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협관점에서 본 인문학의 의미
고병헌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본 강연은 ‘생협’과 ‘인문학’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본 원고에서는 이 두 가지 주제를 따로 정리하고 있으나, 강연에서는 생협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인문학적 성찰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볼 것입니다. |
1. 생협활동의 범주에 대한 대안적 관점
Well-Being (살아있는 사람의 ‘좋은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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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Dying (품위 있게 죽을 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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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Dead (죽은 자의 인권) |
2. 신자유주의 시대가 던지는 생협의 핵심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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衣․食․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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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정부가 시장(市場)에 내맡기는 영역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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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질문) 인간의 불가피한 욕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 |||||
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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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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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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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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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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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생협 조합원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장애교육을 사례로 설명)
<질문 1: 아래의 각 단계에서 장애운동과 장애교육에 해당되는 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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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장애를 겪는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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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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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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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개입 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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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저하로 인한 사회적 불리 방지 (이동권 보장, 취업지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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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저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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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개입 단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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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상이 능력 저하로 이어짐 방지 (작업장 시설 개선, 장애인 취업 지원을 위한 자원봉사자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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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정신적 손상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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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개입 단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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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상 발생원인 사전 방지 (공해, 흡연, 수질오염, 부실공사, 음주운전, 난개발 … ) |
<질문 2: 위의 각 단계에서 생협의 주요 활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 교육적 관점에서 볼 때, 생협 조합원들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 낼 수 있는 대안적 교육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이때 인문학적 성찰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 교육에 대한 올바른 관점 정립
○ 성찰적 사유 능력 (자기 판단 능력 고양)
○ 지역사회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정보
○ 미래에 대한 전망 세우기
인문학 이해
1. 인문학이란
• 인문학은 인간과 관련된 현상들을 탐구하나 인간을 객체로서 다루지 않음. 이 점에서 사회과학과 구분됨 (황수영, 2005: 31)
• 『주역(周易)』의 비괘(주역의 64괘중에서 스물두 번째로 나오는 괘)에 “천문을 살펴 계절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변화를 이룬다.(觀平天文 以察時變 觀平人文 以化成天下)”라는 문장(황수영, 2005: 34):
⁃ ‘천문(天文)’과 ‘인문(人文)’이 대비되어 각각 하늘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냄. 여기서 ‘문(文)’이라는 말은 본래 ‘무늬’라는 뜻이지만, ‘밖으로 드러난 모습’, ‘감춰져 있는 기본 원리의 발현’이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음
⁃ 조선 초기 정도전은 ‘인문’이 드러난 현상을 ‘시서예악(詩書禮樂)’이라 하여 문학, 역사, 사상, 예술을 지칭하고 그 원리를 ‘도(道)’라 하였음
⇒ ‘인문’이란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현상’을 말하며, ‘인문학(人文學)’이란 그 원리를 찾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음
• 철학자 이정우는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을 ‘글(文)을 읽어 사람(人)을 이해하는 학문’, 즉 “사람이라는 존재 및 이 존재가 창출해낸 문화적 산물들을 이해하는 담론”이라고 정의(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 2005: 213)
• 서양의 인문학(Humanities) 개념은 키케로의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나옴. 후마니타스는 이상적 인간형의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제시되었음. 키케로는 소피스트들과는 달리 논쟁술이 아니라 수사학(rhetoric, 역사학 포함)을 중심으로 하여 문법(문학 포함), 고전강독과 해석, 논리학, 산술, 기하, 천문학, 음악 등을 교육과정에 포함(황수영, 2005: 34-35)
• 황수영은 “인문학은 인간형상을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움’ 또는 ‘인간적인 것’이라는 이념을 가지고 인간적 사실을 대하고 판단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필연적으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와 같은 가치판단을 내포하게 된다. 이처럼 있는 것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상정하고 이에 비추어 현실을 판단하고 탐구하는 것을 ‘규범적’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동양에서 인문현상의 원리로서 도(道)를 지칭한 것이나 키케로가 이상적 인간형의 양성을 목표로 하였던 점은 다 같이 인문학이 가지는 규범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에 주목한 것”(황수영, 2005: 36)이라고 함
• 인문학의 대상은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을 그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문제 삼는 일이라고 황수영은 말한다(황수영, 2005: 41). 즉, 인문학은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문화(인간이 삶의 역사 속에서 창조한 모든 것들) 활동을 대상으로 하되 이를 인간과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 문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문학이 주체로서의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것들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인문학의 대상은 사실 매우 복합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 의미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황수영, 2005: 43). 다만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다른 점은 그것을 문제 삼는 방식에서이다(황수영, 2005: 44).
