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용찬
8·15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희곡문학에서 주제의식이 큰 폭으로 변화하였다. 유치진, 김진수와 같은 기성 극작가들이 전쟁의 황폐함과 이데올로기 대립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반면, 1950년대에 등장한 신진 극작가들은 전쟁으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새로운 모랄의 대두를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차범석, 임희재, 하유상, 이용찬 등이 대표적인 신진 극작가들로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전쟁으로 인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나 궁핍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용찬의 경우, 그의 대부분의 희곡작품이 전통적 가치관으로서의 가족 개념의 변질과 붕괴에 대하여 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시대 작가들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는 1957년 국립극장 장막희곡 공모에 「가족」이 당선되어 극계에 데뷔한 이후, 「모자」「피는 잠에도 자지 않는다」「회중시계」등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가족」이후, 작품성의 면에서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방송극 창작에 주력하였다는 점이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가족」「모자」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들이 희곡으로서의 독자성을 발견하기 어렵고 멜로드라마적 통속성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방송극의 대중성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데뷔작인 「가족」은 플래쉬 백 기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주제를 심도있게 표현하는 한편, 상연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사건의 흐름을 되짚어가는 연극적인 재미를 높여준다.
「가족」주제의식은 부자관계를 주축으로 한 세대의식이다. 세대의식이란 전환기의 사회에서 신세대에 의해 제기되는 새로운 문화의식으로, 1950년대에는 전쟁을 계기로 하여 범문단적으로 강렬하게 대두하였다. 그것은 전쟁일 기존의 권위와 가치를 일시에 파괴하는 동시에, 병든 문화로부터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러한 세대의식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에서 주로 보여지는 세대간의 편차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흔히 세대의식이란 신세대와 구세대간의 갈등이 신세대에 의하여 발전적으로 극복되거나, 과거에 대한 급격한 단절의식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가족」은 구세대의 잘못된 가치관으로 인해 희생당한 아들세대를 통하여 신구세대가 숙명적으로 얽혀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용찬의 경우, 세대의식이 가족이라는 한정된 인간관계를 통하여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용찬의 작품세계에서 가족이란 중심 모티프인 동시에 주제의식을 감싸는 것이다. 그는 가족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핵으로, 단지 혈연관계라는 좁은 의미에서만이 아닌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소집단의 단위조직을 이루는 비혈연관계의 가족까지 포함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개념과 이해는 그의 전 작품에 걸쳐서 일관되게 추구되는데, 그것은 언제나 현실상황과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가족」역시 박기철의 가족이 전쟁과 경제적 몰락 등으로 겪는 고통을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다. 여기서 가족 구성원은 개인은 그가 속한 사회와 유기적 관계를 맺는 사회적 존재이다.
「가족」에서 아버지인 박기철과 아들 박종달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긴밀한 유사성을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는 집단적 가치에 어긋나는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들은 개인적인 욕망을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고 행위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회적 혼란기에 직면하여 박종달이 희생물로 선택되는 과정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는 아버지의 절대적 권위에 항상 위축되어 있으며, 자생력을 상실한 인간형이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제한당한 개인의식을 회복하고자 시도하는데, 그것은 살인의 형태로 나타난다. 고리대금업자 임봉우의 살해는 우연한 계기로 인해 이루어지지만, 살인행위는 아버지와 그를 차별화시키고 박종달로 하여금 정체성을 갖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가족」은 박종달의 이와 같은 시도가 끝내 좌절된다는 점에서 비극성을 구현하며, 그를 희생양으로 변모시킨다. 「가족」에서는 희생적 인물이 스스로 희생될 것을 거부하고 타자를 살해함으로써 비극적 몰락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희생양의 개념으로 「가족」을 분석할 경우, 중심되는 사건은 고리대금업자 임봉우의 살인이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작품은 크게 두 개의 세계로 양분된다. 박종달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의 세계와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는 세계이다. 주인공은 타자를 살해함으로써 행복한 상태에서 불행한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는 종달이 친구인 진상에게 과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2막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1막과 3막은 살인사건 이후의 일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살인은 작품의 결말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주인공을 파멸시키고 세계를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박종달의 살인행위는 우발적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용의주도하게 행해진 범죄행위는 구별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종달은 단순한 희생적 인물에서 희생양으로 전이된다. 「가족」은 플래쉬 백 기법을 이용한 회상극이다. 플래쉬 백이란 몽타주 수법의 하나로 두 차원을 순간적으로 번갈아 보이는 것이다. 이는 소설에서의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과 동일한 것으로, 무대상의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자유롭게 연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때 연극에서의 절대적이고 순차적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해체되고 주인공의 의식에 따라 재구성된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된다.
