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나의 추억
라즈니쉬와의 만남
홍신자
정신세계사_단기 4326년 8월 9일 (1993)
1. 나를 부르는 인도
1) 나를 부르는 인도
물질적 풍요는 반작용으로 히피의 방황과 자유를 낳았다. 그것은 당신 미국 사회의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었다. 동성연애자들은 사회를 향해 자기들을 인정하고 이성간의 연애자들과 동등하게 취급할 것을 요구하며 들고 일어섰다. 관념들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외형에서 오는 그럴듯한 것을 부정하는, 내용 있는 실속과 진짜를 부르짖고 있었다.
2) 한국 무대에 올린 전위무용 <제례>
73년 9월, 황병기 씨의 주선으로 '국제 현대음악협회(ISCM)' 주최 첫 귀국공연을 갖게 되었다. 공연 후 무대 뒤로 무용계의 몇몇 인사와 수십 명의 관중이 몰려와 감동을 표시하며 격려해주었다. 그러나 막상 극장 문을 나설 때는 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누구 나와 차 한 잔 마시자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무용가 홍신자와 순간만을 나누었을 뿐, 인간 홍신자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절정 끝의 허무와 고독을 끌어안고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7년간 쓸어 모아온 팽팽한 에너지를 일순간에 발산해버린 후의 허탈... 나는 방 기둥을 붙잡고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도 소중히, 남몰래 아끼고 가다듬었던 내 영혼의 아기를 멀리 떠나보내 버린 심정이었다. 기대치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공연도 대성공이었는데 충만된 마음은 아니었다. 허전하고, 외롭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루 빨리 돌아가자... 나를 평범한 군중 속에 묻어 버릴 수 있는 곳으로. 나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달이 집세를 걱정하고, 운동화 바람으로 뛰어다니고, 샌드위치 하나를 싸들고 전철을 기다리던, 그리고 그 속에서 덜컹거리며 그것을 베어 물던, 돋보일 것도 없는 가난한 전위예술가로, 이름없는 자유인으로, 대도시 뉴욕,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 여자 한 명에게 무심한 뉴욕 바닥, 나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거기서 나는, 내가 가야할 다음 길을 찾기 위하여 나를 돌이켜 보리라. 그것이 무엇인지, 어딘지도 모르지만...
3) 이상한 체험
샴은 우리 몸에 있다는 일곱 개의 에너지 센터인 차크라(chakra)의 위치와 기능에 대하여 설명을 들려주었다. 우리 대부분의 인간은 그 에너지 중심이 막혀 있다. 특별히 마련된 사운드로써 마비된 그것을 일깨워 열리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고, 생활의 질도 높일 수 있다.
이 우주에는 우주의 소리가 있다. 나다(nada)라고 한다. 현대의 시끄러운 기계 문명 속에서 생활하는 자로서는 그 소리를 듣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아주 깊은 산 속이나 광야에 가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 소리에 열중하면 이 우주의 원리까지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테이프가 틀어졌다. 그리고 샴의 손가락이 나의 척추를 아래로부터 위로 부드럽게 누르며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내 몸의 어느 부분에서 어떤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지 감지해 내는 중이었다. 나의 어느 차크라가 닫혀 있고 또 열려 있는지 그의 손끝에서 판별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소리를 들었다. 탐블라 같은 현악기의 탄주음이 뒤섞인 묘한 소리, 우주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소리는 내 몸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던 소리와 동조를 일으켜 함께 울려나오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누가 어떻게 저러한 소리를 만들어낸 것일까?
"해가 뜨기 전이 중요합니다. 아직 순수한 지구의 에너지를 수용해야 하거든요. 잠자리에서 깨면 우선 맑은 물을 마시고, 그 시간을 이용해서, 목욕을 하고, 요가를 하고, 소리를 듣는 명상을 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인 뒤에 그는 아침에 들을 명상음악, 야채와 곡식, 식물의 종자 등으로 이루어진 앞으로 일주일간의 식단 등을 제시했다.
4) 샴의 집단면담
회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샴의 그룹면담은 매주 목요일 저녁 두 시간씩, 12주를 한 주기로 진행된다. 면담이라곤 하지만 거의 그가 강의하고 우리는 그것을 듣는 식이다. 목요일마다 듣는 그의 강의 내용은, 우리 생활과 늘 같이 하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거나 전혀 모르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호흡'이 그 한 예다. 사람의 콧구멍은 두 개지만, 숨쉴 때 사용되는 것은 언제나 한쪽 뿐이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하루에 양쪽 콧구멍을 통하여 동시에 숨이 드나드는 것은 불과 몇 분밖에 안 되는 짧은 순간이다. 그 순간은 극적이고 예민한 것이어서, 그때에 사고나 죽음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그 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면 명상의 높은 경지에 이를 수도 있다. 숨이 어느 쪽으로 드나드는가를 유심히 살펴 조절을 하면 아들 딸을 선별해 낳을 수도 있다. 몸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죽음이 얼마 후에 찾아올 것인지 정확한 시간까지 뽑아낼 수도 있으며, 이것이 이론으로 이미 정립되어 있다고도 했다. 머리카락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면 7개월, 오줌을 자주 누는 현상이 계속되면 6개월, 왼쪽 콧구멍으로만 계속 숨을 쉬고 있다면 6개월, 이런 식이다. 마지막 내뿜는 숨은 차갑다는 등 그밖에도 수백 개의 예가 언급되었다. 아무튼 우리가 일생 동안 연구해도 풀지 못할 신비로운 얘기들을 그는 하루 저녁에 다 말하곤 하였다. 그의 얘기에 따르면, 이 모든 지혜가 이미 몇 천 년 전에 산스크리트(Sanskrit) 언어로 다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는 약 50개의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상징은 우리의 각기 다른 의식과 연관된다. 모든 만트라(mantra, 주문)가 이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 언어가 기록하고 있는 신비로운 사실들은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모두 밝혀내지는 못한다.
초승달이나 보름달이 돋는 밤이면, 우리는 그 달의 힘을 우리 몸과 조화시키기 위해 단식을 하거나 주스, 물 같은 것만을 마시고서, 모여 앉아 명상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 때면 인도의 경건한 음악을 듣거나, 얀트라(yantra)를 그리는 것이 우리의 명상이다. 얀트라란 우리 두뇌의 오른쪽과 왼쪽 부분의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려진 특수한 형상, 또는 그것을 통한 명상을 말한다. 밑그림 위에 우주의 행성을 각각 상징하는 색을 입히기도 하고, 다시 밑그림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 밖에도 지구의 소리, 가장 원초적인 소리라는 옴 사운드(Aum sound)를 발성하거나, 여러 종류의 경건한 음악을 듣거나 배우곤 하였다, 샴이 어느 날 우리에게 들려준 아침을 위한 명상음악은 내 영혼을 사로잡고 말았다. 그것은 카루나지(Karunajee)라는 인도 여인이 부른 종교적인 송가였다. 오직 신에게 바치는, 신을 찬양하고, 신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런 음악 형식을 '경건한 음악(devotional music)'이라고 한다. 이런 소리는 오직 처녀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50대지만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처녀였다.
5) 억압 속에서 저항을
"전위무용이란 실험예술이라는 것, 실험이란 기이하다거나 테크닉만이 아니고 땀흘려 모아온 철학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무용이 율동만이 아니라 동작, 소리, 언어, 음악, 극적인 것 등 찰나의 존재성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표현 소재로 다듬어 시간과 공간 속에 종합예술로서 영속시킬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예술을 위한 실험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어둠 속에서 진리의 순수한 빛을 찾고, 분식 속에서 본능을 긍정하고, 억압 속에서 저항을 지향하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75년 <공간>지 초청 공연의 인사말이었다.
6) 인도에 도착하다
나의 몸을 미국으로, 한국으로, 마침내 인도로 이끌고 온 그 의지, 그 원천, 그 부름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내 몸을 굽어보았다. 나의 몸이 객관적인 대상처럼 무한히 멀게 보였다. 문득 그 몸을 보고 있는 것이 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순간 별빛과 같은 작은 빛이 내 머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7) 환상은 걷히고
나는 갑자기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아처럼 처연해졌다. 나라도 정부도 국경도 없는 막막한 황야에 단 하나의 존재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자,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저절로 솟구쳤다. 이대로 모든 것을 떨치고 내가 사라져 버린다면... 모든 것에 대해 무심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태양이 마지막 붉은 기운으로 강가를 물들이고 있었다.