• 오늘날 인문학과 자연과학, 과학과 종교 사이의 분리와 간격, 대화와 소통의 단절의 문제에 대해서, “통합을 이루거나 반박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자연과학에서 발전된 방법론들”이라는 신념에 기초한 윌슨의 ≪통합(Consilience)≫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인문학이 “인간이 때때로 이루어낸 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최소한 상황을 교정하거나 순화시키는 역할을 해야 함에도, 극단적인 무기력증에 빠져 아무 할 말이 없는 ‘전달자’가 되었고, 아무 가르칠 것이 없는 ‘교육자’가 되었다.”고 지적한다(웬델 베리, 2006: 179). 그러면 어떻게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화여대 박경미 교수는 웬델 베리의 책 『삶은 기적이다(Life Is A Miracle)』의 역자 후기에 웬델 베리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웬델 베리, 2006: 233):
“ …… 그러나 그(윌슨)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보고 있다.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으로 머무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없는 것은 각자 자신의 전문성에 함몰되어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요구들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 채 자본의 요구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과 자연과학, 종교와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통합된 학문체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자연과학이건 인문학이건 자본의 노예가 되었다는 데 있고, 노예는 소통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노예가 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하나의 통합된 체계를 만든다고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윌슨은 과학자로서 환원의 작업 후에 종합과 통합을 하겠다는 만용을 부릴 것이 아니라, 웬델 베리의 말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세계로, 모든 추상화와 환원의 과정에 앞서면서 동시에 그 뒤에도 살아남는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이 대화와 소통은 다시 각자의 영역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 철학자 김영민은 인간의 내면에 삼투(滲透)한 말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인문학 공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공부, 특히 인문학의 공부라는 것은, 도구적 기능 속으로 온전히 회수되지 않은 말의 잉여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그 감각은 말이 도구적으로 대상화되지 않는 부분, 즉 인간 존재와 내적으로 연루하는 부분을 귀신처럼 느끼고 만지고 즐긴다. 나는 숫자를 단지 기호적 도구로만 여기지 않고 그 자체를 심미적 찬탄의 대상으로 여기는 수학자를 여럿 알고 있다. 숫자가 자연의 질서와 관련되는 이상으로 말은 이미,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인간존재 속에 깊이 삼투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人文學)은 문학(文學)을 그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문자학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문학 역시 그 문자학적 기반 위에서야 그 본령의 의미와 가치를 꽃피운다. 한글로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이 한글을 익히고 쓰는 일은 모스 부호나 에스페란토, 혹은 고대 중동의 어느 사어(死語)를 채집하고 배우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차이가 가리키는 언어적 심연을 정직하게 겪는 일은 인문학으로서의 공부 길에서 놓칠 수 없는 알짜다. 호미나 휴대폰이나 정보처럼 그 기능의 창고 속으로 온전히 회수될 수 없는 말, 내내 넘치면서도 낮은 말, 그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한겨레, 2007년 8월 25일자)
• 목회자이자 언론인, 국제문제 전문가인 김민웅은 모든 삶의 영역에 사유의 깊이를 더해가는 일은 스스로가 창조해나가는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고, 또한 자유인으로서 자기 인생의 행복한 주역이 된다는 의미이며, 인문학은 그런 자유를 위한 양식이라고 말한다(김민웅, 2007: 9). 그는 인간이란 자신의 몸과 머리로 사유하는 힘을 기르고 지식과 삶이 하나가 될 때, 빠르게 뛰어가는 일만 능사인 줄 알았다가 멈추어 서서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며 어디로 가야할지 질문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력을 다채롭게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을 가치 있게 변화시키면서 좀 더 의미 있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데, 인문학이 바로 이 힘을 길러줄 것이라고 말한다. 인문학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오랜 문명의 자산과 인류의 지혜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김민웅, 2007: 7).
