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ㅣ연극놀이-활력옹달샘

베비장전

실다이 2010. 1. 28. 17:57

 

베비장전.hwp

 

 

[제목] 배비장전

 

[페이지] F01

MBC창사26주년기념

마당놀이

"배비장전"

劇本(극본)/金志一(김지일)

MBC문화방송

 

[페이지] 001

나오는 사람들

배비장

애랑

방자

목사

정비장

행수기생

막춤이

쇳소리

농염이

홀딱이

기생들

육방관속들

동리사람들

 

[페이지] 001-1

[막] 제1부

 

[페이지] 007

[장] 1.여는마당

흐드러진 가락과 춤으로 이어지는 길놀이가 체육관을 한바퀴 돌아 마당으로

내려 서면 곧바로 고사로 이어진다.

패거리들의 고사 절에 이어 비나리가 계속되는데, 관객들의 고사 참여를

유도한다.

[패1] 누구든,어느 분이든 나오십시요. 나와서 큰절 올리고 소원을 빌어

보십시요. 영험하기로 소문난 마당놀이 고사외다.

멀리 앉고 높이 앉아 예까지 나오시기 어려운 분은 그냥 앉은 자리에서 두손만

모으고 잠시 소원만 비십시요. 그래도 영험한 마당놀이신 복주고 소원 들어

드립니다. 작년에 이 고사에 참여해서 소원 빈 손님들, 삼대 독자 집안에 아들

낳고, 재수생 삼수생 학력고사 3백점 맞은 학생 수두룩하다고 합디다. 그렇다고

올림픽복권 당첨되게 해달라고 빌지는 마소. 그런건 책임 못지니 ---. (등등

사설과 함께 마당 가까운 손님들을 불러 고사에 참여 시킨다.)

 

[페이지] 008

고사 순서가 모두 끝나면 패거리들 일어나 대형을 이루며 인사하는 노래를

부른다.

[음악1] 오늘 오신 손님 반갑소.(합창)

(*가사 생략)

패거리들 노래를 마치고 마당 가장자리로 넓게 둘러 앉으면 도포차림에 갓쓴

도창자 제법 점잖을 빼며 가운데로 나선다. 이 사람은 뒤에 배비장역을 맡을

사람이다.

[도창] (아니리와 창조를 섞어서) 천지간의 인생중에 남녀를 막론하고 사람의

씨는 같으련만, 그 중에서도 우열이 판이하여 남자에는 현인, 군자와 우부,천맹이

있고, 여자중에도 정부, 열녀와 음녀 간희가 아주 없어지는 일이 없이 대를 이어

오니, 예나 이제나 측량할 수 없는 것은 형형색색 사람의 성질이라 하리라.사람의

성질이란 것은, 살고 있는 고장의 산천이 지니는 풍치와 정기를 많이 닮게 되매,

산 좋고 물 맑은 고장의 사람은 성질이 순후하고 공근하여 악한 기질이 별로

없고, 산천이 험준한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람의 성질이 우준하고 간활하게 나는

법이라.

호남좌도 제주군 한라산은 옛적 탐라국 주산이요.

 

[페이지] 009

남녁 땅에 제일 명산이라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가 어리어서 기생 애랑이가

생겨났다 보더라. 애랑이가 비록 천기로 태어났을 망정 고운 맵시는 월나라

서시와 양귀비를 누를 지경이요, 지혜는 남자로 말하자면 제갈공명에 뒤지지

않고,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을 하였지, 서울 벼슬아치가 걸려들면 상투

끝까지 빠져들어 허덕허덕하는 터이겠다.

(방자가 뛰어 들어온다.)

[방자] 틀렸어, 틀렸어!

[도창] 아니, 촉새같은 녀석이 왜 또 나서는게야?

[방자] 이글스야, 이글스!

[도창] 이글스? 여기가 프로야구하는 운동장인줄 아냐? 갑자기 이글스는 또

무슨 이글스냐?

[방자] 답답한 양반아! 그 이글스가 아니고 이:이미, 글:글러먹은, 스:스타일.

즉 이미 글러먹은 스타일을 줄여서 이글스다 이런 말이오!

[도창] 이미 글러먹은 스타일이라구?

[방자] 암 글러도 한참 글러먹은 스타일이지. 우리 문화 방송 마당놀이가

한두해 한 것도 아니고 일곱해째인데, 마당놀이라 하는 것은 흥겹고, 새롭고,

 

[페이지] 010

현대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알게 됐는데, 도포입고,

갓쓰고, 부채들고 (도창자의 소리를 흉내내어) 천지간의 인생중에 남녀를

막론하고--- 이러고 있으니 그게 어디 마당놀이 스타일이오? 오늘 오신 손님들,

마당놀이 한다기에 왔더니 웬 창극판이 시작되나 해서 실망하시겠오.

[도창] 촉새처럼 나서기만 좋아했지, 뭘 모르는 녀석이로구나. 오늘 놀이가

배비장전인데 이 놀이를 하자면 우선 이 놀이가 발단된 배경을 설명하고 시작해야

손님들 이해하실 것 아니냐? 그래서 고전해학소설 배비장전, 그 원전의

모든사설을 가락붙여 설파하는데 무식한 네놈이 뛰어 들어 훼방을 놓으냐?

[방자] 나는 무식하고 당신은 유식하다? 그럼 당신은 지식인이네?

[도창] 무식한 네놈도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 듣는구나.

[방자] (관객에게) 히히, 지식인이라니까 되게 우쭐거리네요. 지식인이 무슨

뜻인줄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지식인이란 지갑을 잃어 버리고 식식거리는 사람,

또는 지랄하다 식어버린 사람을 가르키는 말인데 말입니다.

 

[페이지] 011

[도창] 이놈! 지금 이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애들 말장난 귀동냥한 실력을

가지고 잘난체 너스레를 떤단 말이냐? 어서 나가 놀아라. 초입 설명을 마저

마쳐야 공연을 시작할게 아니냐?

[방자] 이 양반이 정말 후천성 I.Q.결핍증 환자인가? 몰라도 너무 모르네. 당신

도창이랍시고 하는 그 스타일만 글러먹은게 아니라, 그 사설 내용도 아주

삼천포로 빠졌단 말이오.

[도창] 사설이 틀려? 그게 무슨 소리야? 원전 내용을 한구절, 글씨 한자

안틀리게 외운 것인데.

[방자] 이런 코막고 답답한 양반 봤나? 우리가 고전작품을 마당놀이로 재구성할

때에는 그 작품을 어떤 방향으로 접근해서, 어떤 해석을 내릴 것인가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법이오.

[도창] 어쭈, 제법 유식허게 나오네.

[방자] 잠자코 듣기나 해 봐요. (관객을 향하여) 오늘 우리가 펼칠 배비장전은

한마디로 허식과 허위의식에 사로 잡힌 서울서 내려온 벼슬아치 배비장을

제주도의 토착민인 방자와 기생 애랑이 지나치리만큼 철저하게 골탕먹인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방자와 애랑은 배비장을 그토록 골

 

[페이지] 012

탕먹여야 했던가? 도창양반 사설대로라면, 인간의 천성에 연유한다는 결론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이 작품의 무대가 굳이 제주도이어야 할 필요가

없읍니다. 8도강산 어디인들 방자, 애랑같은 인물이 없었겠읍니까? 사실 이

작품의 방자와 춘향전의 방자나 성격상의 특별한 차이점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또

애랑이만 해도, 이춘풍전의 추월이나, 조선조의 숱한 명기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의 배경은 한양도, 평양도

아닌, 경상도도 황해도도 아닌 제주도입니다. 조선조 중기에 있어서 제주도란

딴나라 처럼 멀기만한 물설고 낯설은 고장인데 굳이 제주도를 배경으로한 작품이

탄생되었는다는 것은 필연적인 연유가 있을 것입니다.

즉 당시 제주도의 특수한 상황과 역사를 알지 못하고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도창] (가로막으며) 야. 침판 필요한거 아니냐? 칠

[방자] 갑자기 칠판이라니?

[도창] 네놈이 무슨 대학교수나 된듯이 강의조로 나오니, 칠 칠판이라도 걸어야

제격일 것 같아서 말이다.

 

[페이지] 013

[방자] 아무래도 이양반은 마추야.

[도창] 마추라니?

[방자] 마당놀이에서 추방해야할 놈이란 뜻이지.

[도창] 그럼 네놈은 진주다.

[방자] 알긴 아누만. 나야말로 마당놀이판의 진주지.

[도창] 주접떠네. 진주란 진흙 속의 주둥아리란 뜻이야.

[방자] (관객에게) 이글스며 A.I.Q.S인 이사람 개의치 마시고 제 말씀 조금만

더 들어 주십시요. 제주도는 고려조까지만 해도 고씨, 문씨들이 세습하는

좌우도지관이 다스렸읍니다. 말하자면 당시로서는 완벽한 지방자치제가 실시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조가 개국하면서 좌우도지관 제도를 폐지하고 대신 경래관 즉

서울서 내려온 벼슬아치인 목사를 파견하요 다스리게 하였읍니다. 지방자치제에서

중앙정부의 직접통치를 받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주도민은 혹독한 부역과 진상품 조달에 시달리게 되었읍니다.

견디다 못하여 육지로 유망하는 백성이 부지기수로 늘어나자 드디어 인조

을묘년에 출륙금지령마저 내려집니다. 이 출륙금지령은 이후 2백년간

계속되었거니와, 섬사

 

[페이지] 014

사람들이 돛배를 만들어 부리는 것을 금하였는데 돛배를 사용하게 하면 사람들이

고기 낚는다는 핑계로 먼 바다에 나갔다가 육지로 도망칠 것이 뻔한 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배라고는 앉은뱅이 뗏목배들만이 해변을 맴돌 뿐이요, 육지를 왕래할

수 있는 배라곤 한달에 한번씩 진상품 실어나르는 배가 있으나, 배가 출선할

때마다 진장이 군관을 데리고 나와 출선기와 대조하면서 몰래 출륙하는 자를

색출해 냈으니, 진상가는 전복 꾸러미에 달라붙은 초파리가 아닌 바에야 이 섬을

빠져 나가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었읍니다. 이러고 보니 제주도란 물위에 떠 있는

감옥이요, 제주 백성은 그 감옥에 갇힌 옥살이 신세였읍니다. 게다가 내려오는

관장마다 명관이라더니, 제주성의 산지 물을 사흘만 먹으면 모두 한가지로 탐관이

된다는 속언이 있을 정도로 경래관들의 토색질은 조선8도 그 어느 곳보다

극심했읍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극변인데다가 백성들이 출륙 금지된 곳이니,

토색질을 하자고만 들면 앉은뱅이 턱차기로 쉬웠던 것입니다. 수령들의 작폐를

조정에 고변하려고 하여도 출륙을 금하고 있으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읍니다.

조정에서는

 

[페이지] 015

섬 백성의 눈에 고름이 넘쳐도 알지 못하고 원성이 하늘에 닿아도 들리지

않았읍니다. 이백년간이나 물위에 떠 있는 뇌옥에 갇힌 옥살이에 군역이며 왕실

진상의 막중한 책무로 허리펼 날이 없었던 제주 백성들의 그 원과 그 한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읍니까? 설명이 좀 장황하게 길어졌으나, 이러한 제주도의

특수한 상황과 역사가 방자나 애랑의 행동을 유발시킨 근원적인 원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방자와 애랑의 행동은 배비장이 대표하는 외세에 대한 주체적이며

자주적인 저항이었으며,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당연한 투쟁의 한방편으로

해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작품의 무대가 제주도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창] (나서며) 가만 있자, 그러고 보니 너는 일부 극소수 의식화된

급진주의자가 아니냐?

[방자] 그건 벌써 옛날 표현이고, 요즈음 말로는 깨어있는 민중의 한명이라고

하는 거요.

[도창] 아니 이거 우리 마당놀이 패에도 언제 외부세력이 침투했나? 이놈

사설이 점점 수상해 지네.

 

[페이지] 016

[방자]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도창] 너 혹사 위장취업자 아니냐?

[방자] 에게 여보쇼. 내가 마당놀이 시작었고 한번도 쉬지 않고 참여 했는데

위장취업은 무슨 위장 취업이야? 내가 저 손님들 틈에 앉어야 위장취업이지.

당신이야말로 세상이 하루 다르게 변해가는데 고여서 썩은 머리로 있다간 정말

마추야! 이글스에 A.I.Q.S 양반아!

[도창] 야, 세월 좋다. 세월 좋아졌어. 몇달 전만 같아도 너 같은 놈, 수배자

명단에 들어 있었을 테고, 붙들려가면 그 촉새 주둥이 물 먹느라 나불댈 틈

없었을 터인데.

[방자] 여보쇼, 그 세월 좋아지게 하는데 우리 문화방송 마당놀이가 한 몫

거들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 않소?

