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좋은 교회를 다니고 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실제로 그런 좋은 점들을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하고 있는 개인의 입장에서 반성했다. 마을공동체라는 유쾌한 꿈처럼, 우리 교회가 이사를 시도하였던 공동체의 모습이 있었고, 교우들의 말씀나누기를 통해 다른 분들의 신앙을 나눈 것이 참 좋다. 앞에 설 때의 부담 또한 많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교인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편했다. 그 불편이 해소되는데 4~5년은 걸린 것 같다. 일주일에 한번 만나면서 마음을 나눌 수 있기까지 걸리는 시간이었을까. 마음이 편해지니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기에도 편해졌다. 2002년에는 여신도회 정기기도회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신앙을 누려야 하기에, 기존교회의 구역예배와 기도회의 모습을 다른 형태로 일상적인 교제를 나누고 싶다. 예배담당과 안내역할을 맡으신 분들은 꼭 자리를 지키고 빛내주시면 좋겠다. 초신자에 대한 배려로 안내를 만들었지만 실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공유가 되어 있지 않다. 훌륭한 교회에 다니고 있음으로 만족하는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선뜻 사회선교에 대한 고민을 하기 어렵다.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교회를 찾던 중 살림교회를 알게 되었다. 교인들 간의 끈끈한 가족과 같은 공동체 분위기,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길고 지루한 민주적인 처리 절차와 목사님의 소탈하면서도 지성적인 목회는 인상적이었다.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와 방향에 대해 목회자와 교인들 간에 서로 어긋남이 없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작은 살림 공동체의 공간과 분위기는 기존의 교회에서 식상하여 대안을 찾고, 새로이 기독교를 알고자 찾아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발붙이기가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대안 교회나 작은 공동체에 안주하기 보다는 사랑과 정의로운 사회를 갈구하는 살림교회의 정신과 가치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규모로 커지기를 바란다. 우리들만의 공동체가 아닌 지역사회의 공동체를 형성했으면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림교회에서 예수님의 사랑과 평안의 은혜를 받아서 왜곡되고 불의한 사회의 모순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어렵고 힘든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공동체적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논 하나 얻어서 벼농사 같이 짓기도 한다.

교회 규모가 늘었을 경우 천안살림 공동체가 시대적 각성을 지속할 수 있는 힘도 늘어날까, 아니면 줄어들까.

대안을 모색하는 것도 우리 교회의 역할이다. 소수정예가 아니라 다수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므로 규모를 키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 실험정신은 아직도 존재한다. 작은 공동체가 일정범위 넘어서도 사회주의가 가능할까.

공동체를 만들 때 요긴했던 힘은 어떤걸까?

사회주의 이념보다, 성도와 교통하는 경험, 삶을 공유하며 말씀을 삶으로 증거해야, 서로 변하지 않게 지켜주고 변질을 미룰 수 있다.

10년 동안 다녔지만, 공동체에 내 자신을 맞추느라 부대꼈다. 뭔가 찾으러 왔다가 실망하고 간 사람들이 많은 건 우리 내부적인 문제가 아닐까. 타인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교회도 내세울 게 있는 교회도 아닌 것 같다.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는 거, 아는 것이 중요하다. 허투루 아웅다웅 하는 모습이 있는데 ‘이름을 부르고 싶은 것’이지, ‘이름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방감과 나눔이 좋았던 오륙 년 전이 생각난다. 배우고 공부하는 교회, 생명살림의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를 성장시키는 교회. 생명살림을 전파하는 것이 성장이라고 본다. 지금은 천안을 떠나있지만, 난 언제나 천안살림교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속은 연약한데 완벽하게 포장된 듯 느낄 때가 있다. 연약한 속내를 질펀하게 보이며 살길 바란다.

양적 성장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보편적 시간에 따라 어느 정도 성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엘리트주의, 배타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말씀과 목양의 균형이 힘들다. 각자의 주체적인 참여가 아쉽다. 내실없는 자부심만 있는지 되돌아본다. 선희 씨가 늦복이 터져서 이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는 고백에 우리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다시 싹텄다. 등대같은 말씀을 살아내서 내실있는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사모님 말씀에 동의한다.

이야기 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듬성듬성 교인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다.

사진과 자료를 보니까 10년 전 창립예배 드리고 10년 만에 자리를 함께 해보니 대단한 노력을 해왔다고 본다. 어려웠겠다는 점과 고민이 느껴지지만, 밖에서 볼 때, 살림교회 공동체는 ‘의미’가 많이 담겨있다. 시간이 더 갈수록 의미가 훨씬 더 있을 거다.

의미를 알아야 믿어지는 건지, 믿어야 알아지는 건지, 헷갈린다. 대학생 때와 달리 돈벌이 시작하니까 걱정에 얽매이기 시작해서 다른 꿈들을 놓아버리고 있었다. 공동체, 가능할지 궁금하다.

우리가 천안살림교회 10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과거가 그랬다는 것보다는 미래에 그 꿈과 가치를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실천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함께 사는 것이 중요하다. 공동체는 연약한 이들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내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있을 때 또 그것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을 때 일단, 시작해 보는 것이 의미 있다. 필요에 의해 주체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의견수렴을 거친 후에는 그 주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누구에 의한 입김을 배제하고(숨기어진 주도그룹), ‘옛날에는 말이지~’라며 신구를 가르고 편을 가르는 말, ‘거봐라~’하며 참여하는 이들의 진실을 희화화하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서로의 것을 나누고 공동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염치와 존중이 필요하다.

살아가면서 힘을 발휘하는 데는 초심이 참 중요하고, 합심이 꼭 필요하며, 뒷심이 중요한데 그 뒷심은 초심이다. 천안살림교회 창립 초심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10년을 출발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