않는가.



      143. 대막대 너를 보니 첨부이미지

                                    김광욱


  대막대 너를 보니 유신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 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 뒤에 섰다가 날 뒤세우고 다녀라


  -- 지은이: 김광욱(1580__1656)

  자는 회이, 호는 죽소  광해군 5년 병조정량으로 있을 때에 박응서의

옥사에 연좌,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나오지 아니하였다 하여 파직되어, 고양 행주에서 10년

동안 숨어 살다가, 인조반정 후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에 '죽소집'이 있고, 연시조

'율리유곡' 14수가 있다


  -- 말뜻

  대막대: 대나무 막대기  아이들 적에는 대말(죽마)이 되고, 늙어서는 대지팡이(죽장)가 되는

막대기

  유신하고: 신의가 있고  믿음직하고

  이제란: 이제는


  -- 감상

  지은이의 호가 죽소인 것으로 미루어서도 그는 대를 몹시 좋아했나 보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대, 사철을 한결같이 푸른 대는 옛부터 지사의 절개에 곧잘 비유되었다  결이 곧아서 쭉쭉

곧게 쪼개져 나가는 것에서 '대쪽 같은 성품'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다  그 대를 어린 시절에는

대말을 만들어 말놀이를 하고, 늙어서는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의지하고 다닌다  죽장망혜로

산천을 유람할 때도 대는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대는 인생의 반려가 되었다  '율리유곡'

주의 한 수이다.



    144. 대 심어 울을 삼고 첨부이미지

                                   김장생


  대 심어 울을 삼고 솔 가꾸니 정자로다

  백운 덮인 데 나 있는 줄 제 뉘 알리

  정반에 학 배회하니 긔 벗인가 하노라


  -- 지은이: 김장생(1548__1631)

  자는 희원, 호는 사계  일찍이 율곡에게 성리학을 배웠고, 예학에 밝아

'의례문' 8권, '가례집람' '상례비고' 등 예법에 관한 저서와 기타 많은 저작을 남겼다

인조 정묘호란 때에 양호호소사로 군량미 조달에 공이 있었다


  -- 말뜻

  정자: 경치 좋은 곳에, 놀기 위하여 세운 작은 집  벽과 문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서는

살고 있는 집의 뜻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정반: 뜰 가

  배회하니: 한가로이, 별 목적없이 왔다갔다 하니  바장이니

  긔: 그것이


  -- 감상

  대나무를 심어서 집의 울타리를 삼고, 소나무를 잘 가꾸었으니 낙락장송이 정자로구나  그것이

내 집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어쨌든 대와 솔은 사시상청의 군자나 지사를 상징하는

나무임에 틀림없다  흰구름이 두둥실 떠도는 깊은 골짜기에 내 집이 있으니, 내가 여기에

있는 줄 그 누가 알 것인가  그리고 뜰 가에는 점잖은 학이 한가로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그것이 둘도 없는 나의 벗인 것이다  속세를 떠나서 자연을 벗하고 산다는 것이 곧 이런 생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좀더 구체적으로 상고해 보자  조선 예학의 주류이며, 문하에 송시열, 송준길 같은 학자를

낸 기호학파의 시조인 지은이가 계축옥사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연산에서 학문을 닦으면서

지내던 시절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선명한 형상화가 가능할 것 같다.



    145. 대추 볼 붉은 골에 첨부이미지

                                   황희


  대추 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듣들으며

  벼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내리는고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닌 아니 먹고 어이리


  -- 지은이: 황희  126. 참고

  -- 말뜻

  듣들으며: 원형은 '듣듣다, 듣다'로서, 큰 빗방울이나 알밤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체 장수: 체를 파는 장수  체는 막걸리를 거르는 데 안성맞춤이 아니겠는가


  -- 감상

  대추가 빨갛게 익은 골짜기에 알밤이 뚝뚝 떨어지고, 벼를 베어 낸 그루터기에서는 살찐

게가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이렇게 풍요로운, 이렇게 입맛을 돋구는 가을날에 집에서 빚어

놓은 술이 막 익었는데, 체 장수가 때마침 지나가니 세 체로 새 술을 걸러 게를 삶아 안주하여

먹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가을 농촌의 풍성하고 흥겨운 정경을 담담히 그린 멋있는 작품이다.