「가족」에서는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하는 종달의 의식이 극의 전개를 이끌어간다. 주인공의 의식이 작품의 전면에 드러남으로써, 극중 시간의 순차적인 진행은 끊임없이 방해받게 되고, 과거는 현재를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극중 시간의 흐름은 최초의 순간을 기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더 먼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막의 마지막 부분은 과거 속의 대화 장면이 또 다시 더 먼 시점의 이야기를 불러들이는 이중적이고 포괄적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한 가족의 과거사를 회고하는 형식은 과거를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되돌아오는 방식은 작품의 전체적인 완결성을 돋보이게 해준다. 이로써 극중의 현재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관객은 해방직후부터 한국전쟁 이후까지 폭넓은 시간을 체험하게 된다.
제 1막은 인생의 말년에 경제적인 빈곤으로 고통을 겪는 아버지와,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고리대금업자 임봉우를 계단에서 떠밀어 죽여버리는 종달의 행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1막의 첫부분은 박기철의 죽음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형사 김석근은 노인이 불행하게 운명하신 이 마당에 살인사건을 덮어두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하는 종달의 절규가 이어진다. 여기서부터 극도의 불안감과 죄의식에 시달리는 종달의 의식을 좇아 과거 회상의 형식으로 한 가족의 몰락사를 탐색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버지 박기철은 기존 사회의 질서를 대표하는 구세대에 해당한다. 그는 가족 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인물로서, 큰 사업을 하다가 엉성한 점포를 벌려놓을 수는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아들에게 점포라도 물려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이렇듯 박기철은 적극적으로 현실에 대처하기보다는 체면에 급급해 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아버지의 허위의식은 아들의 자립을 방해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 허위의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그를 비난하는 아내 덕실 역시 왜곡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며느리의 취직 문제에 대해서는 냉담하게 반응하는 한편, 딸 애리는 패물을 팔면서까지 유학을 시키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박기철과 덕실로 대표되는 구세대의 허위성은 아들의 자립을 방해하고 개성을 억압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종달은 33세의 가장이지만 제대로 직장생활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무능력자이다. 더구나 그이 친구 진상이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켜주겠다는 호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모습에서, 그 역시 체면이나 허영심에 사로잡힌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잘못된 관념에 대하여 반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반항은 기존 사회의 그릇된 가치를 거부할 능력이 없는 극히 미약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구세대를 극복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에 비하여 진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종달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는 고아 출신으로 가족의 유대가 없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존재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종달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그는 현재 회사의 과장으로 순조로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작가의 과거로부터의 단절의식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극중에서 진상의 기능은 신뢰할 만한 친구에 해당한다. 그는 살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 극중 행위의 진실성을 보증해주는 동시에, 종달의 내면적 갈등을 들어주는 상담자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한편 종달이 아버지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양가적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속박해온 데 대해서는 증오심을 품고 있지만, 혈연으로서의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그는 결국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하여 애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하고 이중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애증의 복합적인 감정에 의하여 종달은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을 갖게 된다. 살인행위는 종달이 아버지와 동일화 현상을 체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아들이 임봉우에게 빚독촉을 받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이다. 박종달은 진상과 함께 바에 들러던 중 계단에서 취한 임봉우를 만나게 되고, 순간적인 분노로 노인을 계단 밑으로 밀어버린다.