[도창] 한이로다. 너 같은 놈 원천봉쇄 못한 것이 한이로다.

[방자] 이 양반이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네.

[도창] 좋다.(갑자기 한손을 들고 선서라도 하듯) 역사와 민족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엄숙히 선언하노라! 윤문식! (혹은 다른 패거리의 이름을

부르며) 이

 

[페이지] 017

시간이후 너 하고 싶은 대로, 네 멋대로, 네 마음대로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급히 퇴장한다.)

[방자] 아니 오늘이 6월 29일인줄 아나 선언은 무슨 선언이야!

글쎄 저 양반 본심이든 아니든 무슨 다른 음모를 가졌든 안가졌든 인간에 대한

신선한 신뢰를 가지고 저양반의 선언을 접수하기로 하겠읍니다. 자 그러면 탐라!

제주의 아름다운 풍물을 소개하는 것이 순서가 되겠지요. 이 장면은 어느 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영화의 기법에서 공중에서 접근하면서 제주의 원경이

점차 크로즈업 되고 다시 카메라가 빠르게 이동하며 제주의 이곳 저곳을 훑어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페이지] 018

[장] 2.제주 풍물마당

이 장면은 네 패의 중창이 순서대로 소개되고, 이 네패가 서로 엇갈리고,

한패로 어울리는 합창이 되게 구성한다. 또는 처음에 합창으로 시작되고 거기서

중창 1,2,3,4로 전개 되었다가 서로 엇갈리고, 한패가 되게하는 구성을 할 수도

있다. 패거리의 사정이 허락한다면 네개의 중창은 각기 배역적 특성을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어부라든가, 해녀라든가, 농부라든가, 테우리(말몰이꾼)라든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패거리들의 해설적인 사설의 중창, 합창으로

처리해도 무방하다.

[음악2]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음악은 제주민요의 여러 형태를 모티브로 활용한다. 그러나 그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합창에서 중창으로, 또는 중창에서 중창으로 변조되는 과정을

민요적 선율로 처리하면 된다. 또한 합창이나 중창이 충분히 율동적일 수 있도록

배려한다.

[합창]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 섬, 물에 뜬 뇌옥

 

[페이지] 019

바람이 불지않는 날에도

물결은 길길이 솟아 오르고

삼백리라 섬둘레 바닷 속은

칼날같은 암초 투성이인데

출륙금지령 이백년에

육지구경 꿈속에서나 해볼까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 섬, 물에 뜬 뇌옥.

(한무리 중창단이 간추에 마추어 나온다. 그들은 어부다.)

[중창1] 돛배 만들줄 몰라

삼나무 뗏목 탄다

물정 모르는 육지손님

지레짐작 아는체 마소

먼 바다로 나가게하면

섬백성 육지로 도망칠까

돛배는 만들지도 타지도 못하게

나랏님이 금한줄 모르시리.

[합창]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섬, 물에 뜬 뇌옥.

(간주에 다시 한패의 중창단 나온다. 잠녀들이다.)

 

[페이지] 020

[중창2] 푸른 살갗 매끄러운 비바리

물질하는 벗은몸 보고

해괴한 풍습이라

육지손님 비웃지 마소.

하 많은 진상 어물

남정네만으로 물량 채울수 없어

마누라 딸자식까지 물질 시키는

제주 어부의 한을 모르시리.

[합창]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섬, 물에 뜬 뇌옥.

(또 한패의 중창단, 농부들이다.)

[중창3] 갈중의 갈적삼 맨상투에

표정없는 제주백성보고

무지하고 야만스럽다

육지손님 비웃지 마소

돌짝 밭의 밭고랑 타고

뻘뻘 기어다니느라

허구헌날 누더기 벗을겨를 없는

제주 농투성이의 한을 아시리

[합창] 탐라국 태평성대 옛말이오

 

[페이지] 021

제주는 갇힌섬, 물에 뜬 뇌옥

[중창4] 쟁반에 놓인귤 석양비치니

금방울 튀듯이 영롱하여라

물정 모르는 육지손님

귤 예찬 노래, 한숨 나오

귤 나무는 집 울안에 있건만

주인은 엉뚱한 남이라오

꽃질 때 열매 수효 적었다

그 수대로 진상하는 사정 모르리.

[합창]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섬, 물에 뜬 뇌옥

바람이 불지 않는 날에도

물결은 길길이 솟아 오르고

삼백리라 섬둘레 바닷 속은

칼날같은 암초 투성이인데

출륙금지령 이백년에

육지구경 꿈속에서나 해볼까

탐라국 태평성대는 옛말이오

제주는 갇힌섬, 물에 뜬 뇌옥

(패거리들의 춤과 노래가 사라지면서 대취타 소리. 신임 목사

 

[페이지] 022

의 행렬이 등장한다. 대취타 계속되는데 행차는 제주의 풍광에 넋을 잃었음이

완연하다. 처음엔 정연하던 행열이 넋을 잃은 비장과 관속들에 의해 무질서 해

진듯하다. 이 행열은 길놀이의 장소에서 부터 등장해도 좋다. 행열이 마당

가운데로 들어서면 행열이 잠시 멈춘다. 목사도 제주의 풍광에 심취한 듯하다.)

[목사] 과연 듣던대로 제주의 풍광은 장관이로구나. 한양을 떠난지 스무날,

육로 천리의 노독과 하루낮 하루 밤의 뱃길에 초죽음 되었더니 그 고생이 일시에

걷히는듯 하구나.

[음악3] 과연 제주

[목사] 지나오는 마을마다

동백꽃은 붉게 되고

복사꽃은 만걔하여

꽃구름 깔린듯한데

바다엔 물오리같이

떼를지어 물질하는

비바리들의 휘파람소리

비바리들의 휘파람소리

호이 호이 한가롭구나

 

[페이지] 023

장을 잡는다. 주위의 행열은 마치 그림자처럼 보인다. 무질서한 행열 중에

우리의 배비장만 의연한 걸음이다. 주위의 사람들과 대조적이다. 앙천의 고개를

잔뜩 쳐든 모습. 갈 짓자 걸음에 휘젓는 팔이 기묘한 춤이 되는데 패거리들의

합창.)

[음악4] 누구인가 저 사나이는?

[합창] 누구인가 저 사나이

누구인가 저 사나이

아, 배비장 우리의 배비장

나으리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합창에 맞춘 독무처럼 배비장의 춤이 이어 지는데 방자에게 스폿트. 합창이

끝나면서 방자가 배비장에게 접근한다.)

[방자] 나는 이 행차 중에 바로 이 사람을 골랐읍니다.

 

[페이지] 024

[장] 3.정비장 이별 마당

이 장면은 방자가 배비장에게 접근한데서 부터 이어진다. 어두어졌던 조명이

서서히 밝아지면 방자와 배비장만 남아있다.

[방자] 예방 나으리, 여기가 제주 초입이옵고, 저기 저 정자가 제주 18경중

제1경이라 일컬으는 망월루라 하옵니다.

[배] 과연 그럴듯 하구나. 어디 올라가 보자.

[방자] 잠간, 저기 한쌍 남녀가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 있는듯 하옵니다.

[배] 오라. 그런데 저들이 누구냐?

[방자] 구관 사또가 신임하던 정비장 나으리와 수청기생 애랑이의 애타는 듯한

이별인가 하옵니다.

[배] 수청기생과 이별이라?

[방자] 자, 이리로 오십시요. 숨 넘어가는 이별을 방해할 수는 없고 이쪽에

잠시 앉아 기다려 보십시다.

(배비장과 방자 패거리들 틈에 끼어 앉는다. 이미 나와 서로 부둥켜 안고 있던

애랑과 정비장. 흐느껴 울며 포옹을 푼다.)

 

[페이지] 025

[중창] 삿도 삿도 우리 삿도

입을 열면 시가 되고

글 읽으면 노래 되는

우리 삿도 풍류 삿도

[목사] 탐라 주봉 한라산은

흰눈을 관처럼 쓰고

영등바람 물러가니

여기저기 봄빛이요

겨울지낸 개자리떼

초록빛이 완연한데

굴뚝새들이 호륵 호르륵

이리저리 들락거리네.

[중창] 삿도 삿도 우리 삿도

입을 열면 시가 되고

글 읽으면 노래되는

고개는 잔뜩 뒤로 젖히고

두 발자국 나갔다

한 발자국 물러서고

휘휘 팔을 휘저으며

갈 짓자로 걸어가는

 

[페이지] 026

저 사나이가 누구인가

아, 배비장, 우리의 배비장

나으리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누구인가 저 사나이

누구인가 저 사나이

뻣뻣한 목을 위로 세우고

불쑥 배를 내밀고

없는 수염 매만지며

휘휘 팔을 휘저으며

양반걸음 걸어가는

저 사나이가 누구인가

우리 삿도 풍류 삿도.

(행열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자가 한쪽에 나선다.)

[방자] 풍류 삿도라! 글쎄 올시다. 목민관이라고 풍류에 젖음을 나무랄 수야

없겠으나 매사를 풍류로만 바라 보아서야 어디 백성들의 속사정을 알 수

있겠읍니까? 백성들의 깊은 속내를 모르고서야 바른 치정이 가능하겠읍니까?

(이동안 배비장의 모티브 음악이 지금까지의 음악을 헤집고 나타난다. 그리고

모명이 점차 어두워 지는데 스폿트가 배어

 

[페이지] 027

[음악5] 이별의 노래

(이 대목은 전체가 음악이 된다. 말하자면 오페라의 한 대목처럼)

[정]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제 가면 언제 보리

너를 두고 가자 하니

걸음 걸음 피가 되네

우미인을 이별하던

항우와의 슬픔인들

양귀비를 이별하던

당명황의 슬픔인들

너를두고 떠나가는

이슬픔만 하였으랴

수륙만리 헤어져도

오매불망 일심으로

그리기는 애랑너뿐

부디부디 잘있거라.

[애랑] 나으리, 나으리 들어 보시오

나으리 계실 때에는

먹고 입고 살기에

걱정없이 세월을 보냈더니

 

[페이지] 028

이제 이 한몸 누구에게

의탁하여 살라고

나으리 떠나시옵니까?

[정비] 그대는 그런 염려일랑

하지 않아도 좋으이

사나이 대장부가

아릿다운 여인과 이별하면서

그만한 배려가 없으랴

내 떠나 가더라도

한동안 그대 먹고 쓰기에

넉넉하게 뱃짐을

넉넉하게 뱃짐을

풀어 주고 가리라!

(레시) 고직이 들라

[고직] (레시) 예이.

[정비] (레시) 뱃짐을 풀어 내오라. 애랑에게 주고 가리라.

[고직] (레시) 예 -. 뱃짐이 많사온데 무엇 무엇을 풀으리까?

[정비] (레시) 우선 옷감으로 중양한통, 세양한통, 탕건 한짐

[고직] (레시) 예, 날라라!

 

[페이지] 029

(손짓하면 짐을 진 사람들 마당을 가로 질러 간다. 이후 계속)

[애랑] (레시) 옷만 입고 사나요?

[정비] (레시) 그럼 병났을때 쓰라고 우황 열근, 인삼 열근

[고직] (레시) 네, 날라라!

[애랑] (레시) 약만먹고 사나요.

(음악 점점 빨라진다.)

[정비] (레시) 추울때 춥지 말라고 말꼬리털 백근, 말가죽 사십장, 사슴가죽

이십장

[고직] (레시) 네, 날라라!

[애랑] (레시) 이불만 덥고 사나요.

[정비] (레시) 밥반찬 하라고 홍합, 전복, 문어, 삼치, 석어, 큰새우, 미역,

다시마 한짐씩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레시) 해물만 먹고 사나요.

[정비] (레시) 그럼 밥먹고 입가심으로 유자, 백자, 석류, 비자 한짐씩.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과일만 먹고 사나요?

[정비] (레시) 또 있다, 또 있어.

 

[페이지] 030

삼층난간 용봉장, 이층문갑, 서랍달린 경대, 산유자 궤, 쌀뒤주, 반다지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레시) 세간살이 있다고 사나요.

[정비장] (레시) 또 있다, 또 있어. 살찐 제주말 두필에, 당나귀 세마리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레시) 서방님 없는데 말, 당나귀는 언제 타나요?

[정비] (레시) 내 한양 가거든 편지 자주 하라고, 간지 열축, 간필 한통, 초필

한통, 연적 열개.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레시) 하루도 걸르지 않고 남께 편지쓴다 한들 긴긴하루, 긴긴

독수공방 어이 지내리요?

[정비] (레시) 심심하면 담배피우라고. 쌍수복 백동대 장죽 한켤레, 담배열근.

[고직] (레시) 예-. 날라라!

[애랑] (레시) 추야장 긴밤을 빼끔빼끔 담배만 피우라니까!