      146. 동창이 밝았느냐 첨부이미지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 지은이: 남구만(1629__1711)

 자는 운로, 호는 약천  숙종 때에 영의정을 지냈다  처사에 사사로움이

없고, 매사를 공의에 따랐다  문하에 글 배우는 선비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 말뜻

  동창: 해돋는 동쪽으로 난 창문

  노고지리: 종다리  종달새

  우지진다: 우짖는다  지저귄다

  소치는 아이놈은: 소 먹이는 아이는

  재 너머: 고개 넘어  '너머'는 곳을 가리키는 명사  '넘어'는 동사이니 구별해서 쓰게 되어

있다

  사래 긴 밭: 이랑이 긴 큰 밭

  하나니: 하느냐?


  -- 감상

  동창이 다 밝았느냐  하늘에서는 벌써 종달새가 떠서 지저귀는구나  그런데 소 먹일 아이놈은

아직도 아니 일어났느냐  농촌의 봄은 바쁘기 이를 데 없는 철이 아니냐  늑장을 부리다가 재

너머에 있는 큰 밭은 언제 다 갈려고 그러느냐  어서어서 일어나서 빨리빨리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다

  봄을 맞이한 농촌의 즐거운 비명이라고나 할까  생동하는 농촌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종달새는 옛부터 부지런한 새로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이른 새벽부터 창공에

높이 떠서 명랑한 노래를 지저귄다  아름다운 농촌의 명랑한 새아침의 풍경이

생동한다  그래서 이 시조가 옛부터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널리 애송되어지는

것이리라.



    147. 매아미 맵다 울고 첨부이미지

                                   이정신


  매아미 맵다 울고 쓰르라미 쓰다 우네

  산채를 맵다는가 박주를 쓰다는가

  우리는 초야에 묻혔으니 맵고 쓴 줄 몰라라


  -- 지은이: 이정신(자세한 연대미상)

  자는 집중, 호는 백회재  조선 영조 때의 가인으로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시조 13수가 전한다


  -- 말뜻

  매아미: 매미

  쓰르라미: 참매미 비슷한데 몸집이 작고, 저녁 무렵에 풀밭에서 애처롭게 운다

  산채: 산나물  산에서 나온 나물

  박주: 변변치 못한 술  술을 낮추어서 말할 때에 쓰는 말

  초야: 시골의 궁벽한 곳  벼슬을 안하고 시골에서 사는 것을 초야에 묻힌다고 한다


  -- 감상

  매미는 매암매암 맵다 울고, 쓰르라미는 쓰르람스르람하며 쓰다고 운다  고추 양념의

산나물을 맵다고 하느냐, 텁텁한 막걸리를 쓰다는 것이냐  우리는 궁벽한 초야에 묻혀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매운지 쓴지 모르고 달게 먹으며 살고 있단다

  속세를 떠난 듯 세속적인 고락을 초월하고, 또 세속적인 부귀와 영화를 한바탕의 꿈으로

돌린 채, 얽매인 데 없이 유유히 소박한 삶을 즐기던 옛사람의 담담한 생활 철학이 돋보이는

느낌이다

  매미와 쓰르라미의 소재도 좋거니와 그 울음 소리의 비유가 묘를 이룬다.



    148. 물 아래 그림자 지니 첨부이미지

                                     정철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 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 보고 가노매라


  -- 지은이: 정철8. 참고

  -- 말뜻

  물 아래: 다음의 "다리 위"와 댓구를 이루는 것인데, 다리 아래에 흐르고 있는 물이라는 뜻이다

  막대로: 막대기로  지팡이로  스님이 짚고 다니는 긴 지팡이를 석장이라 부른다  일종의

무기로도 썼다

  가노매라: 가는구나!  '__노매라'는 감탄형 종결어미


  -- 감상

  다리 밑의 물에 그림자가 지기에 다리 위를 쳐다보았더니 한 사람의 스님이 지나간다  스님,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어디로 가는 길이오?하고 물었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석장을 들어

하늘에 뜬 흰구름만 가리키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더라

  하늘에 둥실 떠 있는 흰구름과도 같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선사를 가리켜 '운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다리 위의 중'이 어쩌면 '관농 풍경을 잘

아는 선사'일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더욱 좋겠다  '무애가'를 부르면서 매인 데 없이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다는 원효대사의 모습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처님의 길을 바로 깨달은 원효대사가 스스로를 비승비속이라 일컬으면서 자유인의 극치를

살았던 것과 운수 행각에 무슨 관련이 있었을까  우주의 진리가 자연 속에 있다면, 자연 속을

헤맨 그 생활은 진여의 세계를 편답한 것이 아닐까?  자연 중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에는 진여가

더 많이 차 있을 것만 같다.