• 영문학자 김우창은 『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과의 신념대담에서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호화스럽게 사는 그런 것에 재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설득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환경에 대한 의식이 꽤 생겨났다고 하지만, 큰 자동차들을 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닌 것 같아요. 요즘 서울에서 외제 자동차가 매일매일 불어나요. 벤츠다 뭐다 하는 그런 것을 몰고 다니는 게 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것을 반성하려면 상당한 문화적인 힘이 있어야 합니다. …… 그런 점에서 인문과학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제대로 사는 게 소비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어야 해요. 소비생활이 중시되는 분위기는 진보진영에도 책임이 있어요. 진보주의에서는 사회성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개인의 내면적 가치라는 것은 무시되고, 지난 백여 년간 독립운동이니 민주화니 하는 시대적 요구 때문에 전부 외면화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사회성이 강조되고, 내면적 가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될 수밖에 없었어요. 옛날에도 과거를 봐서 급제하면 사람들이 알아주고, 높은 사람이라고 존경했잖아요. 과거에 급제를 하지 않아도 과거를 봤다는 것 자체가 촌에서는 신분이 올라가는 계기가 되고 그랬지요. 외적인 것에 불과한 가치, 관(官)이 부여한 가치에 의해서 우리가 너무 눌려왔어요. …… 마을 공동체 안에서는 특별히 꾸미지 않아도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미리 다 알고 있으니까 관계가 없지만, 대중사회가 되면서 길에서 잠깐 스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판단할 기준이 그것밖에 없어요. 자기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은 스스로의 내면적인 느낌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름대로 보람 있게 살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다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자연과의 접촉이고요. ……”(김우창, 2008: 32-33)
• 도정일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시민교육이 인문교육”이라 하였다. 그는 인문교육은 결코 인문학 전공자를 길러내기 위한 전문교육으로 편협하게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인간적․시민적 덕목, 가치, 정신자세와 행동원칙을 기르도록 도와주는 교육”이기에 “중등교육 전 과정에 정성스레 도입되어 사람을 사람답게 길러낼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문교육이라고 강조한다(한겨레, 2008년 4월 4일자).
※ 참고로, ‘교양(敎養)’의 의미에 대하여
도쿄 케이자이대학교 현대법학부 교수인 서경식은 ‘교양’을 한마디로 “지위 상승이나 실용적 목표를 지니지 않은 앎, 실험실적이지 않은 앎, 그러나 살아남기 위한 힘이 되어주는 앎”(서경식․김상봉, 2007: 345)이라고 정의하면서, 이러한 ‘교양’은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이런 것이 성공적인 삶이다’라는 일원적인 가치관을 주입시키면서 외부를 볼 수 없게 만들 때, 그렇게 강요된 세계관을 넘어서서 실제로는 매우 다양한 세계관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서경식․김상봉, 2007: 369-371). 이에 대하여,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김상봉은 앎의 두 가지 종류, 즉 ‘실용적 목적을 갖는 앎’(도구적 앎)과 ‘타율적 목적에 예속되지 않는 앎’(자유로운 앎)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오직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정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인데, ‘교양’이란 바로 이렇듯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자유롭게 규정할 수 있기 위해 요구되는 정신적 소질이라고 하였다. 김상봉은 “무엇을 생각하든 자유인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건강한 사고방식”이며 “올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힘”이 바로 ‘교양’이라고 하면서, ‘올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기’, ‘돌이켜 생각하기’, ‘’언제나 남들과 더불어 생각하기‘ 등 세 가지 단계의 생각 유형을 포함한다고 말한다(서경식․김상봉, 2007: 346-350).