한 개인의 희생양으로 선택되는 것은 그의 변별적 특징에 의해서이다. 종달의 경우, 왜곡된 부성애에 의해 사회의 부적응자로 전락하였다는 점에서 희생양으로서의 특성을 갖추었으며, 이는 진상과의 대조에 의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종달은 아버지의 잘못된 가치관에 대하여 반발하고 있지만, 흔히 신세대에게 기대되는 주체성과 자발성이 결여된 타율적이고 희생적인 인물이다. 그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제까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하여 온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억압당해 왔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2막은 1막보다 앞선 종달의 청년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시간의 역행은 종달이 만취된 상태에서 잃어버린 시계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다.종달은 진상에게 시계의 내력에 대하여 들려주며, 그 이야기가 2막을 구성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자가 아닌 종달의 모습을 보게 된다. 비록 경제적인 몰락으로 가족이 정신적 ·물질적으로 고통을 겪고 있지만, 가족 간의 유대감이 긴밀하여 비교적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2막은 세 개의 주요한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종달의 캠핑과 아버지의 5.30선거 낙선, 그리고 6.25전쟁이다. 각 사건들은 종달이 아버지에 대해 품고 있는 모순된 감정과,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아버지의 허황된 욕망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종달의 캠핑 장면은 아버지의 욕망이 아들의 성장을 방해한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대학 졸업을 앞둔 장성한 아들의 캠핑을 염려한다거나, 진상과 함께 영어를 배우겠다는 종달의 부탁을 거절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사회적 체면과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구태의연한 구세대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 방식은 현재 아들의 무기력한 삶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박기철의 아들에 대한 지나친 애착과 허영심은 아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게 되고, 사회생활에 부적당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점은 종달이 산행을 하던 중 미끄러지면서 카메라를 깨뜨리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종달은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5.30선거 낙선은 아버지의 현실적인 욕망이 어떠하였나를 보여주고 있다. 박기철은 재산가로 일제시대에는 돈벌이만이 출세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해방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에 대한 포부를 펼치고자 한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낙선으로 종달의 가족은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종달의 가족에게 일어난 또 하나의 비극적 사건은 6.25전쟁이다.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종달의 집에 내무서원이 들이닥치고, 종달의 동생 종수가 끌려가게 된다. 여동생 애리 역시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또한 종달은 전쟁 와중에 애인 연희와 헤어진다. 이렇듯 종달의 가족에게 전쟁이란 가족간의 헤어짐이라는 비극적인 체험으로, 이념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이상에서 보여주듯이, 종달의 청년시절은 6.25전쟁과 아버지의 국회의원 선거 낙선, 그로 인한 경제적인 몰락 등으로 극히 불안정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달은 왜곡되고 비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밖에 없으며, 외적·내적 강제력으로 무기력하고 왜소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따라서 그의 살인 행위는 자율적 인간이 치밀한 계획에 따라 저지르는 범죄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달은 주체적 의식이 없는 인간형이기 때문에 도덕적 차원에서의 단죄는 의미가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살인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역으로 사회의 부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즉 박종달의 살인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사회적 위기의식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희생양이 발생하게 되는 외부적 요인으로서의 사회적 위기의식은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새로운 이념적 지표로서의 개인주의의 대두를 의미한다. 기존의 가치와 질서는 혼돈에 빠지게 되고, 개인주의에 의한 새로운 질서가 재편된다. 「가족」에서는 전토엊衁 가치관의 하나로 가족의식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붕괴되는 의식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박기철의 삶의 방식이 60년대 산업화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부조화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며, 결국에는 파멸에 이르고 말 운명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가족」은 박종달의 의식을 통하여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사건의 원인을 되짚는 분석적이고 회고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비주체적이고 무기력한 종달은 서서히 자의식에 눈뜨게 되며, 아버지로부터 독립된 개체로서의 자아를 인식하게 된다. 즉 아버지 세대의 고뇌와 거리를 두고 이해하게 되며, 아버지로부터의 독립된 의식을 획득한다. 종달이 자의식을 획득하는 계기는 진상의 회사에 출근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그동안 실업자로 지내온 종달에게 취업이란 사회집단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종달은 비극의 주인공에 걸맞게 독립된 의식을 획득함과 동시에 죽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종달이 사회로 복귀하는 행위는 형사 김석근의 의도적인 개입으로 좌절된다. 김석근은 종달에게 접근하여 박기철의 알리바이를 추궁하며, 아버지를 살해범으로 의심한다. 그리고는 종달과 진상에게 살인사건이 난 후 바로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한다. 종달은 바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현기증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죄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그 이후 종달의 죄의식은 과감성을 보이게 되고, 죽음에의 충동을 강화시킨다.