      149. 백구야 놀라지 마라 첨부이미지


  백구야 놀라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라

  성상이 버리시니 갈데 없이 예 왔노라

  이제란 공명을 하직하고 너를 조차 놀리라


  -- 감상

  노랫가락으로도 흔히 불리는 시조다  인간 세상의 부귀나 공명이니 하는 것을 다 잊어 버리고,

강호에 숨어서 백구를 벗하고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즐길 수 있는 노인은 참으로 행복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런 사람에게는 노후의 고독이라는 것도 자연히 해소가 될 것이 아닌가

여가 선용이라는 것도 꼭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낡은

표현이지만 이런 것을 '정신수양'이라고들 말한다.



      150. 벼 비어 소에 싣고 첨부이미지


  벼 비어 소에 싣고 고기 건져 아이 주며

  이소 네 몰아다가 술을 먼저 걸러라

  우리는 아직 취한 김에 흥치다가 가리라


  -- 감상

  옛날 우리의 농촌은 이런 멋에 살았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농약도, 화학비료도 없었다  공해도,

오염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미개한 농업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경운기나 트럭 대신 소 등에 볏단을 실었다  그리고 고기는 기를 쓰고 잡지 않아도 된다

건지기만 하면 그만이다  맥주가 맛좋고 편리하다고들 말하지만 걸러서 마신 막걸리의 맛은

더욱 일품이다  그림 같은 옛농촌 생활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시조다

  역시 같은 주제의 시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벼슬을 바리거다 전 나귀로 돌아오니

  새가을 금수정에 여윈 고기 살찌도다

  아이야 그물 던져라 날 보내려 하노라(작자미상)


  벼슬을 버리고 다리 저는 나귀 타고 돌아와 새가을의 살찐 고기 건지면서 세월 보내려는

이 선비!  요즘 세상에서는 틀림없는 낙오자요 낙제생이다  그러나 이 선비는 즐겁기만 하니

웬일인가  생산량은 보잘것없어도 논밭에서 곡식 나고, 물 속에서 고기 얻고, 금수정 아담한

정자 있어 여기서 날 보낼 수 있으니,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풍요를 구가하는 고도 성장의

산업 시대에 살면서도 이런 것에 일말의 향수를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151. 벼슬을 저마다 하면 첨부이미지

                                      김창업


  벼슬을 저마다 하면 농부할 이 뉘 있으며

  의언이 병고치면 북망산이 저러하랴

  아이야 잔가득 부어라 내뜻대로 하리라


  -- 지은이

  김창업(1658__1721)

  자는 대유, 호는 노가재, 석교  아버지 수항과 맏형 창집이 모두 영의정을 지낸 명문을 태어났으나,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동교에 노가재를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맏형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서 '연행일기'를 지었다  그림에도 뛰어나 특히 산수, 인물을 잘 그렸다


  -- 감상

  모든 사람이 다 벼슬을 하면 누가 농부를 할 것이며, 의원이 병을 다 고친다면 북망산이

저렇게 올망졸망할 것인가  벼슬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좋아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관심 밖의 일이다  죽고 삶도 하늘에 달린 것이니 아이야, 어서 잔 가득 술이나 부어라

실컷 마시면서 전원 생활에서 인생을 즐겨 보리라

  명문 가정의 법도에 얽매인 생활을 박차고, "내 뜻대로" 자유로이 살아 보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엄격하기 그지없던 옛봉건 사회에도 개성의 자유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인가?


.

    152. 벽오동 심은 뜻은 첨부이미지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터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가지에 걸렸에라


  -- 감상

  벽오동(줄기가 푸른 빛이 나는 오동나무)을 심으면 봉황이 와서 집을 짓는다고 하기에 심어

놓았는데도, 박복한 내가 심어서인지 기다리는 봉황은 오지 않고, 깊은 밤중에 한조각 밝은

달만이 빈 가지(잎이 다 떨어져 버린 쓸쓸한 가지)에 덩그랗게 걸려 있구나!