※ 인문학의 위기에 대하여
『인문학의 즐거움(Arts of Living)』의 저자 커트 스펠마이어(Kurt Spellmeyer)는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책을, 혹은 어떤 지식을 가르치고 안 가르치고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사회로부터의 점차적 고립’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립은 우리 시대의 해결되지 않은 중대한 싸움, 즉 “자신들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벌인 투쟁”에서 인문학이 잘못된 편을 들었기 때문인 측면이 크다고 커트 스펠마이어는 말한다. 이 세계가 국가라는 세계뿐만 아니라 가족과 이웃, 시민사회, 지역사업과 예술 등으로 구성된 ‘작은 세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문학은 우리의 ‘작은 세계’, ‘더 작은 세계’를 소생시키거나 재형성, 혹은 확장시킴으로써 ‘작은 세계들’과 ‘더 큰 세계’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공명(共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기능이어야 하는데, 인문학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써 ‘더 큰 세상’, ‘더 넓은 사회’ 그 자체로부터도 거꾸로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러한 진단이 억지라고 볼 수 없다는 데 동의할 수 있다면, 결국 인문학의 위기 또한 인문학의 이러한 ‘고립’이 다른 사람들이 인문학을 ‘독점한 전문가들’에게 존경을 눈초리를 보낼 것이라는 착각에서 하루속히 깨어나 “더 많은 사람에게 소용되는 더 많은 지식을 생산하고 기존의 지식을 유례없는 새 방법들로 보급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소통시키는 역량’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커트 스펠마이어는 과학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그는 현재 과학의 발전이 양자역학의 마이크로버스나 블랙홀의 매크로버스와 같이 점점 이 세상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러한 과학의 업적이 ‘인간적인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과학이 발견한 것들을 일상생활과 일반적 언어에 맞게 ‘번역’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번역자’, 혹은 ‘통역자’의 기능을 인문학이 떠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통역자’로서의 인문학의 기능은 단지 과학의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고 다른 다양한 지식과 학문 영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으로, ‘의학 인문학’, ‘법 인문학’, ‘경제 인문학’, ‘미디어 인문학’ 등과 같은 새로운 분야들을 만들어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 인문학의 교육과정
• 예술이 중요한 이유
『인문학의 즐거움(Arts of Living)』의 저자 커트 스펠마이어(Kurt Spellmeyer)는 인문학이 과학의 방법론을 모방해서 과학의 경쟁자가 되려고 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결국 인문학의 고립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이제부터라도 그동안 오래 유기되어 있던 그 뿌리를 비평적 연구나 문화 소비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실질적인 예술창작으로서의 예술에서 재발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실질적인 예술창작으로서의 예술이 매우 효과적인 인문학의 통로가 될 수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나는 인문학의 목적이 전문지식과 일상적인 생활세계-의사나 물리학자, 목수나 판매대행원으로서가 아니라, 또한 여자나 남자, 흑인이나 백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우리가 함께 나누는 세계-를 연결시키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술이 필요불가결한 그 역할을 맡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다양한 관점과 원칙들, 그리고 신념들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중요성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고도로 의식화(儀式化)된 방식으로 모든 인간 문화의 요소를 최상의 형태로 수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에서 나와서 세계로 들어가는 움직임과 세계에서 나와서 다시 자아로 들어가는 움직임을 말한다.”(커트 스펠마이어, 2008: 46-47)
커트 스펠마이어는 그동안 시민사회 영역에서 비판적 지식인들 중심의 담론 생산이 무성하였음에도 실제 세계가 나아지지 않은 현상에 대해서 “이론의 승리가 우리에게 뭔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안의 고갈과 진정 새로운 것을 꿈꾸는 능력의 상실일 것”(커트 스펠마이어, 2008: 50)이라고 꼬집으면서,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 시대에 예술과 인문학이 해야 할 일은 더 만족스럽고 더 정의로우며 더 아름다운 대안들을 상상해내고 또 창조해내는 것”(커트 스펠마이어, 2008: 51)이라고 역설한다.
• 문학이 포함되는 이유
살다보면 누구나가 윤리적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도덕적 판단을 뛰어넘는 행위나 사고를 종종 목격하거나 경험하게 된다. 문학작품 중에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러한 행위와 사고를 묘사하여 인간성의 깊은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 현상’으로서의 ‘인문(人文)’의 새로운 모습, 즉 기존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차원의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황수영, 2005: 36). 달리 표현하면, 문학작품의 등장인물의 행동 묘사를 읽는 것은 결국 작가의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간접적으로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황수영, 2005: 37), 문학은 ‘인문’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 역사가 포함되는 이유
우리는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다양한 사건들(예를 들어, 시민들의 혁명적 저항), 혹은 인물들을 통해서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황수영, 2005: 38).
•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러면 왜 고전(古典, classic)인가? 고미숙은 고전이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이자 매트릭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고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고미숙, 2007: 117):
∎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책
∎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이 담긴 책
∎ 새로운 시대를 예감하는 책
∎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책
∎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책
“탈근대적인 교육에서 고전이 전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현실을 좇는 공부가 청소년들이 내공을 쌓는 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 정보가 과잉으로 넘치는 지금은 정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신체적 감응 능력이 없어요. 교육은 신체를 바꿔줄 수 있는 삶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야 합니다. …… 고전의 위대한 점은 동야만 놓고 보면 석가, 공자, 노자가 2500년 전에 삶과 우주에 대한 근본 문제를 제기하면서 스승이 됐는데, 지금도 그들을 능가하는 지식이 안 나와요. 자아라든가 마음, 감정, 느낌이 뇌의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데 첨단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뇌과학인데, 부처는 이미 2500년 전에 ‘네 몸을 알면 우주를 알 수 있다’고 했거든요. 뇌과학자들이 『금강경』과 만나는 겁니다. 비유하자면, 지금 인류는 예수, 부처, 공자와 뇌세포를 3분의 1씩 공유하고 있어요. 누구나 이 매트릭스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텍스트를 일상으로 가지고 와서 내 인생의 든든한 자산으로 갖고 가야죠. 정년퇴임하고 나서 노자, 장자 읽고 그러는데, 늦은 거죠.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은 나와 함께 있는 건데, 그런 걸 공부해야 합니다.”(고미숙, 2007a: 102-103)
• 당신은 어떤 과목을 어떤 이유에서 포함시키려고 하는가?