8) 샴의 동료들을 만나
샴의 동지로서 역시 많은 공부를 한 하리쉬가 하르드와에서 멀지 않은 바레일리(Bareilly)에 살고 있었다. 그는 샴이 들려주던 미묘한 음향과 저녁 명상음악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음악가인 동시에 화가요 철학자요 요법학자인 그는 자연과 영적인 음식, 아기를 위한 마사지 법 등 명상에 관한 여러 가지 책의 저자이기도 하다. 여러 방면으로 지식을 쌓았고 또한 재능을 보이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과시하거나, 그것을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추구하는 바는 좀 더 우주적인 삶, 신에 가까워지는 인생을 사는 것으로 모든 것은 이를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나는 뉴욕에서 그의 저녁 명상음악을 자주 들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곤 하였지만, 직접 만나 보니 그의 존재는 마치 날카로운 칼 위에 서 있는 양 의식과 몸이 깨어 있었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힌두 사원으로 나를 안내하였다.
힌두 사원으로 가는 길에 그는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눈다는 것이었다. 첫번째는 태어나서 육체적으로 성장하기까지, 두번째는 교육을 받아 성인이 되기까지, 세번째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기까지, 네번째는 45세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 네번째 단계는 속세를 떠나 오직 종교적인 생활을 위해 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고 했다. 하리쉬는 그래서 자기도 아이들이 다 자란 시점이 되면 히말라야로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사원에 도착하니 마침 저녁 푸자(puja, 예불 같은 의식) 시간이었다. 거기서 바부지라는 60세 가량의 힌두승을 보았는데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리쉬와는 이미 친분이 있는 듯했는데도, 그는 우리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한 채, 온 마음을 바친 듯한 정성어린 손길로 성전의 방들과 마당의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이 곧 신을 모시는 의식이었다. 우리 사이에 말 한마디 오가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그의 눈동자에 어린 촉촉한 물기에서, 내 지금까지의 역사와 현재가 고스란히 무너져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을 느끼는, 자비심이 넘치는 몸짓이었다.
인도 고전음악가 지그디쉬 모한(Jagdish Mohan)
9)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고
나는 다시 붓다가 태어나고, 고행하고, 깨달음을 얻고, 첫 설법을 한 보디가야, 사라나드, 나란다를 차례로 순례하였다. 나란다는 학문이 높은 대학으로 한때 유명하였으며, 그곳에서 2천 년 전 젋은 예수가 7년간 사라졌을 때 이곳에 와서 공부를 하였다는 구전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10) 관능적인 조각품들
인도 중부에 자리잡고 있는 보디가야에서 차로 약 6시간 달리면 넓은 황무지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관능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진 카주라호(Khajraho) 사원들을 볼 수 있다. 벽체를 장식한 이 조각에서 고대 인도 예술의 분방함을 읽을 수 있었다. 주로 남녀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이 조각들은 성애를 예찬하며, 세속 생활의 자잘한 부분까지를 유머러스하게 보여 준다.
바다 저 멀리 보이는 엘리판타(Elephanta) 동굴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봄베이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가량 넘어가면 거기 엘리판타 동굴이 있다. 작은 산만한 크기의 바위를 파낸 동굴 안에는 주로 힌두교의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브라흐마(Brahma, 창조의 신), 비슈투(Vishnu, 보호의 신), 시바(Shiva, 파괴의 신)의 조각들이 있는데 크기는 사람 크기의 몇 배나 되었다. 한때 모슬렘(회교도)의 침해로 많이 폐허가 되고 부서져서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었다.
아잔타 석굴은 웅장한 전경에 벽화가 모두 불교적인 반면, 엘로라 석굴군은 축조된 시기에 따라 각각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 각 종교의 색채가 한데 뒤섞여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11) 동굴에서 만난 여인
마드라스의 한 동굴에서 10년째 살고 있다는 독일 여자... 40대쯤 된 그녀는 몇 년을 감지 않았을 길고 검은 머리를 또아리 틀어 얹엇고, 허름한 살리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마치 신화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행색은 남루하다고 해야 할 것이었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 맑게 빛난다. 동굴 속에는 간단한 침구와 그릇하나,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와 비나(veena)라는 작은 탄주 현악기가 하나 있을 뿐, 일체의 번잡한 물건들이 없었다. 그녀는 화가였다. 그녀는 결코 도피를 위하여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행에 정진하며 자신의 작업도 정열적으로 추구하고 있었다. 해골로 엮은 긴 목걸이를 하고 나신의 형상으로 서 있는 칼리는 보는 사람을 위압하기에 충분하다. 파괴와 정복의 상징이지만, 그녀의 파괴와 정복은 우주의 재창조와 재생을 위한 것이다.
12) 살아 있는 숫처녀 신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신은, 종교는 탄생한 것일까. 사랑이 있는 신, 사랑이 있는 종교라면 어찌 이런 흉포한 죄악의 씨앗을 뿌릴 수 있단 말인가. 수천년 전 자이나교의 성자 마하비라는 평생을 한 움막 속에서 꼼짝하지도 않고 살았다고 한다. 걸음을 옮길 때 개미가 밟혀 죽을 것이 측은해서 말이다.
14) 신은 오직 하나
카루나지는 자기 시간을 쪼개어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서서 온 힘을 다 쓰는 서양식 발성을 배워 온 나로서는 인도식으로 조용히 앉아 하모늄을 키면서, 타블라(북의 일종)로 만들어 내는 복잡한 박자에 맞추어 조용하게 불러야 하는 그것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 격해지는 부분도 없고, 성량을 있는 대로 발휘하는 것도 아니어서 힘이 들 것은 없는데도, 고요하고 은은한 소리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것이다.
2. 안개 속에 묻힌 무지개를 찾아
1) 다시 뉴욕으로
떠남은 곧 새로움과의 만남이다. 하나를 버리지만, 버린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를 얻게 된다는 말이다. 이미 꽃봉오리는 열리기 시작하고 있어 기다리기만 한다면 이내 활짝 피어나겠지만, 나는 새로운 씨앗의 상태로 도로 돌아가 다른 꽃으로 피어나려 하는 것이다.
2) 뉴욕 라즈니쉬 센터
'무질서한 명상(Chaotic Meditation)'은 저녁 6시부터 한 시간 동안 계속되는 일명 쿤달리니(Kundalini) 명상이라 부르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 15분은 녹음된 음악의 보조를 받아 무조건 온몸을 떤다. 머리, 팔, 엉덩이, 발, 온몸을 신들린 것처럼 강렬하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싶으면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해도 된다. 한 자리에서, 혹은 방안을 헤매면서 해도 좋고, 남이 의식되어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은 천으로 눈을 가린다. 한참을 강렬하게 떨다보니, 신이 나에게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3) 계곡의 오르가슴
탄트라는 성을 통하여 성에서 해방될 수 있고, 성을 통해서도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성 에너지는 인간의 근본적인 에너지이다. 그러나 이 에너지가 탄트라를 통하여 승화되지 않고서는 세속적인 상태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까지 어느 스승이건 이처럼 성에 대한 이야기를 정면에서 당당히 언급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성교라고 하면 누구나 흥분된 상태에서의 행위를 연상하게 되지만, 탄트라에서는 흥분된 상태에서의 행위는 오직 그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로 볼 뿐이다. 안정되고, 집중되고, 고요한 상태에서만이 탄트라는 가능한 것이다.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서라면, 우리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에 일어나는 연금술적인 작용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성교 중에 양미간에 있는 아즈나 차크라(ajna-chakra), 진정한 이성과 의지의 중추에 의식을 모아야 한다. 그러면 그 많은 신비의 세계가 하나씩 열리기 시작한다.
