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전두환 구속영장
제11,12대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 1995년 12월 3일 머물고 있던 경남 합천에서 경찰에 구
속,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2,12 및 5,18사건을 수사한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본부장 이종찬 3차장검사)는 이 사건
의 핵심 피고소고발인인 전두환에 대해 서울지법으로부터 내란 및 군형법상 반란수괴 등 혐
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합천에서 집행했다.
검찰은 전두환이 지난 79년 12월 12일 노태우 당시 9사단장 등 군부장교 33명과 공모, 최
규하 전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불법연행한 뒤 5천여 명의 병
력을 동원해 육군본부, 중앙청 등을 장악, 군권을 탈취한 혐의를 들었다. 전두환은 또 이 과
정에서 당시 정병우 특전사령관 등을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정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 등 일부 장교와 사병을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전두환은 와함께 지난 79년
11월 중순경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과 함께 정권탈취를 사전모의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부장
관을 강제 연행한 뒤 최 전대통령에게 사후재가를 강요한 혐의다.
이에 앞서 전두환은 2일 오후 3시에 출두하라는 검찰의 요구를 받고 이를 거부, 김영삼
대통령을 비난한 뒤 합천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전두환은 이에 앞서 오전 9시 서울 연희동
자택 앞 노상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 "검찰의 소환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못박고, 그러나 사법부가 내릴 조치에는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전두환은 단식에 들어가 24일간의 단식 끝에 서울 경찰병원에 이송
되어 가료를 받았다. 검찰은 전씨가 재임 중 8천억 원 상당의 비자금을 모은 것으로 확인하
고 뇌물수수혐의 등을 추가하여 기소, 법정에 서게 되었다.
'전두환 구속영장'(피의자 경력 생략)
육군 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유
신헌법을 개정하여 민주화를 추진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국회에서 헌법제정특별
위원회를 구성, 새로운 헌법질서 창출이 모색되는 등 유신체제의 폐지가 기정사실화되고 군
내부에서도 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을 즈음, 합수부 본부장인 피의
자의 권력남용 등으로 인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이하 '정승화 총장'이
라 함)과 잦은 갈등을 빚는 한편, 군장성 진급심사에서 피의자를 중심으로 한 소위 '하나회'
소속군인들의 진급이 여의치 않게 될 뿐 아니라, 피의자의 여러 가지 월권 등이 문제되어
정승화 총장이 이를 이유로 인사조치할 기미가 보이자, 정승화 총장을 김재규 내란사건 관
련 혐의로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불법연행하여 제거함으로써 군의 실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육군소장으로 제 9사단장인 상피의자 노태우, 육군중장으로 국방부 군수차관보인 유학성,
육군중장으로 제1군단장인 황영시, 육군중장으로 수도군단장인 차규헌, 육군소장으로 제20사
단장인 박준병, 육군중장으로 제71방위사단장인 백운택, 육군준장으로 특전사령부(이하 '특
전사'라 함) 제1공수여단장인 박희도, 육군준장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장인 최세창, 육군준
장으로 특전사 제5공수여단장인 장기오 육군대령으로 수도경비사령부)(이하 '수경사'라 함)
제30경비단장인 장세동, 육군대령으로 수경사 제33경비단장인 김진영, 육군대령으로 보안사
령관 비서실장인 허화평, 육군중령으로 보안사 대공처 대공2과장 겸 합수부 수사 제1국장인
이학봉, 육군대령으로 보안사 인사처장 겸 합수부 조정통제국장인 허삼수, 육군대령으로 육
군본부(이하 '육본'이라 함)헌병감실 범죄수사단장 겸 합수부 수사 제2국장인 우경윤, 육군
대령으로 육본헌병감실 기획과장인 성환옥, 육군중령으로 수경사 제33헌병대장인 최석립, 육
군중령으로 육본헌병대장인 이종민, 육군준장으로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인 정동호, 육군
대령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담당관인 고명승, 육군대령으로 수경사 헌병단장인 조홍, 육군
중령으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인 신윤희, 육군대령으로 보안사 보안처장인 정도영, 육군소
장으로 제30사단장인 박희모, 육군대령으로 제30사단 제90연대장인 송응섭, 육군준장으로 제
1군단 제2기갑여단장인 이상규, 육군 대령으로 제9사단 참모장인 구창회, 육군대령으로 제9
사단 제29연대장인 이필섭, 육군중령으로 제9사단 작전참모인 안병호, 육군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2대대장인 서수열, 육군중령으로 특전사 제1공수여단 제5대대장인 박덕화, 육
군중령으로 특전사 제3공수여단 제15대대장인 박종규, 육군대령으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
정달 등과 공모하여 1979년 11월 중순경부터 피의자는 상피의자 노태우 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 문제 등을 논의한 끝에 같은 해 12,12를 거사일로 결정하고 먼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반발하여 병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는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
사령관 등을 거사 당일 오후 6시 30분 만찬초청 명목으로 유인하여 부대지휘를 사전 차단하고,
피의자를 비롯한 위 15명은 거사당일 같은 시각에 보안사와 인근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하여 정승화 총장 추종세력이 무력으로 대응할 경우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기로
모의하고, 이에 따라 피의자는 위 허화평 이학봉, 허삼수, 우경윤 등에게 지시, 정승화 총장