  '봉황을 보려던' 화려하고 가슴 뿌듯했던 기대와 '빈 가지에 걸려 있는 일편명월'은 너무나

대조적으로 외롭고 쓸쓸하다  '벽오동'과 '봉황' '일편명월'의 어감이 이 시조의 리듬을 경쾌,

장엄으로 장식하고 있다  가요 가사에도 자주 인용된 표현이다.



      153. 보리밥 풋나물을 첨부이미지

                                  윤선도


  보리밥 풋나물을 알맞추 먹은 후에

  바위 끝 물가에 슬카지 노니노라

  그남은 여남은 일이야 부럴 줄이 있으랴


  -- 지은이: 윤선도  110. 참고

  -- 말뜻

  풋나물;풀과 나뭇잎의 연한 싹을 뜯어서 만든 나물

  슬카지: 실컷

  노니노라: '노닐다'는 '놀다'와 '니다'의 복합동사로, '__노라'에서 노는 동작이 계속되는

것을 뜻한다

  그남은: 그 밖의

  여남은: 그 밖의 다른

  부럴 줄이: 부러워할 것이


  -- 감상

  보리밥을 풋나물 반찬으로 알맞게 먹은 뒤에 시냇가로 나가서 큰 바위 끝 물가에서 실컷

노는 것이 나의 하루의 생활의 전부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부러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귀영화도 호의호식도 다 관심 밖의 일이라는 뜻이다  벼슬에도 별로 뜻이 없고, 강호에 숨어서 자연을 벗삼고 안빈낙도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보리밥을 풋나물에 알맞추 먹고(고량진미를 포식하지 않는다), 바위 끝 물가에서 노닐기를

실컷한다'  그 밖이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고산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을

실천하였다  현대인 중에서 고량진미를 포식하고, 노닐기(운동이나 활동)는 적게 하며, 마음은

언제나 욕구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틀림없이 비만이다 혈압이다 당뇨다 하고 성인병에 시달린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면서도, 공해 속에서 동물적인 본능 충족에 여념이 없는 현대인, 보약이라면

별의별 것을 다 먹어치우는 현대의 일부 부유층의 생활 태도와 옛사람의 이 생활 태도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일부에서 '자연식'을 강조하는 일도 결국은 옛사람의 이 방법을 따라 보자는

것이 아닐까?  이래서 문명과 원시는 함수관계에 있는가 보다.



    154. 비오는데 들에 가랴 첨부이미지

                                     윤선도


  비오는데 들에 가랴 사립 닫고 소 먹여라

  마이 매양이라 쟁기 연장 다스려라

  쉬다가 개는 날 보아 사래 긴 밭 갈아라


  -- 지은이: 윤선도  110. 참고

  -- 말뜻

  사립: 사립문(시비)  대, 싸리 따위로 엮어서 만든 간단한 대문짝

  마이: 장마가  '마'는 장마의 옛말

  매양이랴: 늘 그러랴

  쟁기 연장: 논밭을 가는 농기구의 하나

  다스려라: 손질하여라

  사래 긴 밭: 이랑이 긴 큰 밭


  -- 감상

  비 오는데 들일 나갈 것 있느냐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은 사립을 닫고 소나 잘

먹여라  장마가 늘 지겠느냐  오늘같이 비오는 날은 그저 집에서 쟁기 같은 연장이나 잘 손질해

두어라  쉬다가 개는 날을 보아서 이랑 긴 밭을 갈려무나  '산중신곡' 중 '하우요'의 첫째

수이다.



    155. 빈천을 팔랴 하고 첨부이미지

                                  조찬한


  빈천을 팔랴 하고 권문에 들어가니

  치름없는 흥정을 뉘 먼저 하자 하리

  강산과 풍월을 달라 하니 그는 그리 못하리


  -- 지은이

  조찬한(1572__1631)

  자는 선술, 호는 현주  인조반정 때에 형조참의가 되고, 이어 선산부사를 지냈다  문장에 뛰어나고, 시부에 능하였으며, 석주 권필, 동악 이안눌과 절친하였다  그의 형 조위한도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웅대하고 힘이 있었다