[정비] (레시) 그래도 심심하면 술빚어 먹으라고 생청 한되, 숙청 한되, 날밤

한되, 마늘한접, 생강 한근, 찹쌀 열섬, 고추 스무근, 호초 한근, 아구배한접.

 

[페이지] 031

[고직] (레시) 예-. 날라라. (관객에게) 저작자 제주올때 빈 몸으로 배에서

내렸는데 기생에게 주는 물건만도 저리 많으니,저 물건 다 어디서 났을까요?

(애랑 짐짓 슬픔을 못 견디겠다는 듯 본격적으로 노래를 한다.)

[애랑] 나으리 주신기물

천금인들 무슨 소용이리요

백년을 헤어지지 말자

철석같이 맺은 계약

일장춘몽 허사인데

이몸 홀로남아 어찌 살리까

한양천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보내옵고

추야장 기나긴밤

낭군님 보고지고

낭군님 보고지고

상사고에 이몸 병이들면

님은 수륙만리 먼 곳에

이몸은 필경 죽을 것이니

죽어서 혼백이 되어

한양낭군 따라갈까.

 

[페이지] 032

아, 아 생각사록

이내 신세 슬프고 슬프네

애닯고 복통하여라

아이고- 아이고-.

[정비] (레시) 아이고-. 네 슬픈 노래 사나이의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아이고-.

[애랑] (레시) 나으리 떠나신 후에도, 나으리를 잊지 않도록 정표를 주고

떠나옵소서.

[정비] 정표, 오냐. 무엇이든 말해라. 내 너에게 주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어서 말해라.

[애랑] (노래) 나으리 입으시던갓, 두루마기 벗어주고 갑서.

[정비] (레시) 갓두루마기를?

[애랑] (노래) 갓두루마기 소녀에게 주고 가옵시면

갓두루마기 한 자락은 펼쳐깔고

또 한 자락은 흠썩 덥고

두 소매는 착착 접어

베개 삼아 베고 자면

나으리 품에 누운 듯

근들 아니 다정하리오.

[정비] 알았다, 알았어. 갓두루마기 벗어줄 터이니 깔고 덮고 베고 잘 때 부디

나를 잊지 마라.

 

[페이지] 033

(정비장 떠나려 한다. 막아서는 애랑.)

[애랑]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차고 계신

철병도를 소녀에게 끌러 주고 가옵소서.

[정비] (레시) 나의 방신 보검을?

[애랑] 님을 보내고 독수공방 지낼적에

이 몸을 욕심내어

담 넘어 뛰어드는

불한당이 어찌 없으리요.

어느 놈이든 내방에 뛰어들면

나으리가 주신 그 칼로

키 큰 놈은 배를 찌르고

키 적은 놈은 목을 찔러

멀리 훌쩍 물리치면

나으리를 위하여

이몸 절개 지킬 것이니

근들 어찌 다정치 않으리요?

[정비] 외로운데 충신나고 친한데서 열녀 난다더니 너야 말로 만고에 열녀로다.

엣다, 이칼 받아라.

(정비장 칼을 풀어 주고 가려한다. 다시 막아서는 애랑.)

 

[페이지] 034

[애랑]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입으시던

숙수창의 분주바지

상하의복 벗어주고 갑서.

[정비] 여복도 아닌 남복을 무엇에 쓰려 하느냐?

[애랑랑] 나으리의 상하의복

횟대에 걸어 두오면

이별낭군 가고 없어도

누웠는듯 소피 간듯

일천설음 일만근심

옷만 보면 풀어지니

님보내고 애통하는

소녀위해 벗어줍소.

[정비] 오냐 벗어주마! 이 옷보고 부디 시름 잊거라.

(나가려는 정비장 막는 애랑)

[애랑] 나으리, 나으리

나으리 입으시던

고의적삼 소녀에게

벗어 주고 갑서예.

[정비] 아니 속옷까지?

[애랑] 입으시던 고의 적삼

소녀에게 벗어주면

 

[페이지] 035

제 손으로 착착 접어

잠 못 이뤄 누웠다가

이 가슴에 담쑥 안아보고

향기로운 임의 냄새

폴싹 폴싹 코에 닿으면

근들 아니 다정하리오.

[정비] 오냐 알았다. 며칠 입은 고의적삼이니 냄새는 많이 배었으리라.

(정비장 나가려는데)

[애랑] 나으리.

[정비] 아니, 이 정비장이 알비장이 되었는데도 또 뭐가 남았단 말이냐? 에취-.

[애랑] 아무리 나으리가 다정하다 하셔도 소녀 뜻만 못하오!

[정비] 무엇인지 빨리 말해라. 바닷바람이 차구나. 에취-.

[애랑] 나으리, 나으리

분벽사창에 마주 앉아

당싯 당싯 웃으시던

앞니 하나 빼어 줍서예.

[정비] (놀라서) 무엇이? 앞니를?

[애랑] 앞니 하나 빼어 주면

 

[페이지] 036

손수건에 싸고 싸서

백옥함에 넣어두고

눈에 암맘 귀에 쟁쟁

님의 얼굴 보고 싶을 때

종종 꺼내 슬픔 풀고

소녀 죽은 후에라도

관 구석에 지녀가면

합장일체 될 것이니

근들 아니 다정하리오?

[정비] 오, 애랑아 네가 그토록이나 나를 생각하는 줄 몰랐구나! 공방고자 게

있느냐? 장도리와 집게를 대령하라!

[공방] (큰 집게를 들고 춤추듯 겅중거리며 뛰어 들어오며) 예이-. 벌써부터

부르시기 기다린지 오래이옵니다.

[정비] 너는 이를 얼마나 빼어 보았느냐?

[공방] 네. 많이는 못 빼어 보았으나, 앞니 뽑은 것만서너말은 될 것이옵니다.

[정비] 이놈, 제주 이는 물봉친 놈이로구나. 다른 이는 상치 않게 앞니 한개만

쑥 빼어라.

[공방] 소인이 이 빼기에는 이골이 났사오니 어련하오리까? 입이나 크게

벌리시오.

 

[페이지] 037

[정비] 아-.

(코믹한 음악. 서양음악이라면 탱고조가 제격일 것이다. 음악에 맞추어 두 사람

춤추듯 어룬다. 한동안-. 공방고자 전진후퇴 좌우요동 정비장을 집게로 끌고

다니다가 정비장의 콧등을 때린다.)

[정비] 아이구! 이놈 너더러 이를 빼랬지 코 빼라고 하더냐?

[공방] 울려서 쑥 빠지게 하느라고 코를 좀 쳤오. 자 이제는 뺄터이니 입을 더

크게 벌리시오.

[정비] 아-.

(공방 다시 어루다 이를 잡아 뺀다.)

[정비] 아이구. (입을 싸쥐고 주저 앉는다.)

[공방] 빠졌읍니다, 빠졌어요.

(밖에서 사령이 뛰어든다. 그리고 출선을 알리는 북소리.)

[사령] 비장나리, 배 떠난다고 야단입니다. 어서 승선하시랍니다!

[정비] 아이구 이야! 에취-. 애랑아 나는 간다.

(나간다)

[애랑] (따라가며 슬픈듯) 나으리-.

(정비장 아주 나가자 태도가 표변하여 우뚝 서

 

[페이지] 038

서) 나으리 여기가 제주입니다.(정비장이 벗은 옷가지를 움켜 안는다)

[공방] 아씨, 이 이빨 어쩔까요?

[애랑] 호호, 가마귀가 물어 가게 어느집 지붕위에다 던져 버리시오.

[공방] 하하하! (티징)

(애랑 엉덩이 짓을 요란하게 퇴장한다. 방자와 배비장 정비장과 애랑 퇴장한

곳을 두리번 거리며 등장)

[방자] 나으리 보셨지요? 나으리께서도 조십하십시요. 잘못하시다가는 저렇게

껍데기 홀랑 벗고 가십니다.

[배] 허랑한 장부로다. 이 친척원부모하고 육로천리 수호천리 밖에 와서

아녀자에 빠져 저다지 망신하니 체면이 아니로구나.

[방자] 나으리도 너무 큰 소리 마옵소서. 내가 서울서 내려온 나으리들을

숱하게 모셔 봤으나 치질병 안걸린 나으리 없읍디다.

[배] 아니, 치질이라니?

[방자] 치질, 즉 치마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는 병 말입니다.

[배] 이놈, 나를 저 허랑한 정비장과 같은 사람으로

 

[페이지] 039

여기느냐? 내가 팔도강산 좋은데를 안가본 데가 없고 절대가인 경국미색 두릅으로

보았으나 왼편 눈이라도 한번만 꿈쩍 했으면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

[방자] 정 그러시다면 소인과 내기 하십시다.

[배] 내기라니, 무슨 내기를 하잔 말이냐?

[방자] 나으리께서 올라가시기 전에 계집에게 눈을 아니 뜨시면 소인의

다솔식구가 댁에 가서 드난 밥을 먹삽고, 만일 나으리께서 계집에게 눈을 뜨시면

타시고 계시는 말을 소인에게 주십시요.

[배] 좋다. 그렇게 하여라. 말 값이 천금이 된다 하더라도 내기하고 너를

속이겠느냐? 내 안장까지 얹혀서 주마. 그러나 너희 식구가 내 집에 와서 평생

드난살이를 할려면 좀 고될 것이다. 하하하.

[방자] 예, 예. 그렇게만 되기를 소인도 바라옵니다.

[베] 어서 가자. (퇴장)

[방자] 예. 허지만 나리의 말은 이제 소인의 것입니다. 하하-. (따라 나간다.)

 

[페이지] 040

[장] 4. 신연잔치 마당

사또와 육방관속 잔치 상을 받고 있다. 사또의 좌우에는 기생 두 명이 이미

자리하고 있으나 육방들에게는 아직 기생이 없다.

좌우에서 기생들이 나오며 노래와 춤을 춘다.

[음악6] 어쩌다 거리에 핀 꽃되어

[기생들] 가련하다 이내신세

거리에 핀 꽃이되어

이손 저손에 꺾이는

기생팔자 웬말이냐

오늘은 이품에서

내일은 저품에서

한숨 짓는 이내 심사

그 누구라 알아주나

가련하다 가련하다

어느년은 팔자 좋아

고대광실 호의 호식

서방덕 늘어졌는데

 

[페이지] 041

오늘은 이품으로

내일은 저품으로

넘나드는 기생신세

그 누구라 알아주나.

(기생들 노래와 춤이 끝나면서 날아갈듯 사또에게 큰 절을 한다. 사또 호탕하게

웃으며 일어난다.)

[목사] 하하하! 육방은 들으라. 그대들 육로 천리, 수로 천리 본관의 도임을

배행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오늘은 그대들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것이니 마음껏 들고 마음껏 즐기라!

[육방] 황감하옵니다.

[목사] 행수기생은 들으라!

[행수] 예이-.

[목사] 너는 관기들 중에서 반반한 것들을 골라 육방들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시중을 들게 하라.

[행수] 예이-.

[목사] 그대들 오늘은 모든 것을 잊고 진탕 마시고, 회포를 풀라!

[육방] 황감하옵니다.

(행수의 지시에 따라 기생들 하나씩 육방들의 상으로 나간다.

 

[페이지] 042

육방들은 대번에 노골적인 수작을 기생들과 벌인다. 제일 마지막으로 특유의

자세로 꼿꼿이 앉아 있는 배비장에게 기생한명 다가간다. 뻣뻣한 배비장을 보고

기생 교태를 부리며 안기려 한다. 배비장 무엇에라도 놀란듯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생도 따라 일어나며 더욱 교태를 부린다. 배비장 한발자욱 물러난다.)

[기생] 나으리!

[배] 아니? 이애가 왜 이러느냐?

[기생1] (콧소리로) 나으리야말로 왜 이러십니까? 남자중의 남자로 생기신

분이.

[배] 아니 이런, 아무리 기생이라 하나 계집이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기생1] (더욱 교태스럽게) 쇤네가 어디 틀린 말씀 올렸읍니까? 이 넓은 가슴,

이 우람한 허리. (가슴과 허리를 쓰다듬다가, 배비장의 코를 잡으며) 게다가 이

우뚝하게 솟은 코, 아이 나으리. (허리를 비틀며 교태를 부린다)

[배] (몸에 붙은 송충이라도 털어 버리듯 기생을 밀치며) 에이, 요망한 계집!

(기생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진다. 쓰러진 기생은 보지도 않고 사또 앞으로

나간다) 사또!

 

[페이지] 043

[목사] (옆의 기생과 수작을 하다가) 어? 예방, 무슨 일인가?

[배] 소인은 그만 사처로 돌아가 쉴까 하오니 허락하여 주옵소서.

[목사] 그대들을 위하여 베푼 잔치가 이제 시작인데 사처로 돌아가겠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배] 사또님의 배려 황감하오나, 소인은 몸이 불편한여------.