3. 인문학의 방법론
• 사람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는데, 인문학의 위기는 사실 ‘과학’이 될 수 없는 인문학에 과학의 특성을 요구하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황수영은 말한다. 그는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인성교육을 목표로 하는 전통적 이념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인문학은 과학과는 다른 위상에 있으며, 따라서 과학이 될 수도 없고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인문학에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것이기보다는 인간과 세계의 통일적 이해에 도움이 되는 독자적인 방법, 그것도 인간다움을 위한 규범적 특성에 어울리는 비판적 이성의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황수영, 2005: 46). 사실 ‘인간다움’이라든지 ‘인간성’에 대해서 사람들이 일치된 견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 된다. 사람에 따라, 사상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인간다움’이나 ‘인간성’의 모습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문학은 결국 ‘인간다움’에 대해서 항상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황수영, 2005: 38).
• 교정인문학과 ‘대화법’
“……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소외계층에 대한 인문학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책이 ……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모델로서 ……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얼 쇼리스는 그 책에서 강의의 커리큘럼을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 철학과 유럽의 문학예술의 고전 또는 정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토대로 유럽적 인문주의에 기반한 강의안이었다. 유럽 중심주의의 익숙한 커리큘럼이었다. 동시에 소크라테스식 ‘대화법’ 또는 ‘산파술’의 강의 형식을 강조했는데, 과연 그런 방식이 스스로에 대한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고, 실제로는 교도소에서의 자기 자신을 외부인에게 은폐하고자 하는 수용자들에게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서 회의적이었다.”(이명원, 2007: 177)
반면, ‘대화’에 대해서 성공회대학교 신영복 석좌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 대화는 굉장히 많아졌어요. 속도도 빨라졌고 댓글이나 매스미디어 등을 통해 넓이도 확장됐죠. 우리는 굉장히 많은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문화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과연 진정한 대화인가’에 대한 회의를 갖게 돼요. 오늘 아침에 소크라테스를 읽었어요. 소크라테스가 흔히 ‘너 자신을 알라’고 하잖아요. 너 자신을 알라는 게 대화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었어요. 광범위한 대화, 급속한 대화 속에 있지만 대화와 소통이 부재하다는 막연한 느낌은 자기와의 대화가 없고 다른 사람을 향한 대화만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화의 기제가 있음에도 인간적인 대화가 없는 것은 아닌지 아침에 소크라테스를 읽으면서 생각했어요.”(한겨레, 2007년 10월 4일자)
“자기와의 대화나 진정성이 담겨 있는 대화는 없어진 반면에 오히려 언어 이외의 소통 기제는 다양해졌어요. 언어는 개념적 사고예요. 사물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단순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폭력적 기제라고도 볼 수 있죠. 거기에 비하면 패션이나 이미지, 디자인이 굉장히 풍부한 소통 기제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앞으로 이런 기제가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겠죠. 언어적 소통의 소멸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거대담론이 소멸한다는 것이에요.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고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거대담론이 소멸해나간다는 거죠. 감각적이고 이미지 중심의 대화나 소통은 기본 구조를 바꿔가려는 거대담론이 해체된 이후의 포로들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 담론은 없어지고 파편적인 대화만 있으면 사회의 기본 구조가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드는 거죠. 그래도 개방적이고 다양한 의사소통 구조의 발전과 공유는 그 속에 담기는 콘텐츠나 진정성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유력한 기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한겨레, 2007년 10월 4일자)
“…… 사람들은 소모적인 대화에 익숙해져 있고 중요한 주제를 기피하는 대화를 주로 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러나 많은 걸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도 기쁘긴 하지만 뭔가를 깨닫는 것이 진짜 기뻐요.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인성을 고양하는 거예요. 좋은 사람이 된다는 얘기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다른 사람에 대해 인간적인 이해를 하고, 그래서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대화가 바로 그 부분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죠. 나 자신을 깨닫게 하고 인간관계를 배려하게 하고 우리가 발 딛는 구조나 역사를 성찰하게 하는 그런 진정성을 담아야 합니다. 소모적인 대화는 아픈 사람에게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진통제예요. 진통제는 조금 더 견디게 할 뿐이지 처방은 아니죠.”(한겨레, 2007년 10월 4일자)