오르가슴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정상의 오르가슴이다. 이것은 재채기를 하듯 생리적인 발산을 위하여 절정으로 몰아쳐 가기만 한다. 그러나 흥분의 절정에 도달하고 나면 더 이상의 차원으로 고양되어 나아갈 수가 없다. 에너지는 사라지고, 이완감 속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탄트라는 이와는 다른 유형의 오르가슴에 중점을 둔다. 바로 계곡의 오르가슴이다. 이것은 성을 나누는 두 사람이 절정을 향해 치닫지 않고 함께 존재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사정이나 에너지의 사출 없이 몇 시간이고 그런 상태로 머물며 깊은 포옹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때 성은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되며, 깊고 조용한 교섭이 두 육체의 에너지 사이에서 발생한다. 마침내 무아와 무시간의 상태에 이르게 되고 우주적인 사랑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체험인 것이다.
성은 끝없이 인간을 따라다니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다. 그것이 육체에서 떠났다 해도 마음에는 남아 있으며, 또 마음이 그것을 떠나보내도 육체에는 남아 있다. 오죽하면 프로이트는 모든 활동의 근원이 '성'이라고까지 했을까. 그런 성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결하고 추한 것으로만 인식해야 했을까.
자연스러운 성과 사랑이 라즈니쉬를 통해서 복권되는 느낌이었다. 몇 십 년 동안 어둠으로 채워졌던 나의 공간도 창문을 활짝 열고 눈부신 햇빛을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젊은 시절을, 싱싱한 젊음의 터질 듯한 그 살 위에 느끼고 누리기는커녕, 본능의 진실을 부정하며 몸과 마음에 철갑을 뒤집어 쓰고, 바둥거리며 싸워 오기만 했던 것이다. 나에게 그런 욕망이 엄습해 올 때면 나는 미친듯이 춤을 추거나, 공부를 하거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이상을 좇아 지구 위를 헤매곤 했다.
사랑,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자나 예술가라도 그들이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온 세계가 자신을 존경하고 선망한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 필요함을 외면하지 말라. 그것은 곧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4) 안개 속에 묻힌 무지개를 찾아
5) 희미한 촛불 사이로
우리는 정원으로 나가, 울긋불긋한 나리꽃이 함박 피어 있는 한 모퉁이에 앉아 몇 시간이 흐르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이며 종교며, 그의 스승 아우로빈도에 대한 것이 우리의 화제였다.
바루나는 내내 차분하고 유순한 목소리로 공손히 얘기했다. 아직 20대 후반인 그는 아우로빈도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적인 생활에 정진하기 위해 일찍이 집을 떠났다. "제가 최근에 심취하고 있는 것이 라즈니쉬예요. 그는 정말 번쩍이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보셨어요?" 특히 <성에서 사마디까지 (From Sex to Samadhi)>를 큰 충격 속에서 읽었다고 했다. 인도에서 그처럼 공개적으로 성을 언급하는 현자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라즈니쉬가 말하는 탄트라의 체험을 자기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3. 신발과 더불어 마음도 벗고
1) 쿤달리니 명상법
아슈람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다이내믹(Dynamic) 명상이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되고, 라즈니쉬의 강의는 아침 여덟시부터 한 시간 반 동안이었다. 그 다음 비파사나(Vipassana)나 나타라지(Natarajee) 명상, 그리고 오후에는 그날 강의를 다시녹음으로 들려주고, 오후 네시부터는 나다브라마(Nada-brahma) 명상, 다섯시 반부터는 쿤달리니(Kundalini) 명상, 일곱시부터는 구루와의 대면 시간인 다르샨(darshan)이었다.
라즈니쉬의 수많은 명상법 중에서 쿤달리니 명상법은 다이내믹 명상법과 함께 가장 중요한 명상법으로 손꼽힌다. 이 명상법에서는 강렬한 카타르시스 체험이 중시된다. 그것은 단순하나 매우 힘차고, 강렬하면서 또 흥미롭다. 음악과 춤이 이들 명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주된 요소요, 행위를 유발한 다음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에너지를 탈바꿈시키는 원리가 그 핵심이다. 명상이란,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 다시 말해 좋다 나쁘다를 분별하는 마음을 없애고 묵묵히 지켜보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즈니쉬는 육체를 명상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육체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일'을 방해하는 많은 억압들을 안고 있다. 먼저 이 억압들을 떨쳐 버려야 한다. 그러면 명상의 다음 단계가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때 인간은 텅 빈 에너지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쿤달리니 명상은 그래서 그 시간도 해가 지기 직전, 우주의 운행 리듬에 맞추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계산된 시간에 행해진다.
쿤달리니 명상은 네 개의 스테이지로 진행된다. 첫 스테이지 15분 간은 음악에 따라 무조건 몸을 흔들어대기만 하면 된다. 나는 음악에 나를 완전히 내맡겼다. 음악이 그렇게 만들어져 있어서 가만히 있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때로는 몸의 전체를, 때로는 몸의 부분부분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신을 털어내듯 계속 흔들어대었다. 5분쯤 지났을까. 나 아닌 내 속의 무엇인가가 내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신들린 무당과도 같았다. 이런 순간에 남을 의식한다면 그것은 그 시간을 헛되이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몸만을 흔들어대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종소리가 울렸다.
"정지!" 일순간에 모든 것이 멎었다. 음악도 멎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동작을 취하던 중이더라도 그대로 정지해야 한다. 나도 얼어붙듯 동작을 멈추고 마네킨처럼 서 있었다. 적막이 흘렀다. 마치 내 몸 속에 있던 또 하나의 몸이 움직임의 관성에 실려 껍질만 남겨 두고 뛰쳐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 상태로 10초쯤 지나자 새로운 스테이지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새로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미 첫 스테이지에서 몸의 긴장을 완전히 풀고 에너지가 충만해졌으므로 몸은 훨씬 가벼워졌다. 정해진 동작이 있을 수 없다. 나는 몸을 음악에 실어, 몸이 추자는 대로 맡겨 버렸다. 때로 물 위에 떠 있는 양, 때로 공중을 나는 양 몸은 마음껏 자유롭게 논다. 몸과 마음의 짐을 벗어던진 듯한 자유로운 춤 속에서 어떤 축복된 느낌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사라지고 신이 나의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다시 종소리와 함께 '정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번째 스테이지. 음악은 이제 격렬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그런 음악이 아니다. 모든 격동을 달래고 가슴 속에서 꽃을 피워내는 듯한 음악 소리, 나는 흐느적거리며 음악에 몸과 마음을 맡겼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무의식중에 흐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이 회개의 눈물인지 해원의 눈물인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북받치는 울음에 어깨를 들썩였다. 내 마음의 찌꺼기가 이 흐느낌으로 씻겨져 나가는 것일까...
피안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우리 모두가 갈구하는 영혼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음악, 어떤 자는 심판을 받는 죄인인 양 고개를 숙이고 섰고, 어떤 자는 맥이 다 빠져 될 대로 되라는 듯 철퍼덕 주저앉았다.
얼마만큼 울다 나는 나를 깨우는 종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제 네번째 스테이지, 편안한 자세로 쉬는 시간이다. 나는 누워버렸다. 에너지가 내 몸을 돌아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도 시간도 없는 것, 나는 다만 이 모든 것이 에너지의 흐름일 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차디찬 대리석 바닥이지만 이미 열기로 뜨거워진 내 몸은 그것을 시원한 물줄기처럼 느끼고 있었다.
긴 머리에 수염을 길게 기른 산야신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명상의 진행과정을 일일이 조심스럽게 살피며 지도하고 있었다. 이런 강렬한 육체의 움직임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지도할 수 있는 자가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분이 못 되어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함을 지르며 자기를 때려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또 격렬한 동작 때문에 현기증을 느껴 쓰러지는 사람도 있다. 모든 명상법에는 지도자의 참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법이지만, 이 명상은 특히나 그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2년 전인 74년까지만 해도 이 명상법 전체를 라즈니쉬가 직접 지도했다고 한다. 그가 이곳 푸나로 옮겨 온 뒤부터 산야신들이 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상의 때를 벗어 버린 아름다운 구도자들. 그들의 용모가 하나같이 수려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이 총명해 보인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들 중에는 독일, 영국, 미국 출신의 학자, 작가, 예술가, 정신요법가, 히피 등 현지에서 각 분야의 일가를 이루거나 촉망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를 찾아온 이 예감은 나도 머지않아 저들 중의 한 명이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예감이 점점 형체를 갖추어 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추슬렀다. 염려도 환상도 아직은 갖지 말자. 순간순간에 진실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신이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부질없는 걱정에 지레 사로잡혀 있다면 정작 신이 나를 찾아왔을 때 그를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2) 만남의 앞날
락슈미는 산야신들의 대표격으로, 라즈니쉬에게서 최초로 산야스(戒)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슈람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행정적인 일을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라즈니쉬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은 뒤로 독신녀로서 지금까지 10년 가까이를 그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 오고 있었다.