[목사] 그래? 그대 도선중에 심히 수질을 하더니 아직도 증세가 남아있는

모양이로군. 그럼 안되지. 객지에서는 건강이 제일이니 쉬도록하게.

[배] 감사하옵니다.

(배비장 퇴장하려다가 한쪽에 서 있는 행수기생을 발견하고 그리로 간다.)

[배] 그대가 관기들을 다스리는 행수렸다.

[행수] 예, 그러하옵니다. 무슨 분부가 계시온지요.

[배] 지금 이후로 기생년들을 내 눈앞에 비치지 않도록 하라.

[행수] 무슨 분부이신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읍니다.

[배] 기생년들이 내 눈에 띠게하지 말라는 말이다. 만일 한년이라도 다시 내게

보인다면 너를 엄하곤

 

[페이지] 044

장으로 다스릴 터이다.

[행수] 당치 않은 부분이시옵니다.

[배] 당치 않다니?

[행수] 관아의 대소연에 관기들이 출입하는 것은 당연하옵고, 제발로 자유로히

왕래하는 기생들을 어떻게 쇤네의 힘으로 나으리의 눈에 띠지 않도록 하옵니까?

[배] 그러니 네가 관기들에게 단단히 신칙하여 내 눈앞에 비치지 않도록 하란

말이다.

[행수] 아이들에게 이르기는 하오리다마는, 아마도 나으리께서 두눈을 감고

행차하시는 것이 더 쉽지 않겠아옵니까?

[배] (때릴듯이 손을 들며) 발칙한 것이!

[행수] 에그머니나! (놀라서 달아나듯 사또 곁으로 간다. 배비장 퇴장한다.)

[목사] 행수는 어이하여 호들갑을 떠느냐?

[행수] 사또! 배비장 나으리께서, 앞으로 관기중 어느년이라도 자기 눈에 띄는

날이면 쇤네를 곤장으로 다스린다 하옵니다.

[목사] 허허, 그 무슨 소린고?

(방자가 나선다.)

 

[페이지] 045

[방자] 사또! 예방 나으리 사또를 배행차 한양을 떠나면서 노모와 아내에게

굳게 맹세를 했다하옵니다.

[목사] 무슨 맹세를 했단 말이냐?

[방자] 만일 제주에 가서 여인을 가까이 하는 일이 추호라도 있으면 거먹쇠

아들이라고 했다하옵니다.

[목사] 허허허. 그러니까 여인금제의 맹세를 했단 말이로구나. 그래서 오늘

잔치도 마다하고 자처로 돌아갔단 말이지. 굳게 결심한 바가 있다면 방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하하하!

[방자] 사또! 그리 웃어 넘길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목사] 웃을 일이 아니라니?

[방자] 사또, 생각해 보십시요. 사또께서는 뛰어 나신 풍류남아이신데 예방

소임을 맡은 비장이 저리도 뻣뻣하오면, 어찌 사또께서 마음 놓고 풍류를 즐기실

수 있겠아옵니까?

[목사] 배비장 때문에 내가 풍류를 즐길 수 없다?

[방자] 그렇사옵니다. 풍류란 첫째가 분위기이온데 수하에 저렇듯 소졸한

위인이 있어 매사에 흥을 깬다면, 사또의 풍류놀이가 어찌 즐거울 수가

있겠읍니까?

[목사] 그렇다고 비장 하나 때문에 내가 풍류를 못할이가 있나?

 

[페이지] 046

[사또] 그렇지 않사옵니다. 예방이 저만 양반의 도리를 다하는 척, 또는 선비의

몸가짐이 자신과 같아야한다는 듯 처신한다면 아무리 목사님이라한들, 수하

관속들은 물론 백성들 앞에 처신 하시기가 어색해지지 않겠아옵니까?

[목사] 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 하다. 하면 이일을 어찌해야 좋을고?

[방자] 그야 한시 바삐 예방을 파겁시켜 다시는 허식에 가득찬 행동을 못하게

해야 합지요.

[목사] 그렇다. 저 혼자 군자인척 하는 예방을 한시라도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 모든 기생을 한자리로 모아라!

 

[페이지] 047

[장] 5. 배비장 공략 마당

이 장면은 무대가 병치 형식으로 변한다. 목사가 기생을 소집한 동헌과

배비장의 사처가 병치되는 것이다.

[음악7] 무곡 출동

음악은 기묘한 팡파레처럼 울린다. 일종의 전투를 위한 소집 음악이다. 물론

소집 음악의 기묘한, 코믹한 변형이다.

음악에 맞추어 기생들 전사들처럼 대형을 이루며 목사 앞으로 집결하고 목사는

지휘관처럼 도열한 기생들 앞에 나선다.

[목사] 내 너희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방을 맡은 배비장이 결심한 바

있다하여, 본관이 베푼주연에도 끼이지 않고, 무리를 피하여 홀로 군자인척

처신하니 심히 민망하다. 너희 여러 기생중에 배비장을 혹하게 하여, 파겁을

시키는 자가 있으면 중상을 내릴 것인즉 누가 능히 거행할 자 있겠느냐?

(여기서 이 장면은 춘향전의 변학도 기생점고가 변형되어 도

 

[페이지] 048

입된다.)

[막춤] 쇤네가 나서 보겠나이다.

[목사] 장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음악8] 막춤이의 출동

[호방] 손들면 춤 발들면 춤

이춤 저춤 춤 잘춘다

막춤이

[관속] 이춤 저춤 잘춘다

막춤이

[목사] (술잔을 주며) 특별히 술 한잔을 내리니 단숨에 마시고, 배비장을

녹여라!

[막춤] (삼국지의 관운장처럼) 잠시만 그 술잔을 맡아 주옵소서. 이몸 당장

나아가 배비장을 흐물흐물하게 녹이고 돌아와 그 잔을 받겠나이다. 쇤네 기필코

그 술잔이 식기전에 이기고 돌아 오겠나이다.

[목사] (지휘봉을 높이 들었다 내리며) 오 믿음직한 그말! 막춤이 출전하라!

(음악이 요란한 장단으로 터지면서 막춤이 멋대로 춤을 추기 시작하면, 배비장

한쪽에 특유의 양천자세로 등장.

 

[페이지] 049

막춤이 춤을 추며 배비장의 곁으로 다가가서 배비장을 유혹하기 위하여

갖가지의 춤을 춘다. 배비장 이리 저리 피하는 듯, 또는 개탄하는 듯 움직이며

막춤이를 살피기도 한다. 이러한 배비장의 모습이 또 묘한 춤이되어 막춤이와

대무가 된다. 한동안.)

[배] (부채로 막춤이의 머리를 때리며) 이년, 네년의 간질병은 어렸을 때부터

있던 병이냐?

(방자가 미리부터 마치 씨름판의 심판처럼 두 사람의 주위를 돌다가 호르라기를

불면서 배비장의 승리를 선언한다. 더욱 고개를 세우고 배를 내미는 배비장.

목사는 낭패한듯 고개를 이리 저리 흔든다. 기생 쇳소리가 앞으로 나선다.)

[쇳소리] 이번엔 쇤네가 나서 보겠나이다.

[목사] 오냐,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음악9] 쇳소리 출동!

[호방] 소리 못해 죽은 귀신

목청좋고 박자좋다

쇳소리

[관속] 목청좋고 박자좋다

쇳소리

[쇳소리] 이 쇳소리를 내 보내 주옵소서.

 

[페이지] 050

[목사] (지휘봉을 내리며) 어서 출진하라!

[쇳소리] (군례처럼 무릎을 꿇으며) 예-. 기필코 적장을 사로잡고 말겠나이다.

으이-. 어이-. (기성을 지르며 일어난다.음악이 변조되면 "투우사의 합창"같은

곡조가 된다. 쇳소리 마치 오페라 가수처럼 두손은 모으고 배비장에게 다가 가

주위를 맴돌며 노래한다.)

아하, 아하-. 쨘쨘, 쨘자라 쨘쨘---.

(귀를 막고 춤추듯 쇳소리를 피하던 배비장. 큰 반창고를 꺼내 쇳소리의 입을

막아 버린다.)

[배] 이년! 소리못해 죽은 조상이 있느냐? 기차화통을 삶아 먹었느냐?

(쇳소리의 이마를 부채로 때린다. 방자 다시 호르라기 불며 배비장의 승리를 선언

쇳소리 부끄러워하며 퇴장하면 농염이가 목사 앞에 나선다.)

[농염] 이번엔 소녀가 나서 보겠나이다.

[목사] 끊이지 않고 나서니 가상하구나. 네 이름은 또 무엇이냐?

[음악 10] 농염이 출동

[호방] 하늘하늘 산들산들

 

[페이지] 051

[모두] 황공하옵니다.

[목사]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단병 접전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모두 나서라!

[모두] 예?

[목사] 인해전술로 해치우는 수밖에 없다. 모두 협공하여 기필코 배비장을

함락하라!

[음악12] 전원 출동!

[관속] 초월이, 일선이, 채운이, 금선이, 목단이, 월색이, 향심이, 홍련이,

비연이, 앵앵이, 금낭이, 옥련이

모두 모두 나서거라

우리 사또 화가 나셨다

모두 한꺼번에 덤벼

난공불락 배비장을

흐물 흐물 녹이랍신다

모두 모두 나서거라

우리 사또 화가 나셨다.

(기생들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다 일제히 사또에게 군례를 올린다.)

[행수] 전원 출동하여 기필코 배비장을 녹이겠나이다.

 

[페이지] 052

[목사] (지휘봉을 내리며) 출진하라!

(음악 갑자기 중국풍으로 변한다. 이 장면은 마치 중국 무술 영화의 한

장면처럼 구성된다. 원진으로 배비장을 포위한 기녀들, 왼쪽으로 돌다 딱 멈추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다 딱 멈춘다. 잽싼 걸음과 절도있는 동작.)

그러다 일제히 쿵후의 기본 동작 같은 자세<<0>> <<가>> 되면서, 갖가지의 권법

형태를 취한다. 취권, 사권, 묘권, 등등.

그리고 다시 배비장의 주위를 돈다. 기묘한 기합소리를 지르며.

한동안 기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배비장도 기묘한 기합 있던 배비장도 기묘한

기합 소리를 내며 힘주어 기본동작을 취하며 전투태세를 갖춘다.

드디어 전투음악이 터지면서 격렬한 전투가 된<<0>> <<다>>.

기녀들의 아크로마틱한 동작과 배비장의 무술이 한창 어울린다.

한동안.

드디어 <<0>> <<배>>비장의 부채 무술에 기녀들 모두 쓰러지고 만다. 이 장면은

철저하게 음악과 안무에 의하여 구성되도록 한다. 방자 또 호르라기를 불며

배비장의 승리를 선언한다.

더욱 기고 만장해지는 배비장.

 

[페이지] 053

애교 똑똑 떨어진다

농염이-.

[관속] 애교 똑똑 떨어진다

농염이

[농염] 이 농염이를 보내 주옵소서.

[목사] (지휘봉 내리며) 어서 출진하라!

[농염] (군례처럼 무릎 꿇으며) 예-. 아무리 배비장 나으리 굳은체 하더라도,

(온몸을 비비꼬고, 엉덩이를 흔들어 보고) 이 것에는 당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간들어진 음악이 시작되면 농염이의 낚지처럼 팔다리를 휘감는 춤과 뻣뻣한

배비장의 대무. 농염이는 팔로 배비장의 목을 휘감기도 하고 다리로는 허리를

조이기도 한다. 또 엉덩이로 배비장을 밀쳐내듯 툭툭 치기도 한다. 한동안.)

[배] 네년, 어미 널 낳을 때 산낙지 먹고 널 낳았더냐? 이년! 닭살 돋는다!

(부채로 농염이 머리를 친다. 방자 호르라기 불며 배비장의 승리 선언. 농염이

퇴장하면, 홀딱이가 목사 앞에 나선다.)

[홀딱] 이번엔 소녀가 나서 보겠나이다.

[목사] 너는 또 무슨 재주로 배비장과 겨루어 보겠느냐?

[페이지 054

[음악 11] 홀딱이 출동

[호방] 대청이든 골방이든

훌렁홀딱 잘 벗는다

홀딱이-.

[관속] 훌렁홀딱 잘 벗는다

홀딱이-.

[홀딱] 이 홀딱이를 보내 주옵소서.

[목사] (지휘봉을 내리며) 홀딱이 출진하라!

[홀딱] 예-.

(군례를 올리고 홀딱이 엄숙하게 일어서면 음악이 유연한 선율로 흐른다. 마치

스트립 걸처럼 춤을 얼르며 배비장 앞에 다가간다. 드디어 음악이 빨라지면

저고리 휘딱, 치마 훌렁 벗어 던지기 시작한다. 배비장 진기한 물건이라도 살피듯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춤을 춘다. 홀딱이 벗을 만큼 벗었을 때, 배비장 부채로

홀딱이의 배를 쿡쿡 찌른다.)