• ‘의미 찾기’와 시(詩)
“나는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용자의 상황 자체, 그러니까 ‘갇혀 있다’는 한계상황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우는 다른 것이지만,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다가 살아나온 빅터 E.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프랭클은 갇힌 상황 안에서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의미 찾기’에 주목해서 ‘로고 세라피’라는 치유모델을 생각해냈다. 나는 교도소에서 인문학 강의가 의미를 띠기 위해서는, 한편의 시를 읽는 일이 그런 의미 찾기와 관련을 맺는다는 점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이명원, 2007: 178)
• 독서활동
“…… 사람들의 책을 읽는 방법과 대학의 구조를 나중에 결정하게 되는 어떤 혁신적 변화가 12세기와 13세기 동안에 이루어졌다. 12세기 전까지는 독서는 13세기에 일어난 것과 매우 다른 종류의 활동이었다. 그것은 몸으로 행하는 독서였다. 읽는 사람은 소리를 크게 내어 읽었고, 흔히 여럿이서 함께 읽었다. 독서행위는 읽혀지는 단어들을 육화(肉化)시켜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읽는 사람은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연구는 지적이면서 동시에 감각적인 활동이었고, 그런 연구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지적인 것과 동시에 도덕적인 덕성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독서활동은 전인적 참여를 요구했다. 따라서 독서에는 하나의 삶의 방식, 공동체가 전제되었다. 이런 종류의 독서행위는 ‘신성한 읽기(lectio divina)’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 읽기는 학적(學的) 독서(lectio scholastica)와 영적 독서(lectio spiritualis)라는 전혀 다른 두 개의 활동으로 나누어졌다. 상업, 법률, 정부 및 교회행정 등 사회적․지적 필요에 적합한 학적 독서는 우리가 지금 대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번창하게 하였다.”(리 호이나키, 2007: 143-144)
“만약에 학자들이 학문의 단편화를 극복할 방안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두 개의 문화를 통합하는 하나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좀 더 오래된, 그리고 좀 더 제어하기 어려운 과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나의 통합된 독서행위, 즉 사람이 평생에 걸친 자신의 능력, 인간됨, 이력(履歷) 전부를 바칠 것을 요구하는 참여행위로서의 독서 속에서 진지하고, 비판적인 연구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과제 말이다.”(리 호이나키, 2007: 146)
• 글쓰기
작가이자 철학자요, 농부이며 양봉업자이면서 특히 여러 대학과 교도소 등에서 글쓰기를 가르쳤던 데릭 젠슨(Derrick Jensen)은 글쓰기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언제나 ‘지랄’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지랄’이라고 말하는 태도를 확실하게 견지하라고, 그리고 그렇게 해나가면서 신나고 즐겁게 임하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이는 꼭 그런 것들을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님에도, 우리는 그것들에 익숙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우리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낡은 행동과 낡은 패턴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문제를 보았기 때문이다(데릭 젠슨, 2005: 21). 그래서 그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사는 무엇보다도 학생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말한다(데릭 젠슨, 2005: 12). 즉, 학생들은 글 쓰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작가’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학생들은 이미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어떤 방식으로 시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또 이야기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전개해야 ‘맛’이 사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자기의 작가로서의 재능을 깨닫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데릭 젠슨, 2005: 17). 데릭 젠슨은 글쓰기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 읽는 사람을 지루하게 만들지 마라
글이 독자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결국 글쓴이의 메시지가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독자나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훌륭한 뭔가를 쓰거나 말하기 위해서 뭔가 특별하고 엄청난 것을 꾸며낼 필요가 전혀 없다. 오로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데릭 젠슨, 2005: 30), 그리고 그것을 진솔한 태도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 가슴의 소리를 따라라
∎ 온 몸으로 써라
∎ 당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써라
4. 인문학과 지식인
• 박경미의 “지식인과 염치”