라즈니쉬 아슈람은 주된 2개 동의 건물과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에서 개인 도서관으로는 제일 크다는 그의 장서관과 거치가 있는 건물을 '노자관(Lao Tzu House)'이라고 불렀다. 매일 아침의 강의나 저녁의 다르샨은 이 건물에 부속된 부분에서 행해지는데, 3면이 정원을 향하여 트여 있다. 이 강의장을 '장자 오디토리움(Chang Tzu Auditorium)'이라 불렀다.
"당신은 무용가로군요. 라즈니쉬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이 춤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죠."
3) 신발과 더불어 마음도 벗고
오디토리움 입구에는 'Leave your mind with your shoes'라고 영어로 쓴 글귀가 붙어 있었다. 신발과 더불어 마음도 벗어놓고 가라... 신발을 벗어 놓으려니 유난히 그 글귀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과 관념을 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리라.
라즈니쉬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탄트라 불교의 중요한 경전인, 틸로파(Tilpoa)의 <마하무드라의 노래 (The Song Mahamudra)>를 풀이하며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명하는 강의의 첫날이었다. 마하무드라는 우주와의 합일을 느끼는 지고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라즈니쉬는 어린 시절, 브라마 무르타(Brahma Murta)라는 캄캄한 이른 새벽의 축복된 시간에 강으로 나아가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홀로 멍하니 앉아 있거나 헤엄을 치고 돌아오기를 좋아했다. 새벽에 강가로 사라졌다가 몇 시간 만에 돌아오곤 하는 아들을 이상하게 여긴 그의 어머니가 물었다. 강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그때 그의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머니, 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더 큰 의문을 느껴 꼬치꼬치 캐물었다. 새벽에 네 시간 동안이나 강가에 가 있었는데 어찌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머니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나 또한 틀리지는 않았다.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강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 어떤 인위적인 노력도 없이 다만 그렇게 앉아 있었을 뿐이다. 헤엄치고 싶다고 느낄 때 나는 헤엄쳤다. 그러나 그 헤엄치는 것은 이미 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억지로 하지 않았다. 자고 싶다고 느낄 때 나는 잤다. 행위는 있었다. 그러나 행위자는 거기 없었다."
라즈니쉬는, 자기가 부르는 진리의 노래를 듣고자 한다면 믿음도 의심도 버리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을 곧게 세웠다. 믿음과 의심은 서로 거꾸로 서 있는 반쪽 마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애신 온전한 사랑의 마음인 '신뢰'를 가지라고 했다. 라즈니쉬의 손가락은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대가 무한히 수용하는 깊은 골짜기가 될 때, 그때에만 깨달음의 절정은 그대에게 전달도리 수 있을 것이다. 제자여, 그대는 완전한 샤크티(shakti, 여성에너지)가 되어라. 수용하는 골짜기가 되어라. 깊고깊은 자궁이 되어라." 믿음도 의심도 없이 다만 수용하라.
4) 라즈니쉬의 여러 명상법
아슈람 외곽에서 별도로 진행되는 명상과 요법 그룹, 무브먼트 그룹, 인카운터 그룹, 워크숍들이 또한 10여 가지가 넘었다. 거기에다 매월 11일부터 열흘씩 진행되는 명상캠프가 따로 있었다. 비파사나(vipassana), 태극권(Taichi), 좌선, 마사지, 타타타(Tathata), 최면요법, 롤핑(rolfing), 데르비쉬 댄싱(Dervish dancing), 프라이멀 테라피(Primal therapy), 소마(Soma) 등 종류도 다양한 명상 기법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정신요법적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들이었다.
라즈니쉬의 중요한 명상법은 대개가 몸의 강렬한 움직임으로부터 시작하여, 호흡, 그리고 온 가슴에 고요함을 끌어안는 정지상태로 끝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명상법을 3개월 동안 쉬지 말고 계속하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3개월을 꾸준히 한다면 명상의 효과가 분명해지고 우리에게 정신적인 비료와 같은 기능을 하게 되고, 마침내는 이런 테크닉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온다.
"지나치게 이 명상들을 심각한 태도로 힘들게 하지 말라. 즐기며 유희하며 그것을 관조하라. 그 상태에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의식하라. 많은 명상법 중에서 너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두어 가지만을 골라, 매일 같은 시간에 수행하라. 아침 일찍엔 강렬한 다이내믹 명상을, 그리고 저녁엔 조용한 구리샨카 같은 명상을..."
"나는 어느 고전적인 한 길만을 택하고 싶지 않다. 나는 전통의 새로운 시작이지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스승을 만났다. 그러나 한 번도 어느 누구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 예속된 적은 없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생애를 방황하며, 많은 전통을 횡단하고, 많은 학교와 집단에서 많은 방법을 배웠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나는 고정되거나 종속되지 않았다. 나는 사랑을 안고 항상 하룻밤 손님처럼 그 곁에 잠시잠시 머물렀을 뿐이다. 나는 많은 것을 배움으로써, 한 길만으로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한 가지 길에만 고착되어 그것에 매달린다면 그 길에서만은 도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길이 열려 있음을 보지 못한다. 나는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나는 마치 벌과도 같이 한 꽃송이에서 다른 꽃송이로 계속 옮겨 다녔다. 나는 그것들의 향기만을 모아 여기에 와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붓다나 예수, 마호메트, 파탄잘리 등과 모두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마주할 수 있다. 지금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오고 있다. 그대들은 아마도 이런 광경을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불교인, 유태교인, 기독교인, 힌두교인, 이슬람교인, 자이나교인... 그 모두가 세계 각지에서 오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에게 올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전통이 시작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지금이 바로 그 시작이요 탄생인 것이다.
그대들은 바로 그 탄생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아기는 태어나 자라서 어른이 되고 죽음에 가까워진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어느 전통이고 태어나는 과정에 있을 그때가 가장 신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 무엇도 그것의 신선함과 아름다움에는 비교될 수 없다. 그대들은 모두 행운아들이요, 축복받은 자들이다. 그대들은 지금 이 전통의 탄생을 지켜보며 그것의 일부가 되어 그 청순한 맛을 보고 있지않은가."
5) 라즈니쉬와의 첫 다르샨
나는 일생 단 한 번이 될지도 모르는 이 만남을 통해 그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물어 볼지 미리부터 참으로 많은 생각들을 했다. 물어 볼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수행법과 구루의 필요성, 진리를 찾아 내가 가야 할 길, 그리고 인생에 대한 굵직굵직하고 심각한 문제들, 가슴 속에는 몇 페이지는 족히 될 질문 항목이 만들어졌다. "음, 그래 무용가라고?" 그는 잠시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광채를 뿜는 듯한 큰 눈을 오래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움직임이라도 좋으니 한번 해 보라."
얼떨떨한 느낌과 함께 어떤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을 느꼈다. 말은 하라고 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그것은 오히려 다행스렁ㄴ 요구였다.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나는 무심히 손으로부터 팔, 어깨, 가슴, 드디어 온몸을 앉은 채로 천천히 움직여 보였다. 라즈니쉬는 큰 숨을 쉬었다.
"됐다. 너는 무용을 그만두어선 안 된다. 나는 네 팔과 다리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네 동작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다만 네가 얼마나 춤 속에서 스스로 사라져 버릴 수 있는가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너는 타고난 무용가다. 결코 무용을 중단해선 안 된다. 계속하라. 너에겐 춤이 곧 구도의 길이 될 것이다. 너는 그 길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가야 한다. 춤의 순수, 춤의 신비, 춤의 자유, 그것이 너의 길이다.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춤 그 자체만 남아 저 영원의 율동이게 하라." 앞으로 매일 그를 만나게 되면 모든 것을 물어보리라고 생각했지만, 안개가 나를 에워싸 상황을 분명하게 정리할 수조차 없었다. 언어는, 사고는, 관념은 점점 내 곁을 떠나는 것 같았다.