[배] 이년아, 배꼽 밑의 때나 씻고 다녀라!

(방자 호르라기 불며 다시 배비장의 승리를 선언. 화가 난 목사 벌떡

일어선다.)

[목사] 에잇! 내노라하는 기생 넷씩이나 나서서도 졸장부 하나를 당하지 못한단

말이냐?

 

[페이지] 055

목사는 털썩 주저 앉는다. 방자가 목사 앞으로 나선다.)

[방자] 사또,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아옵아옵니다.

[목사] 그렇다면 너에게 방법이 있느냐?

[방자] 손자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 했아옵니다.

[목사] 배비장같은 졸장부 하나 후리는데 무슨 손자병법까지 들추느냐.

[방자]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매사 그냥 힘으로 밀어부친다고 일이

되겠읍니까? 특히 남녀간의 일이란 계책이 있어야 할 줄 아옵니다.

[목사] 그래 특별한 계책이 있단 말이냐?

[방자] 이 일을 성사시킬 여인은 딱 하나뿐입니다.

[목사] 그래 그 여인이 누구란 말이냐?

(방자가 손짓하자 애랑이가 고운 자태와 걸음걸이로 들어 온다. 애랑의 모티브

음악에 마추어)

[방자] 이 여인이옵니다.

[목사] 첫 눈에 보기에도 고운 여인이로구나. 그래 그대 이름이 무엇인고?

[애랑] 애랑이라 하옵니다.

 

[페이지] 056

[목사] 오 애랑이라. 내 도임하던 길에 너의 이름을 들었다. 전관 정비장의

갑데기를 홀랑 벗기고 이빨까지 빼었다는 애랑이가 바로 너로구나. 너의 집

고깐엔 얼빠진 오입쟁이 앞닛빨이 서말에 상투가 닷말이나 된다면서.

[애랑] 소녀의 집에는 곳간도 없아옵고, 그까짓 냄새나는 물건을 무엇이

귀중하다 간직하오리까?

[목사] 옳거니. 그래 너는 어떤 수단으로 배비장을 홀릴꼬?

[애랑] 마침 도화춘풍 호시절이으니, 내일이라도 한라산화류 놀이를 하옵시면

배비장을 홀릴 계고를 마련하겠나이다.

[목사] 한라산 화류놀이라?

(목사, 방자, 애랑 마치 작전 회의를 하듯 머리를 맞대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

[애랑] 여차 저차, 조차 저차.

[목사] (손뼉을 치며) 과연 계교로다! 만약 배비장을 훼절 시키기만 한다면

너야 말로 제주기생 중의 인재가 되리라.

[애랑] 사또의 분부는 소녀의 수단껏 하려니와, 사또께서는 이속사령들이

소녀와 은밀히 협력하도록 명

 

[페이지] 057

하여 주옵소서.

[목사] 이르다 뿐이겠느냐? 여봐라!

[일동] 너희들은 여기 있는 애랑이를 도와서 배비장을 파겁시키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라.

[일동] 예이-.

[방자] (겅중거리며)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나으리는 이제 그물에 든 고기요,

독안에 든 쥐입니다. 타시던 말은 이놈 것이구요.

 

[페이지] 058

[장] 6. 배비장 홀리는 마당

낭자한 음악소리와 기생들의 교태스러운 웃음소리가 높아졌다가 차차

낮아지면서 배비장이 특유의 걸음 걸이로 등장한다. 산세를 보듯 여기 저기를

둘러보는데 방자가 등장한다.

[방자] 사또와 여러 비장들이 기생들을 끼고 앉아, 감홍홍로 계탕주를 취하도록

마시고 춘흥에 겨워 질탕히 놀고 계신데 어째 나으리만 이토록 홀로 무료히

계시옵니까?

[배] 내 그꼴 보기 싫어 예로 피해왔다. 산세가 이리 아름답고 저 폭포소리

또한 웅장한데, 군자가 시를 읊고 자연에 취함이 도리이거늘, 계집의 치마폭에

빠져 술타령이라니, 에헴 (시조를 읊듯)

하늘은 끝간데 없으니

한양은 천리 길이요

바다는 가없이 넓으니

영주는 은파 만경이라

꽃같은 미인은 초생달을 바라보는데

나는 홀로 소나무 아래 앉아

 

[페이지] 059

장부의 굳은 절개 지키려네.

[방자] (비웃으며) 과연 장한 군자이십니다.

[음악 13] 목욕하는 미인

(음악의 전주 소리들리면 배비장 무엇에 놀란듯무엇을 발견한 듯 한 곳을

응시하다 한발자욱씩 다가 간다. 방자는 웃으며 한켠으로 비켜 난다. 음악에

마추어 여인들이 바위로 사방이 둘러 싸인 연못을 밀고 노래하며 나온다.

이 연못은 작은 수레를 치장한 움직이는 장치이다. 사방을 기암괴석으로

장치하였고 가운데는 물을 상징하듯 푸른 천으로 덮여 있는데 그 복판에 한

사람이 혹은 서고, 혹은 않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에 애랑이 타고 있는

것이다. 이 장치는 자유자재로 움직여 여인들이 노래와 춤을 추며 이리 저리

운전하고 다니도록 한다. 애랑은 노래의 진행에 마추어 옷을 벗어 난간처럼 된

바위에 내걸기도 하고 몸을 슬쩍 슬쩍 보여 주며 교태를 부리기도 한다.)

[여합] 선녀같은 애랑아씨

배비장 후릴려고

제주일경 수포동 폭포

선녀탕에 몸을 씻는다

 

[페이지] 060

저고리 벗어 이 바위에 걸치고

치마 벗어 저 바위에 걸치고

속 저고리 속치마

훨훨 벗어 반석에 올려 놓고

이리 텀벙 저리 텀벙

백옥같이 벗은 몸이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맑은 물 두 손으로 쥐어

보드득 가지씻듯 씻어보고

맑은 물 붉은 입술에 가득담고

양추질도 솰솰 뿌려보고

물 한줌을 덤벅 쥐어

연적같은 젖가슴도 씻어보고

홍홍난만 꽃도 따서

입에 담뿍 물어도 보고

꽃가지도 질끈 꺽어

머리에도 꽂아 보고

흑운같이 채 긴 머리를

두 손으로 올려도 보고

꼬리넓은 금붕어가

용이되어 오르려는듯

 

[페이지] 061

벽파 담담 물결따라

구비구비 노니는듯

우루렁 출렁 목욕하는

애랑아씨 거동 보소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배도 씻고 젖도 씻고

다리 씻고 허벅지 씻고

예도 씻고 게도 씻고

선녀같은 애랑아씨

배비장 후릴려고

제주일경 수포동 폭포

선녀탕에 목욕하네.

(넋을 잃은 배비장, 수레 뒤를 쫓아다니기도 하고, 수레에 쫓기기도 하다가

털석 주저 앉는다. 수레는 아직 나가지 않고 동작을 계속하고 있다.)

[배] 야! 저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람 여럿 녹였겠구나.

[방자] (나서며) 나으리,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하십니까?

[배] 방자야! 저기 저 거동을 좀 보아라!

 

[페이지] 062

[방자] 저기에 무엇이 있읍니까?

[배] 좀 조용히 해라! 조용히 구경하자!

[방자] 무엇을 구경한단 말입니까?

[배] 아, 저것이 양귀비냐, 월서시란 말이냐? 아니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란 말이냐?

[방] 밝은 대낮에 양귀비, 서시는 뭐고 선녀는 또 무슨 선녀입니까?

[배] 서시 귀비도 아니요, 선녀도 아니라면, 저것이 변신한 불여우란 말이냐?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라 할지라도 사생결단 혹하겠다. 애고, 애고 나를 죽인다.

나를 죽여.

[방자] 아니, 나으리 무엇을 보시고 이다지도 미쳤읍니까? 소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배] 이놈아! 저기 저 건너 못 속에 목욕하는 저것을 못 본단 말이냐?

[방자] 아, 나으리께서 무엇을 보고 그러시나 했더니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그러시는군요.

[배] 옳다! 너도 이제야 보았구나! 쌍놈의 눈이라 양반의 눈보다 대단히

무디구나.

[방자] 네-. 눈도 반상이 다르니까 소인의 눈이 나으리의 눈보다 무디어 저런

예의 없는 것은 안보입니다. 그런데 나으리는 서시 양귀비가 두릅

 

[페이지] 063

으로 있어도 곁눈질을 안 하신다더니, 여염집 여인 은근히 욕심내어 눈을 쏘아

구경을 하시니 어인 일이십니까?

[배] 다시는 안본다. (두눈을 두손으로 가린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본다.)

[방자] 저 눈!

[배] 나 안본다! (가졌다 손가락 사이를 펴며) 아무리 안보려고 하여도

지남철에 낱 바늘 달려 붙듯 눈이 그리로만 가니 어찌 한단 말이냐?

[방자] 저 눈 일을 낼 눈이로군.

[배] 나 안본다. 염려 말아.

[방자] (발을 구르며) 에헴!

(애랑이 짐짓 놀란듯 옷가지를 주어 가슴에 안는다. 수레 급히 밖으로 밀고

나가다 잠깐 선다. 애랑 고개를 돌려 배비장을 보고 생긋 웃는다. 수레 빠르게

나간다.)

[배] 이놈! 기침은 웬 기침을 해서 일을 그르치느냐?

[방자] 그러지 않았다간 나으리 정말 큰 일을 치르고 말았을 껄요.

(배비장 넋나간듯 애랑이 나간 곳을 향하여 추츰 추츰 나간

 

[페이지] 064

다. 목사와 일행들이 숨어서 보고 있다가 나온다.)

[음악 14] 배비장 걸려들었네.

[합창] 선비인척 군자인척

여인금제 장담하던

나으리,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제주일색 애랑아씨

이리텀벙 저리텀벙

목욕하는 그 모습에

어깨실룩 정신 잃어

구대정남 간데 없고

도리어 음남이 되어

눈은 풀려 헬렐레-

도둑나무 하다 들킨듯

숨을 헐떡 벌떡 거리네

걸려들었네 걸려들었네

제주일색 애랑의 계고에

나으리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그만 덜컥 걸려들었네.

(패거리들이 노래와 춤이 고조 되는데, 사물을 앞세운 농악 패거리들 들어와

한바탕 판을 벌리기 시작한다.)

 

[페이지] 065

제1부가 끝났다.

 

[페이지] 065-1

[막] 제2부

 

[페이지] 069

제2부

[장] 1. 상사병 마당

배비장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끙끙 앓고 있다. 방자가 한쪽으로 나온다.

[방자] 우리 배비장 나으리, 한라산에서 잠시잠깐 애랑을 본후로 그만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읍니다.

(배비장 비척 비척 일어나 앉으며 한숨을 드리 쉬고 내 쉰다.)

[음악 15] 깊은병 골수에

[배] 장부의 굳은 맹세

허사로다 허사로다

한라산 맑은 정기를

그대 모두 타고나서

그리도 고우신가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고운 자태 못잊어 한이네.

동방이 적막한데

임그리는 깊은정은

 

[페이지] 070

병이 되어 가슴에 사무치오.

눈에 암암 귀에 쟁쟁

님의 모습 떨치려 해도

장부의 굳은 맹세

허사로다 허사로다.

(음악 갑자기 변조하면서 음악 13이 무곡처럼 연주된다. 무대 조금

어두워지면서 여럿의 애랑 환영 배비장을 둘러 싼다. 배비장은 옷을 벗는 애랑의

환영에 쫓긴다.

어느 환영은 저고리 고름을 풀고. 어느 환영은 치마 끈을 풀고 어느 환영은

저고리를 벗고 어느 환영은 치마를 벗고 머리를 감싼 배비장 비명을 길게 치르면

음악은 다시 15로 되돌아 온다.)

[배] 그대를 그리는

상사병은 골수에 깊이들어

이몸은 속절없이

머나 먼 천리타향에서

청춘원혼 되게 되었으니

흰 머리에 주름진 어머님

언제 다시 뵈올 수 있으랴

 

[페이지] 071

애고 애고 이일을 어쩌리

(비통하게 노래부르며 업드렸던 배비장 무언가 결심한듯 일어서며)

[배] 에라! 죽더라도 말이나 한번 건네보고 죽으리라. 얘야 방자야!

[방자] 예, 부르셨읍니까?

[배] 나는 이제 죽을 병이 들었다.

[방자] 무슨 병이 들으셨기에 그처럼 신음을 하십니까? 패독산이나 두어컵

잡수어 보시지요.

[배] 아니다. 패독산이나 먹고 나을 병이 아니다.

[방자] 그러면 망령병환이 드셨나 보시군요. 망령병에는 당약이 제일입지요.

[배] 그게 무슨 약이냐?