“…… 인문학적 가치를 내세워 남을 야단치면서 속으로는 내 밥그릇 챙기는 것은 남의 밥그릇의 엄숙함을 비껴가는 행위이며, 사실을 직면하는 태도가 아니고, 그러므로 비겁하다. 비판적, 인문학적 지성은 자기도취가 아니라 불만스러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나온다. 사물을 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상념에 빠지는 것은 인문학도, 학술도 아니며, 생각의 게으름일 뿐이다. 그리고 상념에서 나온 대안이나 청사진은 게으른 자의 백일몽이다.”(박경미, 2006: 106)
“인문적 소양이 풍부했던 당시 지식인들은 대학 내에 강좌 등을 개설함으로써 체제 내로 흡수된 경우들도 많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몸담아 살고 있는 현실 사회의 위기를 자신들의 지적 사유의 계기로 삼음으로써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적 분위기의 형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지식의 주체성이란 삶과 역사에 관여하면서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을 때 나온다. 그리고 그 사회 안팎 사람들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의 내적 구조와 의미를 살아있는 모습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술해내는 능력에서 나온다. …… 동서양을 통틀어 지식은 국가의 통치수단으로 출발했고, 근본적으로 매판적 성격을 지니지만, 지식, 지식인의 독자적인 발전과 더불어 지식인 나름의 지조와 철학적 원칙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 수 있다. 지식인들이 지식과 정보, 생각을 키워오면서 학문과 지식의 세계가 독자적으로 성립되었고, 지식인은 나름의 자의식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주체적인 자의식 형성의 기본적인 심리학적 동력은 아마도 ‘세계로부터의 이탈’일 것이다. 그것은 삶으로부터 도피한 이탈이 아니라 ‘자유’의 심리학적 근거로서,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주류 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사유의 세계로부터 힘을 받아 세계 자체를 문제 삼고, 다시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만드는 역동적인 이탈이다.”(박경미, 2006: 109)
“…… 참된 문화란 거센 비바람과 눈보라를 지나 괴로움과 시련을 뚫고 나온 민중들의 삶과 생생한 기록이고, 과거와 현재 지식인들이 외로운 ‘거리두기’ 끝에 얻은 절실한 깨달음의 표현이자 기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란 자기비판의 전통이고, 그 비판의 주요 내용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이라면 국가, 자본과 한 덩어리가 될 수 없고, ‘문화’는 국가주의와 상극이다. …… 문학과 예술과 종교, 이른바 문화라는 것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삶의 진면목을 얼마나 잘 표현해내고, 세계와 인간의 진실 된 모습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서 신음소리 하나 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소리 없이 사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자기 밖에 있는 것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자기가 속한 곳에 예부터 전해져 내려온 마음의 습관에 대한 속 깊은 존중, 이런 것들이 예술가나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닐까?”(박경미, 2006: 112)
“…… 문학과 인문학은 ‘돈과 권력 아니고 사는 세상’을 꿈꾸는 것 아닌가? ……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이 …… 정말로 사회를 향해 인문학적 가치를 훈계하려 했다면, 차라리 교육부, 아니 (‘교육’과 ‘인적자원’이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두 단어의 기괴한 조합으로서) ‘교육인적자원부’의 폐지를 주장했어야 옳다. 그러나 대신 그들은 인문학 위기 운운하며 국가에 매달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문학 위기 선언’은 ‘인문학을 팔아먹는 장사의 위기 선언’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그 점에서 그들이 한 인문학 위기 선언은 국가와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인 인문학이 더 이상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인문학 파탄선언’이다.”(박경미, 2006: 115)
“지식이란 인위적으로 통합을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식은 삶의 반영이며, 힘의 관계를 반영한다. 따라서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각기 자본이나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관계와 위상이 결정되는 것이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우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다고 해서 통합이 되거나 동등해지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에 대한 자연과학의 우위는 각각의 지식이 국가나 자본과 맺는 관계에서 파생된 결과이지, 자연과학의 우위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개별 지식이 국가나 자본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이다.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지식이 ‘누구를 위한’ 지식이며, ‘무엇을 위한’ 지식이냐는 것이다. 결국 지식 자체의 ‘가치’를 둘러싼 문제가 위기의 본질이며, 이 점에서 자연과학은 인문학보다 더 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연과학은 물리적으로 인류 자체를 멸절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틀어서 지식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고, 이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지식 자체의 위기가 더 본질적이다.”(박경미, 2006: 116)