6) 라즈니쉬를 위해 춤추다
동작 구성을 세밀히 해 둘수록 그것은 허위의 춤이 되기 싶다. 비록 10분 정도의 짧은 춤이었지만 나는 아마도 지금껏 이 순간을 위하여 춤을 연마했나 보다 싶을 만큼 진정으로 춤추었다. 나의 언어는 그것을 몰라도 나의 춤은 깊은 의식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나의 전부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바치는 듯한 춤... 끊임없이 관객을 의식하면서 춤을 추어 온 나였건만, 그때 내 의식 속에 관객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없었다. 춤이 끝났을 때 라즈니쉬는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 심각하다는 표정으로 '음' 소리를 냈다. "푸나로 오라. 이 도시에도 인도 음악과 무용의 훌륭한 선생들이 있다. 무용 공부를 해야 한다면 여기서 공부하며, 나의 산야신이 되어 살기 바란다."
무너져내리는 나의 자아, 그러나 세상의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소생을 꿈꾸는 나의 자아, 나의 자아는, 라즈니쉬를 향하여 이미 불타고 있는 나의 가슴에 마지막 힘을 다하여 저항하고 있었다. 나의 자아는, 새로 태어날 나를 위해 죽어야 할 운명에 놓여 있었다.
7) 산야신의 새로운 의미
"산야신, 그것은 산야스(sanyas, 戒)를 받은 사람, 구도를 위해 몸을 던진 자를 말한다. 신야신이 된다는 것은 고별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고별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고별이다. 인생은 하나의 놀이로서 즐겨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산야스는 이것에 반대해 왔다. 그것은 삶을 반대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적인 산야스를 반대한다. 그대는 세상을 등질 필요가 없다. 단지 삶의 태도를 바꾸라. 세상을 살되, 세속적으로 추락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세속적인 삶의 애착을 버리라.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진 자라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나의 산야신이 될 수 있다. 산야신이 되라는 것은 오직 지금부터 진정 자유인으로서의 삶을 원하는가, 또는 원하지 않는가를 결정하라는 말이다. 이 결정의 순간은 그대의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그리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그대 자신의 이미지를 버리라. 세속적인 애착을 버리고, 그대는 무엇이다, 무엇이 되겠다는 목적의식조차도 버리라. 그리고 오직 텅빈 대나무 속과도 같은 상태가 되어 그것을 체험하라.
그대의 목에 거는 말라, 그것은 둥근 꽃으로 이루어진 삶의 꽃다발이다. 영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의 삶은 낟알의 염주처럼 뿔뿔이 흩어져 굴러다닐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이 그 낟알들을 다발로 이어주듯 영원이라는 시간이 그대의 삶을 꽃다발로 만들어 줄 것이다. 말라는 그대에게 영원의 생명을 상기시킬 것이다.
산야신의 의미는 무슨 행동을 남보다 특별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생활을 바구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생활을 하되 그 의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화를 내더라도 화를 내는 자신을 의식하고, 슬퍼도 즐거워도 항상 그 상황에, 그리고 행위에 대한 의식을 농치지 말라는 뜻이다.
산야신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점은 조복한다는 그 자체에 있다. 이것은 완전히 내맡김으로서, 서양인들이 이해하는 굴복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힘에 밀려 독재자나 적에게 복종한다거나,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누구에게 자유를 구속당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에고와 소유물과 현재의 조건들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고, 진정한 축복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깨어있음을 말한다.
완전한 내맡김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하거나 그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낡은 가치관과 신조를 훌훌 털고, 이미 우주와 하나가 된 깨달은 스승이 주는 삶에 전적으로 내맡김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모험을 해나가는 것이다."
8) 한 걸음 더 가까이
나는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나는 변화와 싸우지 않기로 했다. 내 속에 있는 나보다 더 큰 것과 다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싶어하지 않았는가. 라즈니쉬를 '신뢰'하자. 그에게 나의 모두를 내맡기자. 그는 저렇게 자비와 사랑이 넘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지 않은가."
일과와는 별도로 설치되어 진행되는 각종 요법 그룹은 인간이 단지 눌러 놓기만 한 분노와 공포, 탐욕, 적개심, 질투심 등과 같은 감정들을 폭발시켜 배출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즈니쉬는 산야신이 되는 자들에게 필히 이 요법 그룹을 거치도록 했으며, 각자에게 맞는 그룹을 직접 선별해 주었다. 감정을 가로막고 있는 억압을 제거하여 에너지가 막힘없이 흐를 수 있도록 해 줌으로써 탈바꿈의 첫발을 내딛게 하려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이 심리요법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 꾹꾹 눌러 온 쓰레기들을 몽땅 쓸어내도록 도와주고, 깨끗라게 정화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정결한 마음으로써만 기도가 가능하다. 기도가 가능한 상태가 되면, 그때 내 앞으로 오라. 기도가 가능해지면 이미 기적은 일어난 것이다. 지금이 붓다의 시대였다면 이런 심리요법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 시대의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들은 종교적으로 사는 법을 잊어 버렸다."
9) 고백
10) 사랑의 회오리바람
76년 7월 26일. 그를 만난 지 꼭 일주일째 되던 날이었다. 나는 이제 나의 모든 허위를 벗어던지고 참다운 구도자의 길을 가기 위하여 그의 앞에 엎드린 것이다. 저는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에 왔습니다. 우주와 하나된 분이시여, 저도 이제 그 감화를 입어 우주 속으로 녹아들겠습니다. "그대의 이름은 이제부터 마 프렘 바티야(Ma Prem Vattya)다. 프렘은 사랑을, 그리고 바티야는 회오리바람을 뜻한다. 이제 그대는 '사랑의 회오리바람'이다. 인간의 조작과 계산이 끼어들기 그 이전, 들판에서 마음껏 자란 야생화, 바로 그런 사랑을 뜻한다. 그렇다. 사랑은 회오리바람이다. 이 회오리바람을 인위적으로 다듬거나 간추리려고 한다면 바로 그 순간 사랑은 부서져 버린다. 사랑, 그것은 자유의, 야생의, 자발성의 회오리바람이다.
바티야, 그대는 이 회오리바람을 통제하거나 그대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 그대의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어지고 다듬어진 사랑은 죽음일 뿐이다. 사랑의 차디찬 주검일 뿐이다. 그렇다. 그대 자신의 사랑 속에서 죽을 때만이 사랑은 그대의 것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 속에서 그대인 채로 살아 있다면, 아직도 완전히 그 사랑 속에서 죽지 않았다면 사랑과 그 회오리바람은 그대를 장악할 것이다.
바티야, 그대는 이제 회오리바람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 회오리바람은 그대 존재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대 존재의 심연보다 더 깊기 때문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이다.
바티야, 이를 기억하라. 신의 통로가, 깨달음에의 길이 여기 있다. 존재의 용광로로부터 터져 나오는 사랑은, 그 야생의 회오리바람은 바로 신의 통로인 것이다. 이 회오리바람은 바로 신의 본질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신은, 깨달음은 펄펄 끓는 에너지이다. 인간의 조작 일체가 배제된 야생의 회오리바람이다. 아니, 사랑은 회오리바람보다 더 깊고 야생적이다.
바티야, 신을, 신성을, 깨달음을 찾고자 여기 왔는가? 삶의 야생적인 에너지를 통해서만이 신을, 그 신성을, 깨달음을, 영혼의 불꽃을 다시 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바티야, 사랑은 깨달음으로 가는 그 첫 발화점이다. 구도에의 긴 여행의 시작이다. 신은, 깨달음은, 절절이 우는 그 사무침은,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바람으로 올 것이다. 이 회오리바람은 그대를 사로잡을 것이며 마침내는 그대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릴 것이다. 그대를 죽여버릴 것이다. 그리고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바티야, 그대는 완전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기억하라. 이 '사랑의 회오리바람'을, 삶의 에너지가 그대를 사로잡는 대로 따라가거라. 노래 부르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노래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펄펄 끓는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노래로 흘러나오게 하라. 춤추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춤춰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이 야생의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춤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종교에의 길이요, 구도자의 자세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충만이며 영원의 세계에 사는 것이다.
바티야, 이 삶의, 야생의 에너지가 어디로 그대 자신을 이끌고 갈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대의 동작은 이제 순수한 움직임으로 바뀐다. 여긴 어떤 목적도 없다. 오직 순수한 법열과 에너지의 충만이 있을 뿐이다.