[방자] 젊은 양반 망령에는 홍두깨를 삶아서 먹는 것을 당약이라고 합니다.

[배] 아니다. 나의 병에는 약이 있기는 하다마는 얻기가 어렵구나.

[방자] 그 무슨 약이기에 그처럼 어렵다고 하십니까? 사람의 목숨이 달렸는데

하늘의 별인들 따오지 못하겠읍니까?

[배] 그 말만 들어도 속이 시원해지는구나. 그러면 내

 

[페이지] 072

가 살고 죽기에는 방자 네게 달렸으니 날 좀 살려다오.

[방자] 아따, 언제 나으리를 누가 죽인다고 했소? 어서 말씀이나 하시구려.

[배] 오냐, 오냐 방자야. 수포동 폭포에서 목욕하던 여인을 한번 보고 상사병이

들어 죽을지경에 이르렀다. 부디 그 여자와 한번 만나게 해다오!

[방자] (펄쩍 뛰며) 아이고, 그 여인이라면 안됩니다.

[배] 어째 그러느냐? 방자야, 어떻게 손을 써 봐다오.

[방자] 나으리,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옵니다. 그 여인은 제주도에서 유명한

왈짜의 아낙이옵니다. 그 작자가 기운은 항우요, 누악은 장비같고, 미련하기는

곰이요, 악독하기는 도척같은 놈입니다. 술잘 먹고 주정하고 쌈잘하고 사람치기를

멋대로 하는 놈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은 그만 두십시요.

[배] 방자야! 되든 안되든 편지 한장만 전해 다오. 일만 잘되면 삼백냥을

상금으로 주마. 어떠냐방자야!

[방자] 소인은 그 편지 가지고 가지 못하겠읍니다.

[배] 방자야!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이 내 마음

 

[페이지] 073

을 몰라주고 가지 않는다면 또 누구가 있단 말이냐? 방자야 제발 이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다오. 방자야!

[방자] 나으리! 소인이 나으리와의 정의를 생각한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

들겠읍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할 사정이 있읍니다.

[배] 사정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음악 16] 불쌍한 방자 신세

[방자] 소인 세살에 부친을 여의옵고

늙으신 어머님께서 길러주셔

열살부터 방자노릇 했지요.

그러나 관가에서 받은 것은

한달에 단돈 두냥 뿐.

온갖 심부름에 신발 값도 못되오

먹는 것은 나으리님들

버리는 밥 얻어다

하루 하루 연명하는

불쌍하고 가련한 신세-.

[방자] (대사로) 소인 사정이 이러하오니 일이 잘못되어 소인이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못된 서방에게 맞아 병신이 되

 

[페이지] 074

면 나으리도 모실 수 없고 늙은 어미는 먹일 수 없게 되면 소인의 신세가 어찌

되겠읍니까? 하오니 그렇게 위태로운 곳에는 가지를 못하겠나이다. 나으리께서

통촉하여 주옵소서.

[배] 그런 일이라면 아무 염려를 하지 말아라. 만일 네가 매를 맞게 되면 내가

낫도록 해 줄 것이요, 너의 늙은 어미는 내가 먹여 살리겠다. (돈 꾸러미를 주며)

우선 백량을 줄터이니 우선 너의 어미에게 갖다 주어 양식이나 팔아 먹도록 하라.

[방자] (돈을 잽싸게 챙기며) 나으리께서 정그러시다면 이 목숨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전해 주겠아오니 편지나 주십시요.

[배] (편지 봉함을 내주며)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너의 수단에 달렸으니

부디 눈치 있게 잘 하여라.

[방자] 염려 마십시요. (편지를 들고와나가려다) 나가리, 나으리께서 소인과

내기에 지셨으니 나으리 타시던 말은 이제 소인 것입니다.

[배] 오냐, 알았다. 오늘부터라도 네가 타라.

(방자 나간다.)

 

[페이지] 075

[장] 2. 편지 왕래 마당

방자가 편지를 들고 들어서면 목사 애랑 관속 기생들이 모여 있다.

[방자] 여기 배비장 나으리의 편지를 가져 왔읍니다.

[목사] (편지를 받아 애랑에게 주며) 어서 읽어 보아라.

(애랑이 편지를 펼쳐들면 사람들 애랑의 주위로 몰려 든다. 배비장에게 조명이

비쳐진다.)

[음악 17] 장부의 한목숨 그대 손에

[배] (대사) 제막 배 아무개는 두손을 모아 두 번 절하고 감히 일봉서신을

낭자전에 부치 오니 부디 살펴 읽으소서.

(이하로 노래가 된다.)

[배] 지나간 날 산중 숲속에서

얼핏 그대 자태를 보고나서

뛰는 가슴을 안고 돌아 왔으나

 

[페이지] 076

그대 고운자태 지울 수 없오

잊으려도 잊히지 않고

한 모금 물마저 넘길 수 없고

잠들어 꿈에 님을 뵐까

잠을 재촉해도 잠들 수 없오.

마침내 골수에 병이드니

애끓는 탄식이 절로 나오.

애끓는 탄식이 절로 나오.

활짝 핀 꽃과 같은 그대

그리다 깊이 든병

신농씨의 백초약 소용 없고

화타 편작인들 고칠 수 있으리

장부의 한목숨

오로지 그대 손에 달렸오.

그대의 말 한마디에

이몸은 죽기도, 살기도 하리

장부의 한목숨 그대에게 맡기니

그대의 뜻대로 하소서.

[배] (대사) 총망중 잠시 적사오니 불쌍한 이몸의 사연 살피시고 답장하옵기를

업드려 빌며, 다시금 업드려 비옵니다.

 

[페이지] 077

(배비장에게 비추던 불빛 어두워지면, 목사와 애랑 관속들에게 다시 밝은 빛)

[목사] 하하하. 배비장이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나. 일이 이쯤 되었으니

다음 일을 착오없이 진행하도록 하라! 애랑은 급히 답장을 써주되 허술히 하지

말고 애를 타게 하라.

[애랑] 호호. 사또 염려 마옵소서. (편지를 쓴다.)

[목사] 하하, 어서 뒤주를 날라다 제자리에 놓고, 다른 일도 한치의 차질이

없도록 점검하라!

[일동] 예이-.

[애랑] (방자에게 편지를 건네주며) 방자야 어서 편지 전해 주거라. 배비장

나으리 일각이 여삼추겠다.

[방자] 염려 말아 (편지 받아들고 나가며) 그럼 오늘 밤에 나리를 데리고 가마!

배비장 초조한듯 마당을 왔다 갔다하는데 방자가 겅중거리고 들어 온다.

[방자] 나으리 다녀왔읍니다.

[배] 오, 방자야! 그래 어찌 됐느냐?

[방자] 참 나으리께서는 복도 많으십니다.

[배] 복이 많다니?

 

[페이지] 078

[방자] 아, 일이 되느라고 그 여인의 서방놈이 마침 외방으로 길을 떠났다지

않습니까?

[배] 그것 참 잘되었구나. 그래 답장은 받아 왔느냐?

[방자] 여부 있겠읍니까?

[배] 어디 어서 보자.

[방자] 아하, 나으리 귀한 서간을 쑥 내밀고 쑥 받으실 수 있읍니까?

[배] 과연 그렇구나. (무릎을 꿇어 앉아 두손을 들고) 이렇게 받아야지.

[방자] (상전이 된듯 편지를 꺼내 내려 주며) 어서 읽어 보시오! (꿇은 채로

편지를 펼친다. 조명 한쪽의 애랑에게 비춘다.)

[애랑] (대사) 뜻 밖에 일면식도 없는 외간 남자의 편지를 받고 놀란 가슴을

달래며 답장을 올립니다. 대저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하여 해괴한 서신을 보내셨는지, 이는 군자의 도리가 아닌줄 아옵니다. 또한

규중 유부녀의 정절을 앗으려 감언이설을 늘어 놓으니, 마땅히 미친 인사는

마음을 바로잡고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 도리인줄 아옵니다.

[배] (낙담하여) 아이고, 나는 이제 꼼짝 없이 죽어 섬가운데 원혼이 되게

되었구나. 아이고-.

 

[페이지] 079

[방자] 나으리, 그리 낙심말고 그 아래를 읽어 보시오.

[배] 더 읽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방자] 그 다음에 연자가 있읍니다.

[음악 18] 달이 진 야 심경에

[애랑] (대사) 연이나 소첩으로 인하여 귀중한 장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하오니, 이 또한 외면하면 도리가 아닌줄 아옵니다.

(이후 노래가 나온다.)

[애랑] 이몸은 규중 깊은 곳의 몸

출입을 마음대로 못하오니

그대를 만나려 한들

뜻과 같이 하지 못하옵니다.

그대 기필코 이몸 보고자 하면

달이 지고난 깊은 밤에

소녀의 처소를 찾으소서

잠든 닭을 깨우지 마시고

잠든 개를 깨우지 마시고

사뿐 사뿐 조용히 찾으소서

바람을 맞아 문을 반쯤 열고

불 밝히고 기두리 오리다.

 

[페이지] 080

조심스러운 님의 발자욱

창문에 꽃그림자 움직이면

그대 오신줄 미리 알고

그대를 맞으오리다.

조심 조심 사쁜 사쁜

깊은 밤에 오소서-.

(애랑 비추던 조명 꺼지고 배비장 껑충 껑충 뛰며 기뻐한다.)

[배] 살았다. 이제 살았다. 배비장 살았다!

[방자] 나으리, 이 모두가 소인의 덕인 줄 아셔야 합니다.

[배] 암 알고 말고, 네가 아니면 이런 기쁜 일이 있을 법이나 했겠는가?

[방자] 그럼 삼백냥을 어서 주십시요.

[배] 삼백냥?

[방자] 벌써 잊으셨읍니까? 일이 잘 돼기만 하면 3백냥을 상금으로 주신다고

했지 않습니까?

[배] 오! 그 삼백냥 주고 말고. 옛다 받아라. (돈주머니 준다.)

[방자] 고맙습니다.

[배] 자 어서 가자!

[방자]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페이지] 081

[배] 그 여인의 처소로 가야지.

[방자] 나리도 우물가에서 숭늉찾으시겠읍니다. 편지에 무어라 했읍니까?

달이진 깊은 밤에 오랬는데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았읍니다.

[배] 아, 어찌 이리 시간이 더디냐?

[방자] 밤중에 뫼시러 올터이니, 단단히 준비나 하고 기다리십시요.

 

[페이지] 082

[장] 3. 개가죽 두루마기 입는 마당

방자가 한쪽에 나와 관객들에게

[방자] 일각이 여삼추라.배비장은 달이 뜨고 또 지기를 기다리는데, 방안에서

여자에게 잘 보일려고 의관을 차리고, 또 여자를 만났을 때를 상상하며

인사치레며 걸음 걸이를 연습해 보는 것이었읍니다.

(배비장 특유의 자세로 머리도 가다듬고 젊잖은 갈짓자 걸음도 걸어본다.)

[배] 가만 가만 걸어가서 여자 문전에 다가 가서 에험-. 기침을 한번 가만히

하면 그 여인이 알아채고 문을 펄쩍 열렸다. 아이고 그냥 꽉. (안는 시늉을

하다가) 아니지 체통을 지켜야지. 대학지도로 이리 저리 걸어 들어가서-. 수인사

후에 대천명이라 하니 여자에게 이렇게 군레를 보여야 겠다. 그러면 그 여자가

(몸을 비비 꼬며) 아이구-. (방자가 뒤에서 큰 소리로)

 

[페이지] 083

[방자] 나으리 무엇을 하고 계시오?

[배] 아이구 깜짝이야! 내 놀라서 진땀이 다 나는구나!

[방자] 그래 준비는 다 되셨읍니까?

[배] 오냐. 자 이만하면 어떠냐? 그 여인의 마음에 들겠느냐?

[방자] (혀를 차며) 참 나으리의 소견도 한심하오.

[배] 한심하다니.

[방자] 아닌 밤중에 유부녀 간통하러 가시면서 그런 복색으로 갔다가 될일도

안되겠오.

[배] 그럼 무얼 입고 가야 하느냐!

[방자] 남의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행차이니 제주인물복색으로 차리셔야지요.

[배] 제주인물 복색이라니? 그게 어떤 차림이냐?

[방자] 개가죽 두루마기에 놋 펑거지를 쓰십시요.

[배] 얘야! 여인을 찾아가면서 개가죽 두루마기에 놋펑거지라니 너무 초라하지

않느냐?

[방자] 초라하게 생각이 들면, 가지 마십시요.

[배] 아니다. 네가 입으라면 개가죽 아니라 내 도야지 가죽이라도 뒤집어 쓰마.

(방자 배비장에게 개가죽 두루마기에 놋펑거지를 씌워 준다.

 

[페이지] 084

배비장 자신의 앞뒤를 살펴 본다.)