“인문학의 고결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려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대접받기를 요구하려면, 적어도 민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지식 팔아 밥 먹고 살면서 최소한의 염치라도 지킬 수 있다. …… 동양의 한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말을 해주고 싶다.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 군자라야 굶는다. (君子困窮, 小人窮斯濫矣 《논어》 위령공, 1”
• ‘뿌리 뽑힌’ 지식인
“교수들은 자신의 자아를 구상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리고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근대성을 특징지어온 역사적 과정의 하나, 즉 ‘뿌리 뽑힘’을 역전시킬 것을 요구받고 있었다. …… 뿌리 뽑힌 지식인이야말로 우리 시대, 즉 근대의 저주 중의 하나 …… ”(리 호이나키, 2007: 137)
“…… 교수들은 교과의 실질적인 알맹이를 결정하는 존재였다. 물론 여기에는 과목-강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외에 많은 것, 즉 좋은 삶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좋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전통의 본질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이며 거짓이란 무엇인가 … 등등에 대한 견해가 들어있다. …… 교수들은 물론 자기가 속한 기관과 동료들의 영향을 받지만, 그들은 학생과 사회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관한 자기 나름의 직관에 따라 자신이 제공한 구체적인 과목의 내용을 결정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아무 책이나 선택할 수 있었고, 이 책들에 대하여 거의 모든 견해와 의견을 거침없이 피력할 수 있었다. …… 교수들의 권한은 실로 막강했다. 사회의 어떤 부문에 이런 종류의 자유와 자율성이 허용되고 있는 데가 있는가? 두려운 것은, 여기에서 자유가 권력에 봉사한다는 점이다.”(리 호이나키, 2007: 149)
“…… (생거먼 주립대학) 대학 설립의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있었다. 그 대신에, 학내 분쟁과 이데올로기적 입장 확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대학행정 당국과의 유치한 권력놀음에 앞장서는 사람들, 교수노조 설립이라는 품위 없는 노력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이 장소에 매우 색다른 성격을 부여하고 있었다. 지역민과 지역공동체 속에 육화되는 대신에 대학은 갈수록 자기 이익의 추구에 여념이 없는 고립된 영토를 구축하는 데 골몰한 채 공동체로부터 더욱더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데올로그와 놀음꾼들에 맞서 싸우는 교수와 행정가들도 있었다. 그들은 건전한 학구적 태도와, 학생들이나 이 나라의 국민이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공개적인 공적 토론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점점 갈수록 대학의 주류에 대하여 주변적인 위치로 밀려나는 듯했다. 내 느낌에, 학생들과 시민들은 속임수를 당하고 있었다.”(리 호이나키, 2007: 164)
“(시몬느 베이유는) 파시즘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 1932년에 독일로 갔고, 1934년에는 노동자의 세계를 몸소 알기 위해서 공장으로 일하러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갔고, 1941년에는 농장노동의 피로(疲勞)에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바치기 위해서 포도밭의 일꾼이 되었다. 그녀의 글들은 이 장소들 각각에서 그녀가 겪은 고뇌에 찬 체험을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리 호이나키, 2007: 163)
“(시몬느 베이유) …… 우리 시대의 진실로 사료(師表)가 될 지식인의 하나인 이 젊은 여성-그녀는 36세에 죽었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은 정신과 육체 모두를 써서 살아야 하되, 자신이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에 적합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리 호이나키, 2007: 166)
•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
스티브 풀러(Steve Fuller)는 학자가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학자는 “자신의 고귀한 혈통에 따라 신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과거 지향적 지배자를 닮아서 얼마나 선행 연구를 많이 참조하고 인용했는가에 따라 그 권위를 인정받는 존재”이며, 따라서 학자의 연구 성과물은 그 안에 담긴 핵심 주장보다는 그 책의 ‘이력서(履歷書)’인 각주, 즉 ‘생산한 것보다는 소비한 것’ 때문에 흥미를 끄는 반면,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지적 자원을 동원해서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풀러가 생각하는 지식인은 “어떤 학자가 내놓은 학문적 성과의 정교하고 때로는 쓸데없어 보일 정도로 세세한 논의를 그 핵심만 간추려 요약할 줄 알고 그리하여 다른 경쟁 학자나 인접 분야의 성과와 비교하여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몸소 지식을 생산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지식 주장을 더 폭넓은 맥락에서 감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스티브 풀러, 2007: 217-218). 한마디로, 풀러의 지식인관(觀)은 분석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학문 영역을 넘나드는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성찰적일 뿐만 아니라 ‘웹2.0시대’의 핵심 능력인 ‘집단 지성’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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