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맘내맘ㅣ가족코칭-이해밑거름

자신을 용서해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실다이 2009. 9. 23. 23:41

자신을 용서해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한겨레 고명섭 기자 이정아 기자
» 김형경(오른쪽)·박미라(왼쪽)씨의 ‘치유 대담’

 

김형경·박미라씨의 ‘치유 대담’

 

아픔이 깊어 멍이 든 사람들이 있다. 훤한 대낮인데 우울이 한밤처럼 내려앉은 사람들이 있다. 다 마음의 병, 관계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소설가 김형경(오른쪽)씨와 ‘치유 글쓰기’ 강사 박미라(왼쪽)씨는 이 아픈 사람들의 소리없는 외침을, 마음 기울여 들었다. 2005년 봄부터 만 1년 동안 두 사람은 〈한겨레〉 지면에 상담꼭지 ‘형경과 미라에게’를 연재했다. 삶의 돌부리에 치인 사람들이 속이야기를 전해오면, 성심을 다해 그들의 고민에 번갈아 답했다. 두 사람이 한자리에 마주 앉았다. 박미라씨가 연재 글을 기초자료로 삼아 ‘감정 치유 에세이’ 〈천만번 괜찮아〉를 펴낸 것이 이 만남의 계기다. 김형경씨는 먼저 지난해 겨울 같은 연재물을 갈무리해 ‘심리 치유 에세이’ 〈천 개의 공감〉을 낸 바 있다. 〈천만번 괜찮아〉와 〈천 개의 공감〉은 오랜 친구처럼 다정했다. 박미라씨는 나이가 위인 김형경씨를 ‘선배’라고 불렀고, 김형경씨는 ‘미라씨’라고 불렀다. 인생길의 선·후배이자 도반이고 멘토인 두 사람은 〈천만번 괜찮아〉를 이야기의 밑자락에 깔고 ‘치유 대담’을 했다. ‘선배’와 ‘미라씨’의 만남은 지난 25일 한겨레신문사 6층에서 이루어졌다.

 

사랑이란 같이 성장하는 것…실패 두려워 말아야

 

김형경=〈천만번 괜찮아〉를 읽고 새삼스럽게 느낀 건데, 내가 쓴 〈천 개의 공감〉과 겹치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나는 여성들의 내적인 자기 성장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데, 미라씨는 인간관계 안에서 생기는 문제에 더 집중한 것 같아요.

 

박미라=난 전혀 의식을 못 하고 썼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연재할 때도 주제가 부딪친 적이 한 번도 없었잖아요.

 

형경=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니까 아무래도 자기 치유나 자기 성숙 쪽이 더 친숙한 것 같고, 미라씨는 결혼한 사람이니까 가족이나 부부 같은 관계가 더 눈에 들어온 것 아닐까?

 

미라=그런데 좀더 생각해 보면 선배랑 나랑은 삶의 과정이나 관심에 차이도 있지 않나 싶어요. 선배는 소설가로서 경력을 시작했고, 나는 페미니즘(여성주의) 운동에서 출발했잖아요.(박미라씨는 페미니즘 잡지 〈이프〉의 편집장을 지냈다.)




형경=맞아요. 그래도 내가 보기엔 공통점이 더 많아요. 나는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어서 그쪽을 공부하다가 종교적 초월성이랄까 영성 쪽으로 다가간 셈이고, 미라씨는 페미니즘에서 시작해 종교적인 영역으로 들어갔고 ….

 

미라=페미니즘과 종교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요. 여성의 자기실현이나 권리 획득은 영적인 차원의 평화와 해방으로 이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할 때 더 확신이 서더라고요. 이를테면, 부모-자식 관계를 이야기할 때 특별한 기대나 환상이나 집착을 품지 말라고 조언하는데, 집착한다고 해서 삶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또 집착에서 벗어나야 관계가 오히려 더 좋아지기도 하거든요. 이건 연인관계도 마찬가지죠.

 

형경=집착 하니까 바로 사랑이 떠오르네요. 사랑이야말로 집착으로 떨어지기 쉬운 관계잖아요. 난 사랑이란 필요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요. 생존에 필요한 것을 주는 게 사랑이라고, 사랑의 본질이라고 봐요. 아이 때는 부모에게 매달리고, 어른이 되면 나를 지켜주고 채워주고 키워주는 사람을 찾고 ….

 

가족은 가장 치열하게 나를 보여주는 수행 장소

 

미라=난 사랑의 종착점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어요. 출발은 생존의 필요지만, 끝은 좀 달라요. 연인에게서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이 뭘까. 필요를 넘어서 영적인 차원의 사랑에까지 가 닿고 싶은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사랑을 연인이 곧바로 줄 수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연인을 통해 내 안에서 찾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나는 실패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깨지고 좌절하고 반성하면서 사랑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거죠.

 

형경=현실의 연인관계를 보면, 같이 성장하는 게 참 중요해요. 서로 성장을 도우면 파탄이 나지 않는데, 한쪽만 성장하면 삐걱이고 깨져요. 그래서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러려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존중하고 그러면서 서로 돕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죠.