[배] 개털을 누르고 털 벙거지를 쓰고 보니 마치 개처럼 보이지 않느냐?

[방자자] 싫으시면 그만 두십시요.

[배]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이 모양으로 밖에 나갔다가 야삼경 서산

호랑이가 내려 오다 날보면 개로 알고 잡아 먹으려고 덤빌 것 아니냐?

[방자] 그렇게도 겁이 나고 무서우면 차라리 가지 마오.

[배] 아니다, 아니야. 네 성질이 그리도 팔팔한줄 내 몰랐구나. 네가

못가겠다면 내가 널 업고서라도 가마! 어서 가자 방자야! 어서.

[방자] 그럼 내 뒤를 따르시오.

[음악10] 어서 가자 사랑 찾아

[배] 기다리는 님 고운 우리님

어서 어서가서 반겨보자

서쪽으로 들어가

대나무 창문 돌아들어

동쪽으로 소나무계단 다달으면

야색은 달도 진 삼경인데

북창에 등불 밝히고

 

[페이지] 085

우리 님이 나를 기다리시네.

[방자] 자, 다 왔읍니다. 여기가 바로 그 여인의 처소이옵니다.

[배] 담은 저리 높고, 대문은 굳게 잠겼으니 어디로 들어간단 말이냐?

[방자] 자 여기에 엎드리십시요.

[배] 엎드리라니?

[방자] 제가 나으리의 등을 밟고 올라가 담을 넘어 들어가려 합니까.

[배] 이놈아! 내가 여인을 찾아 왔는데 네가 왜 담을 넘어 들어간단 말이냐?

네가 엎드려라 내가 너의 등을 밟고 담을 넘으리라!

[방자] 참으로 무엇을 모르십니다.

[배] 모르긴 뭘 모른단 말이냐?

[방자] 아무리 나으리께서 유부녀 간통을 하러 오셨다 하나, 어찌 양반체면에

도둑놈처럼 담을 뛰어 넘으십니까? 제가 담을 넘어가 대문을 열 터이니, 양반답게

대문으로 들어 가십시요.

[배] 네 말이 과연 옳다. 양반이 담을 넘을 수는 없지지. (배비장 엎드린다) 자

살살 집고 넘어 가거라!

[방자] 자 그럼 단단히 힘을 주십시요.

 

[페이지] 086

[배] 오냐 어서 넘어가 문을 열어라. 지체하다간 날새겠다.

[방자] 집고 넘어갑니다. (껑충 뛰어서 세차게 배비장의 허리를 힘껏 밟는다.)

[배] (나동그라지며) 아이구 허리야. 어이구. 이놈아 대사를 앞두고 허리를

짓밟으면 어쩌느냐?

[방자] 허리를 다쳤읍니까? 유부녀 간통하러 와서 허리를 다쳤다니 그거

낭패로군요.

[배] 아이구, 아이구.

(방자가 손짓하자, 패거리들 개짖는 소리를 낸다.)

[방자] 쉿 조용히 하십시요! 온 동리 개가 떠들어 짖어댐니다.

(배비장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 장정들이 뛰어 나온다.)

[장정] 이놈들! 이 도둑놈들아, 꿈적 말아!

[배] 아이구 큰일 났구나. 이젠 꼼짝없이 도둑으로 몰리게 생겼구나.

[방자] 나으리는 꼼짝말고 <<0>> <<엎>>드려 계십시요. 내가 처리 하겠읍니다.

(장정 하나 나서며 몽둥이를 쳐든다.)

 

[페이지] 087

[장정] 이놈, 이 도둑놈 꿈적마라!

[방정1] 소란스럽다! 이놈들, 누구더러 도둑놈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장정2] 적반하장이라더니, 도둑놈이 큰소리 치네.

[방자] 너희놈들은 이 벙거지에 육모방망이가 안 보이느냐? 나는 제주부에 사는

사령이다!

[장정1] 이거 사령님을 소인들이 눈이 멀어서 잘못 <<00>> <<보았>>읍니다.

그러나 사령님 발아래 웅크리고 있는 놈은 분명히 도둑놈이오니 소인들에게 넘겨

주십시요.

[방자] 한심한 사람들이로군. 너희들 눈엔 이것이 사람으로 보이느냐?

[장정2] 아니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방자] 아무리 미천한 백성이기로 사람과 개를 구별 못한단 말인가?

[정정1] 아니 그게 개라굽쇼?

[방자] 이건 내가 밤에 순라를 돌때 끌고 다니는 누렁이다. 마침 이집에

개구멍이 있으니 들어가려고 했던게야.

[장정2] 설마!

[방자] (발길로 배비장을 차며) 이놈누렁아 일어서!

(배비장 네발로 일어 선다.) 발하나 들어, 오줌

 

[페이지] 088

이 마려우면 그곳에 누워라! (배비장 뒷다리를 든다.) 짖어봐!

[배] 멍멍멍!

[장정1] 정말 신통한 개로군요. 저렇게 말을 잘 들으니.

[배] (신이 나서) 멍멍멍 (그러다 놋펑거지가 벗겨진다.)

[장정2] 그런데 몸뚱이는 분명 개인데 대자리를 보게. 상투가 달린 개는 처음

보네.

[장정1] 정말!

[방자] 무지한 사람들. 그래 네놈들은 양반집 개와 상놈집 개도 구분 못하나?

이 상투달린 개로 말할것 같으면 한양에서 특별히 사또님이 데리고 온 개이니라.

[장정] 양반개라!

[방자] (앞장서서) 워리- 워리-.

(배비장 개처럼 엉금 엉금 기어 방자를 따라 나간다. 숨어 보던 마을 사람과

목사 나와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홍소를 터트린다.)

[음악 20] 개가 된 배비장 나으리

[합창] 나으리 나으리 배비장 나으리

 

[페이지] 089

졸지에 개가 되었네

상투달린 양반개가 되었네.

앞발 들고 멍멍 멍멍

 

[페이지] 090

[장] 4.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마당

아직도 방자를 따라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배비장. 둘레를 둘러 보다가

일어선다.

[배] 사람들이 개망신, 개망신하기에 무슨 말인가 하였더니 꼭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방자] 좋은 것 배우셨오.

[배] 옛 성현의 말씀에 아침에 깨달으면 저녁에죽어도 한이 없다 하였으니 내

오늘 개망신에 관하여 깨우쳤으니 이를 어찌 기뻐하지 않으랴!

[방자] 그러면 개망신 더 당하기 전에 오늘은 단념하고 돌아 가시지요.

[배] (펄쩍뛰며) 그게 무슨 말이냐? 또 성현이 말씀하시길 장부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두부라도 베어야한다 했느니라.

[방자] 그래도 성현 말씀만 찾네.

[배] 가다가 중지 곧하면 아니 감만 못하니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게다가

기다리고 있을 그 여인내가 이대로 돌아가면 신의 없다 날 경멸하리로다.

 

[페이지] 091

[방자] 정히 결심이 그러하시다면 이 개구멍으로 들어가시는 도리 밖에

없읍니다.

[배] 오늘은 순전히 개자 돌림으로만 일이 일어나는구나!

[방자] 자 어서 들어가시오!

[배] 꼭 개구멍으로 들어가야 하느냐?

[방자] 못하시겠으면 그만 두십시요.

[배] 아니다, 아니야. 내 들어가마. (누워서 다리부터 개구멍으로 드리 민다.

걸려서 들어갈 수가 없다.) 아이고 걸렸다!

[방자] 아니, 나으리는 해산하는 법도 모르시오? 아이를 낳을 때 머리부터

나와야 순산하는 법인데 왜 다리부터 들어가려 하십니까?

[배] 머리부터 디밀면 정말 개같이 되지 않느냐?

[방자] 아, 이판에 개새끼가 되면 어떻고 쥐새끼가 되면 어떻다고 아직도

체면을 따집니까?

[배] 네말이 맞다. 이판 사판, 개판인데 머리부터 들어가자. (머리부터

개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힘이 든다.) 방자야 뒤를 좀 밀어라!

[방자] (방망이로 배비장의 엉덩이를 힘껏 친다.) 어서 들어 가시오!

[배] (깜짝 놀라며 개구멍을 통과한다.) 아이구, 들어

 

[페이지] 092

왔다. 들어 왔어!

[방자] (개구멍을 향하여) 저기 저 불켜진 방이 그 여인의 방입니다. 자 날이

샐 때가 다 되었읍니다. 조심 조심 사뿐 사뿐 저 방문을 열고 들어 가셔서 재주껏

하시고 실컷 노시다가 일찌감치 돌아 오십시요.

[배] 오냐 알았다.

[방자] 만일에 사람의 소리가 나거든 개소리를 내셔야 합니다.

[배] 알았느니라.

[방자] 소인은 이만 물러갑니다. (나가지 않고 한편에 숨어 있다.)

[배] (조심스럽게 발을 내 딛는다. 벌벌 떤다.) 왜 이리 사시나무떨듯 온몸이

떨리는고? (무엇에라도 부딛힌듯 큰소리 난다.) 아뿔사.

[애랑] (안에서) 누구냐?

[배] 멍멍멍

[애랑] (나오며) 이 야밤 중에 뉘집 개가 들어 왔나?

[배] 멍멍멍

[애랑] (배비장을 보고) 아이고 불쌍해라! 뉘집 개인지 배가 고파 들어온

모양이구나!

[배] 부인!

 

[페이지] 093

[애랑] 아니 개가 말을 하네

[배] 나는 개가 아니오

[애랑] 뭐라구 개가 아니면 도야지냐?

[배] 나는 사람이오.

[애랑] 사람이라니 그러면 도둑놈이로구나!

[배] 아니오! 나는 낮에 부인께 일자 서신을 보냈던 사람이오.

[애랑] 아니 그러면 배비장나으리란 말씀입니까?

[배] 그렇소.

[애랑] 아이구 나리. 그런데 이게 무슨 복색이오? 나는 그만 개로 알았읍니다.

[배] 개도 좋고 도야지도 괜치 않소. 이렇게 부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소.

[애랑] 자 어서 방으로 드시옵소서.

[배] (짐짓 젊잖은체) 그동안 댁내 제절이 고루 평안하시며,

기체후일양만강하옵신지.

[애랑] (웃음을 참으며) 생각해 주신 덕분에 무고합니다.

[배] 어려웁게 부인을 만났으나, 곧 날이 샐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

없소.

[음악 21] 기다리던 님

[애랑] 이제나 오시려나

 

[페이지] 094

저제나 오시려나

바람소리 님이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

날이 셀까 조바심하며

기다리던 님이시여

달이 진 깊은 밤에

오시마던 님이시여

어이 해 이리 더디 오셨나

어이 해 이리 더디 오셨나

넓으신 님의 가슴에

기대어 별을 세며

시름에 젖은 이 마음을

달래려 하였으니

더디 오신 님 야속하네

새벽 닭이 울기전에

님의 넓은 그 가슴에

이 몸을 힘껏 안아주오

더디 오신 야속한 님이시여

이 몸을 힘껏 안아주오

(애랑 노래하며 배비장의 옷을 하나 하나 벗긴다. 드디어 알몸이 되는 배비장.

애랑 저고리 고름을 푼다. 이때 방자 발

 

[페이지] 095

을 굴러 큰 소리를 낸다.)

[방자] 문열어라! 문열어!

[애랑] (옷고름을 급히 매며) 아이고, 큰일났어요!

[배] 이 밤중에 어느 놈이 와서 이 야로를 하오?

[애랑] 야단 났어요. 외방에 갔다 온다더니?

[방자] 문 발리 못 여느냐?

[배] 대체 저놈이 웬 놈이요?

[애랑] 남편이란 작자요.

[배] (떨며) 아니, 남편이라구? 그 성질이 포악하다는

[애랑] 알고 계셨군요.

[배] 아이고 날 살려주.

[애랑] 자 사세 급하게 되었으니 잠시 이 자루 속에 들어가 있으시오.

[배] 아니 이 자루 속으로?

[방자] 무얼 하느냐? 어서 문열어라!

[애랑] 어서 들어 가시오. 그래야만 사실 도리가 있읍니다. (배비장 자루

속으로 들어간다. 애랑 자루 끝을 묶는다.) 자 여기 꼼짝 말고 서 있어야 합니다.

[방자] 문 빨리 못여느냐?

[애랑] 나가요! 좀 기다려요!

(방자 들어와 애랑과 마주보고 손짓 발짓 웃음을 참는다.)

 

[페이지] 096

[방자] 무얼 하느라 이제야 문을 연단 말이냐?

[애랑] 깜박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그런데 외방에 나갔다가 수일 걸려야 돌아

오신다더니 웬일이오?

[방자] 가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못 믿어워 돌아 왔다. 네 기여코

외간남자를 불러 들였지?

[애랑] 원 별말씀을 다하시우. (자루를 가리키며) 어디 그런 흔적이라도 있는지

찾아 보구려.