바티야, 삶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삶, 그 자체가 본질의 율동이기 때문이다. 의미란, 삶에의 의미 부여란, 마음의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이 야생의 회오리바람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삶에 대한 의미 부여란 목적을 찾는 인간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삶은 그 어떤 의밎도 없다. 모든 의미 부여가 배제된 삶, 그 자체가 아름다움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삶은 야생의 회오리바람, 그 자체로서 무한한 것이다. 의미 부여란 무한성을 유한의 틀 속에 한정시키려는 것이다. 한정되어진 모든 것은 무한일 수 없다. 이해되어진 모든 것은 결코 무한일 수 없다.
바티야, 이를 기억하라. 이 분명한 사길을 기억하라. 삶은 이 자체로서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여기 그 어떤 의미 부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삶은 바로 에너지이다. 에너지의 회오리바람이다. 아름답다 못하여 차라리 미친 듯이 밀려오는 충격이다. 이 회오리바람 속으로, 이 삶의 에너지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대는 이제 신의 본질에, 깨달음에 닿을 수 있다.
바티야, 그대 자신을 지금 이순간부터 남김없이 지워 버리라. 칠판의 글씨를 지워 버리듯, 그렇게 흔적도 없이 지워버려야 한다. 그대 자신을 버리고 삶의 에너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거라. 이 흐름에 그대 모두를 내맡기라. 이 흐름과 하나가 되어라. 때로는 그대 뜻과는 반대되는 곳으로도 흘러 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 생각을 따르지 말고 이 삶의 에너지를 따라가야 한다.
바티야, 어디든지 가거라. 이 삶의 에너지가 흐르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거라. 이 흐름에 따르는 것은 가장 충만한 삶이며 가장 진한 삶이기 때문이다."
"너는 어느 요법 그룹에도 가담할 필요가 없다. 요법 그룹은 서양인들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자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그대는 자신과 만나는 법을 아는 동양인이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그대의 내면 속으로 깊이 침잠하는 일뿐이다. 춤추고자 하는가? 그러나 그대 자신이 춤춰서는 결코 안 된다. 삶의, 이 야생의 에너지가 그대를 통해서 춤으로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제부터 나의 이름은 바티야. 사랑의 회오리바람. 회오리바람처럼, 한군데 머물지 말고 항상 떠나고 항상 새로운 곳으로 가서, 강렬한 회오리바람 같은 사랑을 우주 곳곳으로 몰고 가리라.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그 회오리바람으로 몰고 가는 사랑의 순간만 있으라.
4. 나의 길은 나 혼자
1) 새로운 첫 아침
2) 볼에 눈물진 여인
사랑은 일상성을 초월하는 것이다. 사랑은 높이 비상하게 하고 사람을 명상적으로 만들고 황홀경으로 데리고 간다. 사랑은 우리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신이 존재하며 보다 높은 세계가 있다는 것의 첫 증거이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만 남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추하다. 인간 자체의 그 아름다움, 위대함, 신성함으로 타인을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원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은 신이다. 타인을 신으로 볼 때 타인은 충족된다. 바로 그 쳐다보는 시선은 우아해지고 신비로워진다. 왜 사랑에 빠져 버리는가? 왜 사랑 속으로 높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대, 깊은 사랑을 지니고 있다면 언제나 그대의 볼은 눈물에 젖어 있으리라. 왜냐하면 그대의 그 깊은 사랑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저속한 욕구를 채우기는 쉽다. 사람들이 저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고상한 욕구를 품고 있다면 상대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높은 욕망을 가진 그대는 늘 고독할 것이다. 이것은 여자에게 자주 오는 문제이다. 모든 일이 돈 아니면 성으로 취급된다. 삶의 성스러움은 깊은 곳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사랑을 열망하는 가슴을 가진 자, 그들은 결코 충족하지 못한 채, 연민의 눈물로 가득 찰 것이다.
3) 머물 수 없는 바람으로
4) 에크하라처럼
라즈니쉬를 만난 이후 예술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기술이 없는 예술은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나 예술은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가슴에서 발원하는 느낌에 동하는 것이며, 그 느낌이 사라진 예술은 아무런 감동도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이빨로 코끼리만한 바위를 움직여 놓을 수 있다 한들 그 기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지난 날 나는 내 시간의 거의 전부를 기술, 테크닉의 연마에 바쳤었다. 스튜디오에 나가 몸을 단련하고, 성악 선생을 찾아가 소리를 연마했디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가슴을 위한 훈련이 아니었다. 기술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을 던져 버려야 한다. 나에겐 기술의 연마가 결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춤은 무엇이며, 노래는 무엇인가? 그것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듣는 이로 하여금 높은 명상의 경지로 들어설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으로 터득한 기교로써가 아니라, 아름다운 가슴, 아름다운 영혼으로 춤추어야 한다. 그래고 노래해야 한다. 그때 영혼은 서로 울림을 일으킬 것이다. 다만 자연의 흥취에 이끌려 추는, 저 결코 춤을 배운 적이 없는 자들의 춤, 그리고 저 떠돌이 악사들의 분방한 노랫소리, 거기에 무슨 기교가 있으며 테크닉이 있는가. 그러나 그들의 춤은, 그들의 노래는 가슴에 깊숙이 울림을 일으킨다. 그들의 가슴에 필링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혼이 늘 신을 연모하고, 신을 사랑하골, 신을 부르고, 신에게 감사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스러움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줄이 단 하나밖에 없는 인도의 현악기 에크하라를 생각했다. 그것은 신비다. 결국은 하나의 음일 뿐인 그 소리는 우주를 다 표현하고, 영혼을 잠재우며, 또 일깨운다. 언젠가 나는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연주가가 에크하라로 하루 종일 똑같은 소리만을 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왜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아직 꼭 알맞은 소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오."
자로 재거나 측정할 수 없는 소리, 그것은 가슴의 소리다. 단조롭게, 곡조도 없이, 들으면 언제나 같은 음을 하루 종일 뜯으며 가슴에 응답하는 단 하나의 제 소리를 찾아서 그는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무한한 다누삼, 그 에크하라가 되고 싶었다.
5) 자연요법 아슈람
푸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울루리칸차에는 간디의 아이디어로 세워졌다는 자연요법 아슈람(Nature Cure Ashram)이 있었다. 질병의 치료를 철저히 인체의 자연치유력에 의존한다는 것이 이곳의 원칙이요 철학이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치료방법은 인체의 자연치유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명상과 단식, 식이요법, 자연물을 통한 요법, 그리고 최소한의 생약이 전부다.
6) 오줌을 마시며
마침 몸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을 계기로 나는 오줌 요법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아침마다의 의미 있는 의식으로 변해버렸다. 반드시 아침의 첫 소변을 마시되, 그것의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것을 버리고 중간 부분을 취해 마신다. 오줌을 마시는 일은 건강을 증진시키고 나의 고행을 상기시키는 외에도, 나로 하여금 순수한 음식물만을 섭취하게 함으로써 몸을 순수하게 하는 이중의 효과를 발휘했다. 아침의 오줌은 어제의 반영이다. 무엇을 먹었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탄수화물이 지나치게 함유된 음식을 먹었다면 그 역겨움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고, 어쩌다 육류라도 먹었다 치면 아예 마실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 의식이 끝나면, 정성들여 끓인 우유차 한 잔이 나의 아침 식사다. 우유를 끓이다 거기에 차를 탄다. 한 모금 한 모금 포도주를 마시듯 정성껏 감사한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편도나 해바라기씨 등 씨앗 종류를 몇 알 씹는다. 해가 지면 모든 씹는 음식물은 멀리하였다. 이것은 원래 인도인, 특히 자이나교도의 관습이요 계율이지만, 인간이 태양의 리듬을 따르는 자연스러움이 있어, 나는 그렇게 했다.
나의 식탁은 언제나 소찬도 못 갖추었을망정 부족함을 느낄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오히려 너무 풍성한 식탁 앞에서 입맛을 잃곤 하던 터였다. 이렇게 단순하고 신선한 음식 딱 한 가지만을 꼭 필요한 만큼만 놓고 먹으면, 우선 마음이 편안하고 그 음식에 대한 뭉클한 고마움이 생긴다. 음식을 느끼며, 먹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끼며, 씹고 또 씹는 속에서 그 깊은 맛을 음미하면, 그 맛의 여운이 있어 더 이상의 음식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이로써 내 몸에 필요한 열량과 내 정신에 필요한 자양분이 모두 섭취되는 것이다.