  일설에는 유자신이 지었다고도 한다


  -- 말뜻

  빈천: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이 천한 것

  권문: 권세가 있는 집안

  치름없는 흥정;대가를 치르지 않는, 주는 것이 없는 흥정  흥정은 물건을 사고 파는

교섭

  강산 풍월: 강, 산, 바람, 달이니, 자연이 아름다움을 뜻하는 말


  -- 감상

  가난하고 천하게 사는 것이 하도 지긋지긋해서, 그것을 팔아 보려고 돈 있고 권세 있는

집안을 찾아갔더니, 주는 것 없는 흥정, 불리한 흥정을 그 누가 먼저 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도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하필이면 강산풍월과 바꾸자고 하는데,

그것만은 안되겠다  빈천을 못 팔망정 강산풍월을 넘겨 줄 수는 없다  강산풍월만은 돈이나

권세와도 바꿀 수가 없다  옛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풍월주인'이라고 불렀다

  빈천과 부귀영화, 권문세가에서 빈천을 사려고 할 리가 없다  그러나 강산풍월만은 그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다  빈천을 안고 살아도 강산풍월이면 된다는 사람, 요즘에는 별로

없겠지만 지난날의 우리 선인들은 그것을 낙으로 삼았다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복 받은

풍토가 그렇게 시킨 모양이다.



      156. 산가에 봄이 오니 첨부이미지

                                    이정보


  산가에 봄이 오니 자연히 일이 하다

  앞내에 살도 매며 울 밑에 외씨도 빠고

  내일은 구름 걷거든 약을 캐러 가리라


  -- 지은이이: 정보  96. 참고

  -- 말뜻

  산가: 산촌의 농가  시골집

  외씨: 오이씨

  빠고: 뿌리고

  약: 약초를 말한다


  -- 감상

  산골 농가에 봄이 오니 일손이 몹시도 바빠진다  앞 내에는 고기잡이 어살도 매어 놓아야겠고,

울밑에는 오이씨도 뿌려야 하겠으며, 내일 날이 개거든 약초도 캐러 뒷산으로 가야 한다  봄을

맞은 농가의 생동하는 모습이 즐겁기만 하구나!  126번, 146번 시조 등과 아울러 음미해 보라

지극히 한국적인 옛농촌 풍경이 너무도 목가적이 아니냐  평화 바로 그것이로다!  계절적

배경이 봄이라서 더우 그런지도 모른다.



    157. 산 밑에 사자 하니 첨부이미지


  산 밑에 사자 하니 두견이도 부끄럽다

  내 집을 굽어 보며 솥 적다 우는고야

  저 새야 세간사보다는 그도 큰가 하노라


  -- 말뜻

  두견이: 두견새  소쩍새

  솥 적다: 숱이 작다고(가난하다고)  소쩍소쩍하고 우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솥 적다'라고

희화화하였다

  세간사: 세상일  여기서는 살림살이의 뜻이다  살림살이에 비해서는 오히려 솥이 크다는 것


  -- 감상

  산밑에서 살려고 하니(산골에 은거한다는 뜻) 소쩍새가 부끄러워 못 견디겠구나!  그놈이 내

오막살이를 내려다보면서 '소쩍소쩍' 지저귀는 것이 마치 솥이 작다, 너무 가난하다고 비웃는 것

같기만 하구나!  소쩍새야, 너는 솥이 작다고 걱정하지만 우리 살림살이에 비해서는 이 솥도

오히려 크다고 생각한다

  소쩍새 우는 호젓한 시골에 살면서, 그 울음 소리를 자신의 안빈낙도하는 생활에다가 일치시킨

재치가 매우 기발하다  주인공은 소쩍새도 비웃는 그 가난이 즐겁기만 하다는 태도로구나

'안분지족'의 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158. 산촌에 눈이 오니 첨부이미지

                                   신흠


  산촌에 눈이 오니 돌길이 묻혔에라

  시비를 열지 마라 날 찾을 이 뉘 있으리

  밤중만 일편 명월이 긔 벗인가 하노라


  -- 지은이: 신흠  52. 참고

  -- 말뜻

  시비: 사립문  대나 싸리 따위로 간단히 엮어서 만든 대문짝

  밤중만: 밤중쯤  종장 첫머리에 감탄사격으로 쓰인다

  일편명월: 직역하면 한 조각의 밝은 달인데, 조각달이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일편은 일종의

수식어로 보아도 무방하다  굳이 뜻을 포함시킨다면 '홀로, 외로운' 따위의 뜻이 있다

  긔: 그것이  그(대명사)와 이(주격 조사)가 합쳐서 이루어진 말이다


  -- 감상

  산마을에 눈이 내리니 골짜기이 돌길이 온통 눈에 덮여 버렸구나  사립문을 열어서 무엇하리

더욱이 오늘 같은 날 찾아올 이가 뉘 있겠는가  고요한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저 달만이 내

벗이로다

  외로운 산길마저 눈 속에 파묻혀 버린 산마을, 찾아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 사립문마처 닫아

버린 산방, 겨울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푸르고 찬데, 거기에 외로이 떠 있는 둥근 달이야말로

고요의 극치요, 한 폭의 동양화 그것이다.