연행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연행에 필요한 인원의 차출과 차량 권총 M16소총 및 실탄을 준비하게
한 후,
같은 해 12월 12일 오후 6시 30분경 위 계{획에 따라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노태우 박
준병 백운택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장세동 김진영 등은 수경사 제30경비단장실에 집결, 보
안사에 있는 피의자 및 위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과 함께 지휘부를 구성하고, 위 조홍 등
은 피의자 등이 지시에 따라 같은 시각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 김진기 육군
헌병감 등을 연희동 요정으로 유인하여놓은 뒤,
같은 날 오후 7시경 위 허삼수 우경윤 성환옥 최석립 이종민 등은 무장한 보안사 수사관
7명과 수경사 제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을 동원하여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정승화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과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 등에게 권총을 난사
하여 이들을 제압한 다음, 같은 날 밤 7시 30분경 정승화 총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
제연행하고,
피의자의 위 이학봉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정승화 총장이
10,26 사건에 연루된 새로운 혐의사실이 발견되었으므로 연행 조사하여야 하겠다"면서 그
재가를 요구했으나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한 상황에서, 정승화 총장 강제연행 사실을
인지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이 정승화 총장을 원
상복귀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같은 날 밤 9시 30분경 위 정동호 고명승 등이 대통령 경호실 병력을 무단 동원하여 대통
령 관저인 총리공관을 장악한 상태에서 피의자 및 위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등이 집단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하여 재차 정승화 총장 연행조사를 재가해 줄 것을 다
시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병력을 동원하여 육군 정식 지휘계통을 제압하기로 결의하고,
같은 날 밤 11시경 피의자는 위 박희도에게는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 국방부장관을 보안사
로 연행해 올 것을, 위 최세창에게는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체포와 휘하병력의 경복궁 출동
을, 위 장기오에게는 휘하병력의 육본출동을 각 지시하고, 상 피의자 노태우는 위 구창회에
게 휘하병력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황영시는 위 박희도에게 휘하병력의 고려대학교
진주를 지시하고, 위 황영시 백운택은 위 이상규에게 전차부대의 중앙청 출동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등은 위 김정룡 신우식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작전의 지원을 지시하고, 위
정도영 허화평 허삼수 권정달 등은 피의자를 비롯한 지휘부에 각 지휘관의 전화도청 및 각
부대 보안부대장의 보고를 통한 각 부대의 이동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한편, 제26사단 제
30사단 수도기계화사단 등의 지휘관 참모 및 보안부대장에게 합수부측의 위와 같은 조치에
동조하여줄 것을 요청하고,
이에 따라 같은 날 밤 11시 30분경 위 최세창 박종규는 특전사령관실에 제3공수여단 병력
을 투입, 총격을 가하여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정병
주 특전사령관 에게 부상을 가한 후 그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하는 한편 같은 달 13
일 새벽 2시경 제3공수여단 병력을 경복궁에 진주시키고,
위 박희도 서수열 박덕화 등은 같은 날 밤 12시 30분경 제1공수여단병력을 출동시켜 육본
과 국방부를 점령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근무 초병
인 정선엽 병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사망하게 하고,
위 장기오는 같은 날 새벽 3시경 제5공수여단 병력을 효창운동장에 진주시키고, 위 구창
회 이필섭, 안병호 등은 같은 날 새벽 1시 30분경 제9사단 제29연대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새벽 3시 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박희도 송응섭은 같은 날 새벽 3시 30분경 제30
사단 제90연대병력을 고려대학교에 진주시키고, 위 이상규는 같은 날 새벽 1시 30분경 제2
기갑여단 제16전차대대 병력을 출동시켜 같은 날 새벽 3시 30분경 중앙청을 점령하고,
위 조홍 신윤희는 같은 날 새벽 3시 40분경 위 김진선의 지원을 받아 수경사령관실에 진
입, 하소곤 육본참모부장에게 총격을 가하여 부상을 입게 한 후 육본 수뇌부의 무장을 해제
시키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문홍구 합참 대간첩대책본부장 등을 보안
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함으로써,
피의자는
수괴로서, 상피의자 노태우 등과 작당하여 병기를 탈취, 휴대하고 반란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으로 계엄지역에서 지휘관이 권한을 남용하여 부득이한 사유 없이 부
대를 인솔하여 중요지점을 점령하는 등 부대를 진퇴함과 아울러 숙소를 이탈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초병인 위 정선엽을 살해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김오랑을 살해하고, 상관인 위 정병주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하소곤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위 노태우 등과 공동하여 위 이재천 김인선을 각 살해하려 하였으나 미수에 그친 자로서,
도주 및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는 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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