7) 강변을 거닐며
8) 죽음의 축제
내가 이 아슈람에 온 지 1년쯤 되었을 무렵, 산야신 한 명이 죽었다. 비파사나(Vipassana)라른 아직 20대의 앳된 여자 산야신이었다. 병원에서 닷새 동안 앓아 누워 있던 그녀가 의식을 잃고 죽음의 징후를 보이던 날 아침, 그 일에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우리 모두에게 라즈니쉬는 아침 강의 시간을 통해 말했다.
"나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대들 모두는 가서 죽음을 중지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의 힘을 느껴보기 바란다. 죽음을 맞이하는 비파사나의 곁으로 가서, 죽음이 말해주는 인생의 진실을 보기 바란다. 모두 이 상황을 명상하라. 비파사나의 죽음은 그대들도 항상 죽음의 침대에 누워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는 한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 원칙 아래 살고 있다. 너희들 역시 순간순간 죽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영적인 세계를 체험해 본 보람 있는 생애를 가졌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이 아슈람에 왔을 때 나는 그녀의 호흡에 이상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호흡 장애로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노력의 결실은 저세상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 전에 그대 개개인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을 의식하라. 생명은, 진짜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자아인 것이다. 자아는 죽음의 부분이지 생명은 아니다.
그대에게 자아가 없다면 그대에겐 죽음도 없는 것이다. 그대가 자아를 의식적으로 버릴 수 있다면 그대는 죽음을 이긴 것이다. 감자기 죽음이 그대의 의식을 두드린다면, 그대는 아마도 인생의 허무를 느낄 것이다. 인생의 무의미를 느낄 것이다. 죽음은 인생의 진실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위대한 폭로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은 생의 부분이지 생의 끝장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생의 절정일 뿐이다. 인생의 절정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인생을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화장을 한 사람은 화장 후 몇 시간 후에 자기가 죽은 것을 알 수 있지만, 땅에 묻히면 며칠 후에나 자기가 죽은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녀는 자기 몸이 화장된 것에 대하여 만족해할 것이다. 어서 그녀를 따라가 타는 모습 하나하나에 너의 몸이 타는 것을 상상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죽음의 축제를 갖기 바란다."
죽음은 삶의 부분, 삶의 절정, 그것에 대한 두려움은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곧 삶을 두려워하는 것, 죽음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삶을 반대하는 것. 내 속의 두려워하는 자여, 살지도 죽지도 않으려는 나의 에고(ego)여, 네가 내 속에서 죽어야 한다.
라즈니쉬가 말했다. "만일 그대가 죽음 그 자체를 축복할 수 없다면, 기억하라. 너는 삶마저도 이미 잃어버린 것임을. 삶의 모든 과정은 죽음이라는 절정을 향한 준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렇게 아름다운 의식, 축제, 춤, 그리고 노래였다. 죽음의 두려움이란 오직 관념에서의 생각이요, 인생에 대한 애착일 뿐이다. 죽는 순간순간은 신성한 것이다. 오직 그 상상과 관념이 두려운 것이다. 애착 없이 순간순간을 깊이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영원한 자유인이 될 것이다.
이 몸은 다시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물로, 흙으로, 재로 돌아갈 것이다. 더 이상 몸의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움직임도 없는 죽음의 느낌이 사막을 달리듯 거침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지난 날의 모든 것들이 사막의 아지랑이인 양 보일 듯 말 듯 아물거린다. 이 몸 속에 감도는 바람이 몸을 떠나면 마지막 호흡이 끝난 것이다.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
그것은 텅 빈 무(無)의 세계, 거기에는 진동과 에너지가 있을 뿐이다. 그 무한 공간에서의 대자유가 나를 안아준다. 몸도 없이, 생각마저도 없이 오직 빛이 보이는 그 공간을 항하여 나는 달려간다. 그러나 아지랑이같이 아물거리는 이 세상은 아직도 나를 더나지 않고 있었다. 나의 의식은 이미 나의 몸을 떠나 아득한 천공(天空)을 항하여 흰구름 속으로 몰아 들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9) 갖가지 사람들
각자의 수준에 달린 것이지만, 어쨌거나 이 아슈람은 사람들이 와서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곳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변형된다. 평생을 같이 살아 온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와서 여기에서 헤어지기도 한다. 평생을 종사해 온 직업을 여기에서 내동댕이치기도 한다. 진정한 무엇을 새롭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불현듯 잊었던 자신을 되찾고, 지금까지 거죽으로만 살고, 일하고, 사랑해 왔다는 불 같은 각성을 되찾는 순간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드문 기회를 얻어 잠깐 이 세상으로 여행온 나그네들이다. 한 순간도 허투루 소모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거것을 느끼는 것이다. 잠시 후도 아닌 바로 지금, 진짜 삶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질없는 어릿광대의 몸짓이 되고 말지라도 무엇이건 새로운 행동, 새로운 모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젊은 산야신들이 많으나, 50을 넘긴 산야신들도 많다.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흘려보낸 뒤, 후회와 회한을 안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뜀박질을 하는 그들을 보면 연민이 불쑥 솟는다. 그러나 죽기 직전인들 어떠랴. 그때도 너무 늦지는 않은 것이다. 적어도 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은가.
10) 혼란을 주시는 분
라즈니쉬가 존경하는 그의 부모는 자식을 향해, 우리가 그를 부르듯 바그완(Bhagwa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신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 말 속에 서양인들이 말하는 창조주, 만물을 지배하고 관장하는 자라는 뜻은 없고, 다만 지고한 축복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자식을 신이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신은 우리를 자주 혼란스럽게 했다. 스스로를 신이 아니라고도 말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간이 신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도 또한 신이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가 말하는 그런 신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대들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다. 나에게 기대지 말라. 처음에 나는 그대들에게 그대의 전부를 완전히 내맡기라고 말하지만, 때가 되면 나는 비켜 서 버릴 것이다. 혼란스러운가? 그것은 바로 내가 바라던 바다. 나느 그대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대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란을 지켜보는 속에서 그대는 깨어날 수 있다."
"인생은 심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우주적인 농담이다. 농담은 우리를 웃게 만들고, 웃음은 인간의 진실을 엿보게 해 준다.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을 잊지 않도록 해 준다. 숨길 수 없는 인간의 적나라한 현실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지금까지 개달은 자 모두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그들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진리란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나 예수 모두가 제자들로부터 진리에 대한 질문을 받았지만, 그들은 설명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짧은 우화나 예화, 그리고 농담, 설명되어질 수 없는 진리가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설핏 엇비치게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제자들의 질문도 정제되지 않은 엉뚱한 것을 더 좋아했다. 형이상학적으로 윤색된 사변적인 질문을 들고 오면 그는 망치 같은 말로 그들의 빈약한 지식과 한심한 논리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곤 했다.
11) 아름다운 사람
구르지예프는, 보통 사람은 습관적으로 행동하며 사고와 느낌과 행위 중심이 서로 불리되어 있어 진정한 영혼도 진정한 자기 의지도 없이 산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항상 스스로를 자각하고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개방시키라는 게 그의 가르침이다. 메어리는 서른 살 적부터, 항상 자신을 기억하라는 구르지에프의 가르침을 30년 가까이 공부하여 왔으나, 그래도 자기 본질을 잊고 사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방황했고, 인도의 요기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묵타난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 지가 이미 5년이었다.
12) 성에서 깨어나라
브라마차리야(brahmacharya), 바로 자발적인 독신이다. 그것은 성을 통하여 성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돈이 없는 자는 돈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자식이 없는 자는 자식만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무엇을 결여한 상태에 있을수록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로잡히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성 또한 타율적으로 금지당하면 그럴수록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셀리버시(cellibacy, 종교적인 독신상태)를 지키는 수행승일수록 성의 차원에서 한 단계도 고양되지 못하고 얽매여 있는 경우를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13) 인도 무용 공연
14) 라티한
가깝게 지내던 산야신 중 한 명인 요사다르(Yosadar)가 라티한(latihan) 명상을 나에게 가르쳐 주기로 해서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영국 태생인 그녀는 이미 60대지만 아직도 소녀 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혈통이 유태계라 어린 시절에는 악몽 같은 나치의 가스 캠프를 체험하기도 했다. 자기 눈으로 부모 형제가 가스실에서 숨지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거기서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슬픈 추억이 있었다.