물론 종달이 타율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죄의식에 시달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판단되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죄의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는 점에서 비극성은 구현된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그릇된 교육방식이 아들의 자립성을 방해하고, 혼탁한 사회가 그를 범법자로 몰고 간 것이다. 따라서 종달은 근본적으로 살인행위의 책임을 떠맡을 필요는 없는 셈이다.
「가족」의 결말은 종달이 자살을 결심하는 것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러한 해결방식은 개인의 견해를 고수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부르조아적 개인주의의 도래를 예견케 한다. 구시대적 사고를 대변하는 종달과 기철은 혼란에서 신질서로의 이행 그 자체이며, 그들의 몰락을 통하여 과도기적 혼란과 그 속에 잠재해 있는 새로운 질서를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전망은 무대 외적인 시간으로 처리된 종달의 자살로 완결될 것이다.
이처럼 「가족」의 비극성은 일종의 보복 형식으로 실현된다. 비극이 보복의 형식을 취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임봉우의 살해, 그 충격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종달의 자살 결심 등은 연쇄적인 보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낡은 것의 몰락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결말이 화해롭다. 즉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부자의 몰락을 재현함으로써 가정의 확대된 개념인 사회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용찬의 「가족」은 한 가정의 몰락과 가족의식의 붕괴가 해방기의 혼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어 온 전후문학의 범주에 속한다. 1950년대 희곡문학은 전쟁의 고통 치유와 일상으로의 복귀라는 전후문학의 보편적인 과제 외에도 이데올로기의 편향성으로부터 탈피할 것이 중요하게 제기된다. 그것은 6.25전쟁이 파시즘을 근본 동인으로 하는 세계대전과는 달리 좌우 이데올로기가 전면적으로 대립한 전쟁이었다는 점과, 50년대 전반기에 나온 대부분의 희곡문학이 평면적인 반공 전쟁 희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가족」은 전쟁 체험의 직접성에서 탈피하여 전쟁으로부터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일면적이고 대립적인 시각을 지양하고 있다. 또한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주인공의 체험을 압축시켜 무대 위에 재현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무대 위의 사건에 대하여 객관적인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가족사를 되짚는 형식을 취하여 인물의 성격을 분석적으로 구축하였다. 극의 도입부에서부터 하나의 화소가 다른 화소를 이끌어들이면서 극 전개상 필요한 부분만을 설정한 점은 서사극에서의 이화작용과도 일치한다.
「가족」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 그리고 1956,7년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한 가족의 몰락사를 통하여 60년대 이후 앞으로 도래할 사회와도 연속성을 갖고 있다. 구세대인 아버지의 허위의식은 아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생력을 상실하도록 만들었다. 아들의 현재의 무능력한 삶은 아버지의 잘못된 교육방식에 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박종달은 구시대적 가치관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리대금업자인 임봉우를 살해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거부하고 타자를 살해하였으면, 결국에는 죄의식으로 번뇌하다가 자살을 결심하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희생야이다. 여기서 살인해위는 그의 책임을 벗어나는 일종의 결백한 살인에 해당한다. 「가족」은 구세대의 몰락과정을 종달의 사회로의 복귀가 좌절되는 것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세대간의 교체의식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용찬-가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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