» 김형경(왼쪽)·박미라(오른쪽)씨의 ‘치유 대담’
미라=선배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부부관계야말로 사랑관계를 잘 드러내준다고 생각해요. 부부는 서로서로 받아주는 관계예요. 낯간지러울 정도로 자기를 드러낼 수 있고, 그걸 이해해줄 수 있는 게 부부 사이죠.

 

형경=난 가족이란 가장 치열하게 자기를 보여주는 장이라고 생각해요.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자기 내면의 양가성, 분열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그걸 통합하는 장이 가족이에요.

 

미라=맞아요. 그런 통찰에 이르러야 가족관계, 부부관계가 성숙해져요. 결혼은 수행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는 것도 좋죠. 내 안에 괴물이 있는데, 그걸 관념으로만 느끼는 걸로는 부족해요. 자식이나 남편 앞에서 그 괴물이 튀어나오는 걸 겪으면서 그 괴물을 다스리는 거죠. 그런 수행의 관점에 서면 가족관계가 훨씬 더 풍부해질 수 있어요.

 

형경=그래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양가성 통합이나 미라씨가 말하는 ‘결혼 수행’이나 결국은 같은 말이죠.

 

주체적으로 사는 법 배우려는 용기 필요해요

 

미라=그렇다고 해서 모든 가족관계가 다 좋다는 건 아니에요. 최선을 다해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야죠. 그래도 안 되면 자책하지 말고 자기를 돌봐야 해요. 나쁜 여자라는 말을 듣는 것도 감수해야 해요.

 

형경=‘나쁜 여자’란 남성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에서 볼 때 ‘나쁜 여자’일 뿐이에요. 착한 여자는 죽어서 천국 가고 나쁜 여자는 살아서 어디든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미라=현실을 직시하는 게 중요해요. 관계 때문에 죽도록 고통받으면서도, 현실적으로 풀지 못하고 자기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잖아요. 내가 잘하면 잘 되겠지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말고,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법을 배우려는 용기가 필요해요.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말이죠.

 

형경=책 제목이 참 가슴에 와 닿아요. 천만번 괜찮아 ….

 

미라=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치유하는 글쓰기’ 강의를 하는데 ‘괜찮아’ 훈련을 해요. 매번 자기가 죄의식을 느꼈던 것을 써 보고 후렴구처럼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라도 괜찮아”라고 쓰거든요. 거기서 따온 겁니다.

 

형경=‘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말도 있어요.

미라=맞아요. 자기 용서의 깊이는 한도 끝도 없어요.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46가지 마음의 병에 건네는 위로
<천만번 괜찮아>박미라 지음/한겨레출판·1만1000원

 

박미라씨의 〈천만번 괜찮아〉는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수많은 상담 요청 글 가운데 46꼭지를 가려내 거기에 충실히 답하고 있다. 연인관계, 가족관계, 그리고 사회적 관계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의 호소와 그 아픔에 깊이 공감하는 답변이 네 갈래로 엮여 320쪽에 차곡차곡 쌓였다. 김형경씨의 〈천 개의 공감〉이 여성들의 심리만을 다루고 있다면, 〈천만번 괜찮아〉에는 남성들의 이야기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남성이라고 해서 속편하게 누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관계의 문제에 짓눌려 허덕이고 있음을, 그러므로 남성들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치유받아야 할 존재임을 지은이는 넌지시 말한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용서’ ‘자기 위로’다. 수많은 여성들이, 또 남성들이 이유 없는 자책감과 죄의식으로 마음이 황폐해지는 걸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내 잘못일지도 몰라. 내 탓일 거야.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 아, 나는 왜 잘하는 게 없을까. 나는 쓸모없는 존재인가 봐. 내가 자초한 불행이야. 나는 운이 없는 것 같아 ….” 우리 안에는 초라하고 위축된 마음이 숨어 있어 시도 때도 없이 고개를 내민다. 우리를 움츠러들게 한다. 거기에는 예외가 거의 없다. 지은이는 인류의 95%가 어떤 식으로든 열등감을 느끼고 산다는 통계를 끌어들여 말한다. “아무리 당차고 야무져 보여도, 아무리 큰소리치고 있어도 그런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큰소리치고 사납게 구는 태도야말로 자책감과 죄의식에 떨고 있는 내면의 또 다른 모습이며, 분노에 날뛰는 행동이 극도의 불안감의 표현이라면 여러분은 공감하실 수 있을까요?”

 

지은이는 자신의 지난 삶이 그랬다고 고백한다. “잔뜩 위축되고 초라해진 나 자신과의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래서 여러분의 주눅 든 마음에 더욱 공감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갖가지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은 사람들에게 쓴 위로의 글이자 지은이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자기 치유의 편지다. 지은이는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삶에서 얻은 깨달음의 확신으로 이야기한다. “정말 괜찮아. 천만번이라도 괜찮아.” 이 책은 마지막에 가서 한 번 더 말한다. 누구든 삶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속삭인다.

 

고명섭 기자

 

- 2007.6.29.자 한겨레신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