"죽음의 캠프에서의 기억도, 그것에서 자유로워지고 말고는 자신의 선택에 달린 거지. 그런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것도 자유고." 그녀의 말은 극한 상황에서 행해진 어떤 행동이 설령 자기 본래의 존엄성을 해치는 것이었다고 해도ㅡ 그 행동도 자유였고 그것을 기억하고 말고도 자유라는 것이었다. 그런 환경에 처해 보지 않고서 누가 무슨 말을 거기에 보탤 수 있으랴.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채로 사는 게 인생인데 말이다.
상상과 환상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기의 진짜 인생을 늦추곤 하는가. 결코 미룰 수 없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인생을 말이다. 명상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결코 미룰 수도 늦출 수도 없는 지금 이 순간을 전적으로 의식하며 사는 것, 하루에 2,3분씩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 정도만 해도 매우 훌륭한 것이다.
"팍 수부는 자신도 모르게 라티한이란 비법을 알게 되었다. 그가 그것에 라티한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새로울 것은 없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탄트라의 한 수행법이다. 라티한은 바로 '마하무드라(우주와의 합일),로 가는 첫 단계다. 그것은 몸으로 하여금 스스로 진동하게 하고, 에너지가 되게 하며, 비물질적인 것으로 되게 내맡기는 것이다. 육체가 녹아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요점은 수부드(subud)라는 말로 압축된다. 그것은 수실라(sushila), 부디(buddhi), 다르마(dharma)라는 다분히 불교적인 단어 셋이 합쳐진 말이다. 수실라는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진정한 인간의 상태, 부디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 속에 깃든 내적인 생명력, 다르마는 신에 대한 절대적 성실과 완전한 내맡김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신은 영원한 생명력, 위대한 진리에 다름 아니다. 수부드는 결국, 인간이 신적인 영원한 생명력에 완전히 복종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라티한은 그 첫걸음이다.
"어떠한 금지나 규제의 마음도 품지 말고, 어떻게 하겠다는 의지도 품지 말고, 오직 내적인 에너지의 흐름만을 주시해. 일체의 선입관을 가져선 안 되니까 나머지 자세한 설명은 뒤로 미루겠어. 다만 긴장을 풀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서서 완전한 개방 상태로 가야 해. 당신 몸의 주인이 당신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까지 말이야. 그래서 무슨 움직임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면 인위적인 힘을 가하지 말고 그 움직임에 따르면 되는 거야."
요사다르는 몇 가지 기본적인 설명을 해 준 뒤에 나를 방 한가운데에 세우고, 음악을 틀었다. 쿤달리니 명상을 해왔던 터라 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닌 상태라는 말의 의미는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라티한은 아무런 격식이나 형식이 없다는 점에서 쿤달리니 명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지시대로 온몸에서 힘을 빼고 무심한 상태로 서 있었다. 요사다르가 심각하게 나를 주시했다. 처음 한동안은 그녀의 존재가 계속 의식되었으나, 얼마쯤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가 까맣게 잊혀져 버렸다.
나는 텅 빈 공백이 되었다. 한참 만에 무언가가 가늘게 내 몸을 스친다는 느낌과 함께 손 쪽에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작은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나의 팔이 무슨 줄에 끌리기라도 하듯 저절로 쭉 올라갔고, 몸의 다른 부분에서도 비논리적인 동작들이 일어났다. 그때 무언가 강렬하고 감당할 수 없는 힘이 위로부터 내 속으로 쑥 밀려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왔고, 나의 몸은 나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제멋대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내 몸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몸을 춤추게 한 것은 내 것이 아닌, 크나큰 또 하나의 에너지였다. 그 춤은 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의 춤, 상념도 사고도 없는 순수한 움직임만의 춤이었다. 거기엔 내가 없고, 단지 움직임만이 있을 뿐, 나는 주인이 가버리고 없는 헐렁개비 무당일 뿐이었다.
내 몸에서 거추장스런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나가 버리는 것 같은 신선함 속에서 그 춤은 계속되었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푸르게 돋아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나는 살아 있지 않았으며, 처음으로 살아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온 세상이 텅 비어 버린 상태, 무언가 내가 주재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듯한 상태, 그런 상태에서 춤은 30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너무도 강렬한 체험이었다. 폭풍 같은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찾아온 것은 고요한 평화였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인간을 지배하는 사고와 관념 등 모든 것을 깨끗이 비우고 텅 빈 상태에 도달하면 비로소 전신을 흐르는 파동감을 느끼게 되고, 새로운 힘에 접하게 된다. 이 힘을 왅전히 수용할 수 있으면 영원의 '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그 연로한 구루에게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모려들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폭포 같은 에너지가 나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고 말하자, 그녀는 그것이 바로 팍 수부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력'이라고 했다. 그런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나는 라티한을 집중적으로 며칠이고 계속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에도 애착이 남지 않았다. 나에게 LSD를 체험하게 했던 요한의 독설이 이해되기도 했다. 그는, 어서 죽어서, 아무런 애착도 느낄 수 없는 이 세상을 빨리 떠나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판국에 아이를 낳는 것은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도 했었다. 이 쯤에서 나도 윤회와 전생의 수레바퀴를 멈추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디까지 온 것일까? 나의 다음 길은 어디일까? 나는 나 혼자 속으로만 자꾸 침잠해 들어갔다.
"바그완, 나는 큰 에너지가 나에게 넘쳐 흐른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더욱 혼자만 있고 싶어집니다. 말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시 나는 침묵 속으로, 히말라야의 어느 동굴 속으로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습니다."
라즈니쉬는 걱정하는 듯했으나, 곧 이렇게 말했다. "네가 이르러야 할 시기에 온 것이다. 지금 내가 너를 살짝 떠밀면 너는 영원히 이 세상을 등질 것이다. 나는 그러나 네가 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너에겐 사명이 있다. 너는 세상으로 가서, 나의 제자로서 나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회오리바람처럼 온 세계에 그 사랑을 전해야 한다. 나는 네가 완전히 도를 깨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제 너는 네가 갈 수 있는 지점에 온 것이다. 혼자 속으로만 침잠하지 말고, 활동하라. 명상은 중지하고 활동을 하라. 사람들 속에 섞이어 무엇이든 함께 하라. 노래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춤을 출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강의록을 번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은 일하는 자를 사랑하며 그를 축복한다. 지금 너에게 넘치는 그 에너지를 발휘하여 보람을 찾아 보라."
15) 나를 부르지 마소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한 청년 산야신에게 커다란 변화가 왔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외부 출입을 중단하고 식음을 전폐한 지가 일주일째라고 했다. 구도에 무척이나 정진하던 청년이었다. 라즈니쉬는 그에게 말했다. "너에게 깨달음의 상황이 온 것이다. 가라, 어디로든 돌아가라. 아무도 이제 너를 돕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침묵했다. 어디로 나아가, 누구를 만나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이 고요함에 동요와 파문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않은가. 침묵. 이 침묵이 바로 나의 진실이다. 이 침묵이 나의 진실인 것은, 나에게 필요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누구에게 오해될 수도, 왜곡될 수도 없다. 침묵은 오직 침묵으로써만 번역될 수 있다. 이 침묵은, 나를 감싸고 있는 이 무한정의 침묵은, 말할 대상물을 잃어버린, 말할 목적을 잃어버린, 말할 욕구를 잃어버린 내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본래적인 침묵이 번역되어 펼쳐져 있는 것이다.
나의 존재 모두는 호흡을 뿐, 나는 사라지고 없다. 나는 이 호흡으로부터 시작하여 호릅에서 끝날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호흡을 돌이킬 수 없을 때, 그때 나는 죽은 것이다. 호흡은 생명의 원천, 그 원천을 나는 지켜보고 있다. 비파사나는 우리 생명의 원천을 잊지 않고 늘 지켜 보는 것이다. 붓다가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16) 묵타난다
17) 나의 길은 나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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