[방자] 어디 보자. 저건 뭐내? 방구석에 세워 놓은 것이

[애랑] 그건 거문고에 새줄 끼워서 세워 놓은 것이오.

[방자] 그래? 어디 (대나무 채찍으로 배비장을 친다.)

[배] 둥덩덩 둥

[방자] 그 거문고 소리 웅장해서 좋구나! 대현을 쳤으니 이번엔 소현을 쳐

볼까(또 때린다.)

[배] (꿈틀거리며) 둥덩덩 둥

[방자] 그 거문고 괴상하다. 위를 쳐도 위에서 둥, 아래를 쳐도 위에서 둥

[애랑] 호호 그 무식한 소리 마오. 오음육율을 낼 적에 궁상각치우를 청탁으로

나누었으니 상청 하청이 화답하는게 아니오?

[방자] 그런가? 난 무식해서 모르겠다만 거문고 새줄을 감았다니 임자 거문고

소리 들으며 술 한잔 먹어볼까?

 

[페이지] 097

[애랑] 이 밤중에 술이 어디 있오?

[방자] 네가 나가서 사오면 되지 않나?

[애랑] 야밤에 아녀자가 어딜 나간단 말이오?

[방자] 그도 그렇구나. 그럼 내가 나가서 사오지 (나가는 척 자리를 비운다.)

[배] 부인 나좀 풀어 주오.

[애랑] (풀어주며) 큰일 났어요. 좀체 안갈 모양이오.

[배] 저 작자, 아무래도 거문고를 내어 보자 할 것이니 나를 다른 데로 숨겨

주시오.

[애랑] 이 궤 속으로 바삐 드시요.

[배] 몸은 크고 궤는 작으니 능히 몸을 숨길 수 있을런지

[애랑] 그 궤가 보기는 적은듯 하나 속이 넓어 은신할만하니 잔소리 말고 어서

들어 가시오. (배비장 궤속으로 들어간다. 궤는 사방에서 다 들여다 보이게

만들어 졌다. 방자가 들어온다.)

[방자] 어허 괴이하다.

[애랑] 술 사오셨오?

[방자] 술이 다 뭐야. 술집으로 갈려고 저쪽 모퉁이를 도는데 웬 백발 노인이

나타나더니 너의 집에 피나무 궤가 있느냐? 하고 묻질 않나?

[애랑] 아이고 저런.

 

[페이지] 098

[방자] 있읍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그 노인이 하는 말이 그 궤속에 요망한

귀신이 들어 있어 큰 화를 당하게 되리라. 바삐 그 궤를 불태워 없애라 하시더니

홀연히 사라졌오.

[애랑] 불에 태운다구요?

[방자] 빨리 마당에 집단을 갔다 불을 지펴라. 당장 불에 태워 버리고 말테다.

[배] 아이고 산채로 화장을 당하게 생겼구나!

[애랑] 안될말이오! 저 궤는 조상대대로 물려 받은 기물인데 태운다는 말 당치

않소!

[방자] 그렇다고 앉아서 화를 당할 수는 없지 않나!

[애랑] 화란 말이 웬말이오? 저 궤 속에서 업귀신이 들어 계셔서 우리 식구가

먹고 입고 쓰고 남을 재화를 점지해 주시는데 화란 말이 웬말이오? 그런 말씀

하시려거든 우리 헤어집시다.

[방자] 이제야 네년의 본색이 나오는구나. 나도 네 행실 못믿어워 못살겠더니

잘 되었다.

[애랑] 나도 당신의 의처증 때문에 더이상 못 살겠오.

[방자] 오냐 피차 잘되었다. 그러면 가장 집물은 모두 너 가져라. 나는 이 업궤

하나만 가지고 갈련다.

[애랑] 안돼요! 업궤를 당신이 가져가면 날더러 거<<0>> <<렁>>뱅이 되란

말이요? 가장집물 당신이 가지고 이 업

 

[페이지] 099

[장] 5. 배비장 망신마당

동헌이다. 한 가운데에 뒤주가 놓여 있다. 그 속의 배비장 이미 얼이 빠져 있는

듯하다. 동헌의 관속들 저마다 이미 얼이 빠져 있는 듯하다. 동헌의 관속들

저마다 파도 소리를 내고 뒤주를 이리저리 기웃둥거려 마치 뒤주바다에 떠

흘러가는 듯하게 한다. 어떤 자는 바가지에 물을 퍼 뒤주 틈새로 물을 붓는다.

배비장 틈새로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 쓰고 더욱 놀라 그 안에서 소리치고 뒤주를

밀며 야단이다.

[음악 24] 이내 신세 웬말인가

[배] 내가 전생에 무슨 죄 지었기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알몸으로 궤에 담겨

수중고혼이 된단 말인가?

이 물에 빠져 내가 죽은들

세상 누가 슬피 울어주리.

 

[페이지] 100

(사령들 궤를 밖으로 내가며 목사와 관속들 동리사람들 몰려 나온다.

[음악 22] 불쌍한 배비장 나으리.

[합창] 불쌍하고 불쌍하다.

배비장 나으리

선비인척 군자인척

갈짓자 걸음 호기롭고

상투는 꼿꼿 끄덕끄덕

젠체 난체 하시더니

뒤주속에 갇힌신세

불쌍하고 불쌍한 신세 되었네.

이 세상에 장담 못할 것

술과 계집이라 했는데

양귀비 서시 두릅으로 와도

외눈하나 끔적 안한다

호기롭고 장담하더니

제주일색 애랑아씨에

흐물흐물 녹아나서

뒤주에 갇힌세 되었네.

 

[페이지] 101

궤는 날 주시오. 나는 이 업궤를 못놓겠오.

[방자] 허허, 궤하나로 우리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 공평하게 나누자.

[애랑] 궤 하나를 어떻게 공평하게 나눈단 말이오?

[방자] 톱으로 반을 켜서 나누어 가지면 될 것 아닌가?

[애랑] 톱으로 반을 켜요?

[방자] 그렇지.

[배] 아이구 이젠 토막 귀신디게 생겼구나. 이판 사판이다. (큰소리로) 이

무식하고 미련한 놈아!

[방자]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애랑] 업궤 귀신이 노한 소리요.

[배] 업궤를 불에 태우거나 톱을 대기만 하면 당장 급살을 맞게 하리라 라 라.

[방자] 과연 그 노인의 말이 틀림 없다. 우물쭈물 하다가는 큰 화를 못

면하리라. 이 궤를 당장 내다가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이 상수로다.

[애랑] 안돼오! 안돼오!

[방자] 시끄럽다! 짐꾼들 어서 이 업궤를 저 바다로 날르게!

(사령들 들어와 궤를 나른다.)

[배] 이번엔 속절 없이 물귀신이 되게 되었구나.

 

[페이지] 102

천리 밖 고향의 백발 모친

다시는 못보겠네.

독수공방 긴긴 밤

이몸만 오매불망 기다리는

규중의 불쌍한 아내

다시는 못보겠네.

(목사가 손을 든다. 통인이 이에 따르고, 그러자 뱃노래가 멀리서 가까이로

들려 오는듯 부른다.)

[음악 25] 뱃노래/합창

*가사 생략.

(멀리서 점차 가까이 들리는 뱃노래를 배비장이 듣고 있다가)

[배] 분명 가까이에 배가 지나고 있구나. (크게 소리지른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사령] 바다 가운데서 사람소리가 들리네.

[배] 저기 가는 배가 어디 배요?

[사령] 제주배요.

[배] 무엇을 실었오.

[사령] 미역 전복 해삼을 실었오.

[배] 가지 말고 내 말좀 듣소-.

[사령] 무슨 말이여?

 

[페이지] 103

[배] 어렵지만 이 궤를 실어다가 죽을 사람 살려주오!

[사령] 무변대해 이 수중에 궤속에서 사람소리 괴이하다. 삿대로 밀쳐라! (다른

사령 들었던 작대기로 궤를 밀친다.)

[배] (놀라서) 아스시요. 제발 아스시요! (울며) 살려 주오! 제발 살려주오!

나는 진정 사람이니 제발 덕분 살려 주오!

[사령] 네가 분명 사람이면 거주 성명을 말하여 보라!

[배] 예-. 나는 원래 한양 서강사는 배선달로 제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오.

[사령] 알겠다. 제주라 하는곳이 여다의 섬이요, 여색이 또한 으뜸이니 너는

유부녀 통간 갔다가 저지경이 되었구나!

[배] 네 옳소이다. 누구신지는 모르나 제 신세를 바로 맞추었소. 날 좀 살려

주오. 물에서 죽을 목숨 살려주시면 적덕이니, 수중고혼될 이 목숨 제발 살려

주오.

[사령] 우리 배는 부정이 탈까 못 올리겠고, 궷문이나 열어 줄 것이니 헤엄이나

쳐서 가지.

[배] 글랑은 염려마오. 내가 용산 마포 왕래할 때 개헤엄 배웠오.

[사령] 이 물은 강물과 달라 바닷 물이라, 짠 물이 눈

 

[페이지] 104

에 들어가면 눈이 곧 멀고 말 것이니 눈을 딱 감고 헤엄을 치시오.

[배] 눈은 생전 멀지라도 목숨이나 살려 주오.

[사령] 그럼 눈이 멀지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오!

[배] 예예. 눈이 멀지라도 당치 않소!

(목사가 손짓하면 방자가 등장하여 궤의 잠을쇠를 연다. 배비장에게 다시 한번

물을 쏟아 붇는다. 배비장 황급히 물 속에서 솟구치듯 뛰어 올랐다가 헤엄치는

동작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 진다. 눈을 꼭 감은 배비장 동헌 마당을 헤엄치듯

헤맨다. 목사가 다가가서 부채로 배비장의 이마를 때린다. 눈을 번쩍 뜬 배비장

목사를 쳐다 보고 놀라서 일어선다.)

[목사] 자네 그 꼴이 웬일인고?

[배] 사또, 사또께서는 언제 용궁으로 도임하셨나이까?

[목사] 부채로 배비장의 배를 찌르며) 자네는 어쩐 일로 알몸으로 동헌에

등대하였는고?

[배] 아니 그럼 여기가 동헌이옵니까? (그제야 주위를 둘러 본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관속과 기생들. 그제서야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배비장

당황하여 손으로 몸을 가리며 작그리고

 

[페이지] 105

앉는다. 목사가 손짓하자 애랑이가 배비장 앞에 나선다.)

[애랑] 나으리!

[베] (뒷걸음치며) 아니 그대는?

[방자] 제주 일등기생 애랑이 아닙니까?

[배] 뭐라고? 기생 애랑이라고? 그럼 전날 정비장을 홀랑 벗기고 이빨을 뺀

애랑이라 정녕 이 여인이라 말이냐?

[방자] 여부 있읍니까?

[애랑] 나으리!

[배] 나를 이처럼 홀랑 벗겼으니 이제 앞니를 빼려는구나!

[애랑] (다가서며) 나으리!

[배] (뒤돌아 달아나며 입을 막는다.) 아이고 배비장 살려주오!

(배비장 겁에 질려 달아 나기 시작한다. 쫓는 애랑. 동헌 마당을 넓게 쫓기고

쫓는 두사람. 말하자면 배비장은 허위의 형식주의 때문에 여자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겁에 질려 달아나는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배비장을 여자에게 달아나는

인간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의 희극이 계속 되는데 사람들은

박장대

 

[페이지] 106

소 하고, 음악이 터진다.)

 

[페이지] 107

[장] 6. 뒷풀이 마당

[음악 26] 어화 세상사람들아

[합창]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내 말을 들어 보소.

남의 말 하기 좋다

배비장 비웃지 마소.

애랑이 방자 행동이

지나치다 욕하지 마소

[독창] 입에 발린 소리며 실행치 못할 헛 맹세

배비장만 하였던가

가슴에 손을 얹어 보소.

[독창] 한이 맺힌 사람들

한풀이 노름 해 본들

애랑 방자 시원할까

그래도 한은 그냥 남네

[합창]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내 말을 들어 보소

 

[페이지] 108

세상 만사 이래 저래

한결 같을 수 없는데

하나로 찍어낸 듯이

모든 것이 같을 수 있나

[독창] 배비장도 한 인간

방자 애랑도 한 인간

누가 누굴 나무라며

뉘에게 돌을 던질까나

[독창] 너에게는 죄 있다

이몸에게는 죄 없다

떳떳한이 그 누구며

부끄럼 없는 사람 있나

[합창]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내 말을 들어 보소

남의 말 하기 좋다

배비장을 비웃지 마소

애랑이 방자 행동이

지나치다 욕하지 마소.

(노래 점점 빨라지고 가사는 반복되다가 휘몰아 치는 무곡이 되어 고조되면서

막.)

--------------------------------------------------------------------------------

 

 

  

베비장전.hwp
0.08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