    159. 삿갓에 도롱이 입고 첨부이미지

                                    김굉필


  삿갓에 도롱이 입고 세우중에 호미 메고

  산전을 흩매다가 녹음에 누웠으니

  목동이 우양을 몰아 잠든 나를 깨우도다


  -- 지은이: 김굉필(1454__1504)

  자는 대유, 호는 한훤당  김종직 문하의 수재  젊었을 때 성품이 호탕 방자하여서 사람들이 그를 피할 정도였으나, 일단 성리학에 뜻을 두고 학문에 몰두하게 되자 사람이 달라지고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무오사화에 연좌하여 죽었다  그의 문하에서 조광조 등 큰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중종 때 우의정이 추증되었다


  -- 말뜻

  삿갓: 갈대 따위를 쪼개어 펴 가지고 엮어서 만든, 주로 비올 때 머리에 쓰던 넓고 큰 갓의

한 가지

  도롱이: 짚 따위로 엮어서 비올 때에 걸치던 비옷의 한 가지

  세우중에: 가랑비 내리는 속에

  산전: 산에 있는 밭

  흩매다가: 흩어 매다가  호미질하다가

  우양: 소와 양(염소)


  -- 감상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입고(빗속에서 일하던 옛농군들의 차림새다), 가랑비가 촉촉히 내리는

속을 호미 들어 산중에 있는 밭을 바삐 매다가, 이제는 나무 그늘에 누워서 쉬노라니, 어느덧

잠이 든 모양이다  얼마 동안이나 잤는지 목동이 몰고 가는 소와 염소의 울음 소리에 문득

잠이 깨었다

  이것이 본격적인 농민의 생산 활동이냐, 아니면 전원에 은거하는 선비의 여가 활동이냐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대신 삿갓에 도롱이 입고 호미 놀려 기음매는 농부의 모습과 정자나무

그늘에 누워서 풋잠이 든 농부와, 우양을 몰고 가는 목동을 목가적으로 연상하면, 이 시조의

감상은 만점이라 하겠다.



      160. 새원 원주 되어 첨부이미지

                                 정철


  새원 원주 되어 도롱 삿갓 메고 이고

  세우사풍에 일간죽 빗기 들어

  홍료화 백빈주저에 오명가명 하노라


  -- 지은이: 정철  8. 참고

  -- 말뜻

  새원: 신원의 원이름  경기도 고양군에 있던 역원

  원주: 역원에서 살면서 지키는 벼슬아치  송강은 한때 이 벼슬에 있었다

  도롱 삿갓: 비올 때에 어깨에 걸치던 도롱이와 머리에 쓰던 삿갓

  메고 이고: 도롱이는 걸치고 삿갓은 쓰고

  세우사풍: 가는 비(보슬비)와 비스듬히 불어오는 바람

  일간죽: 한 개의 낚싯대

  홍료화: 붉은 여뀌꽃  냇가에 많이 나는 풀이다

  백빈주저: 흰 마름이 우거진 물가

  오명가명: 오며가며  오락가락


  -- 감상

  송강이 부모의 산소를 모시고, 경기도 고양군 새원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살던 때의

생활의 모습이다  환경에 나를 적응시켜 유유자적하는 송강의 모습이다  이쯤되면 새원

원주도 어울리지만, 이 자연을 즐기는 생활 태도도 한결 돋보인다

  다음의 시도 그때의 노래이다


  새원 원주되어 시비를 고쳐 닫고

  유수 청산을 벗삼아 지냈노라

  아이야 벽제의 손이라커든 날 나가다 하고져


  찾아온 손님이 벽제에서 세속 일로 찾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나가고 없다고 하라고 했으니,

시류를 배척하는 그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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