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법은 민주국가에서 부끄러운 법”
한겨레 입력 2004.11.04. 05:08[한겨레] 제임스 시노트 메리놀수도회 신부암울한 시절 그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겁쟁이였다.
그러나 독재자의 폭력을 보고선, 곤봉든 경찰이 두려웠지만 거리로 나섰다. 그는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은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독재정권을 떠받드는 유일한무기로 ‘색깔’을 조작하는 독재자의 실상을 보고 빨갱이로 내몰린 사람들과 그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 평생을 보냈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봉사하기로다짐한 사제였다. 그러나 교회의 이익을 위해 독재와 야합한 교회에 대해서도날카롭게 비판했다.
“사랑하는 신부님!” 지난달 11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30돌 기념식에서인혁당사건 사형수고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가 행사 축사에 앞서 가장 먼저부른 것은 제임스 시노트(75) 신부였다. 한국의 민주화의 선봉에 섰던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은 30돌에 그의 인혁당 현장 증언록 출판기념회를겸함으로써 그를 이 행사의 주인공으로 모셨다.
내게 ‘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분명히 말할 수 없다그러나 ‘악’이무엇이냐 물으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그 때 내가 본,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유지하기 위해죄 없는 사람들에게 행한 그 짓이 바로 ‘악’ 이었다고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방됐던 그는 2002년 한순간도잊지 못했던 ‘눈물의 땅’에 돌아왔다. 영구귀국이었다.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현재’에 머물러 있는 ‘빨갱이 망령’앞에서 노신부는 자신이 직접 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큰 덩치만큼이나 눈물도 많고, 유머도 많은 노 신부를 그가 여생을 보내고 있는서울 광진구 중곡동 메리놀수도회에서 만났다.
-귀국 뒤 생활이 어떤가? =행복하다. 두려움에 떨며 할 말도 못했던 박정희 독재시절과 달리 자유롭게 말할수 있지 않은가? 또 많은 한국 친구들과 언제나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인혁당 유가족들과는 만나는가? =추방당할 때 사형당한 8명의 부인들이 공항에 있었고, 14년만에 비자가 나와89년 공항에 들어올 때도 그들이 그대로 있었다. 우리에겐 14년의 간격은 없었다.
우린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난 한 순간도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당하던 날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 관련자들에게 부끄러운모습으로 사형을 선고하던 13명의 대법관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판결다음날 아침 미군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타고 있었는데, 뉴스에서‘인혁당’이란 단어가 들렸다. 그러나 난 기사에게 “그게 무슨 뉴스냐”고 묻지않았다. 불길한 소식을 전해줄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곧바로 현실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서대문형무소에 갔더니 그 날 새벽 이미 8명은 사형에처해졌다. 지난 1년 동안 남편의 면회 한 번 못한 부인들의 비통함을 어찌 잊을 수있겠는가?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인혁당 관련자들을 끌고간 뒤 1년 동안 면회 한 번 시켜주지 않고 사형시켜버린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송상진・여정남씨의 시신을 탈취해백제 화장터로 끌고가 화장해버렸다. 내게 ‘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분명히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자신있게 답할 수있다. 그 때 내가 본 것,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사람들에게 행한 그 짓이 바로 ‘악’이었다고.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가난에서 구제했다고 칭송하지않는가? =미국 대통령 린든존슨은 1968년 하와이에서 박정희를 만나 한국군을 베트남전에파병해준다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젊은이들을전쟁터로 보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독재체재를 보장받고, 경제 지원도 받았다.
한국의 경제 건설은 박정희 덕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죽은 젊은 넋들의 피의대가다. 더구나 경제 발전이 한국만의 특성이 아니지 않는가? 당시 경제건설을시작한 싱가포르와 타이베이는 한국보다 더 발전하지 않았는가? -지금 그의 딸 박근혜씨가 제1야당 대표이고, 차기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를 자주 거론하는데, 그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그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심성을 따르는게 나을 것이다.
-고 육영수 부인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 같다.
=그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실내에 어떻게 범인이 들어와 총을 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많았지만, 미국의케네디 암살 때와 달리 그의 죽음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박정희가 무서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는데, 장준하만이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주검으로 발견됐다.
자신의 밥을 위해 진실과 약자를 외면하고 독재자와타협이라는 편한 길을택했기에 난 그때 신문사들을밥통일보라고 불렀다. 지금과 그 ??가 같다는말인가?-얼마 전 박근혜 대표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김 추기경이 국가보안법폐지에 반대한다고 했다.
=난 추기경의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젊은 신부들도 추기경이 방문자를대접하려 한 말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국가보안법은 공산당을 잡기 위해 쓰인게 아니라 반대자를 공산당으로 조작해서 몰아 고문하고 죽이는데 쓰인 법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끄러운 법이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죄 없는사람들을 죽인 법이었다.
-사제지만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고,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을 비판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독재자와의 야합을 참을 수 없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공산당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키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박정희와미국은 ‘공산당’을 이용해 자신을 이익을 챙겼다. 미군이 한국에 온 것은공산당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기 위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미국의이익을 위한 것이다. 지금 미군이 이라크에 간 것도 마찬가지다. 독재자로부터이라크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은 석유가 필요하기때문이다.
-74~75년 동아자유언론실천투쟁에도 함께 했는데, 당시 독재와 타협해 기자들을쫓아낸 신문사들이 지금은 정부에게 언론탄압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의 밥을 위해 진실과 약자를 외면하고 독재자와의 타협이라는 편한 길을택했기에 난 그 신문사들을 밥통일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이 밥을 핑계 대며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핑계 대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박정희 독재 때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죽던 시대다. 무슨말이든 내놓고 하는 지금과 그 때가 같다는 말인가?인혁당 조작 폭로하자 강제출국 당해공산주의와 싸워 하느님께 봉사할 것을 서약했던 31살의 사제가 1960년 선교사로한국에 왔다.
인천교구 소속으로 영종도 무의도 등 섬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사목활동에만열중하던 그는 어느날 미국 대사관 직원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필요할 때 반체제인사들을 묶어 공산주의자로 조작한 사건을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뒤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그것이었다.
64년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등이 20일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밝힌 뒤 사표를 낸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검찰총장이던 신직수씨가 10년 뒤 중앙정보부장이 돼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반대자에 대한 본보기로 그 사건을 다시조작해 엮었다. 평소 알던 미 대사관 직원과 미중앙정보국(CIA) 정보원, 그리고사건 관련자 가족들을 통해 사건 조작을 간파한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피해자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인혁당 관련자 8명은 세계 사법사상 유례 없이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이 난지 19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그 뒤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정부는 체류 연장을 거부해 인혁당관련자들이 사형당한지 21일 만에 강제 출국 당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간 뒤에도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하기 위해 백악관이 있는워싱턴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온갖 집회와 모임에서 이를 증언했다. 80년들어 남미에서 사목하면서 역시 한국에서 했듯이 미국의 도움을 받던 독재자들에게고문받고 죽어가던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그가 인혁당 사건 당시 기록한자기 고백서를 함세웅 신부가 발견해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당한 날을 기려<1975년 4월 9일>(빛두레)이란 책으로 펴냈다. 또 그가 1960~75년 일한 영종도의한 가족이 3・1운동 때부터 당시까지 한반도에서 겪은 눈물겨운 가족사를 소설로쓴 <영종도 사람들>(성바오로)도 함 신부가 옮겨 함께 펴냈다.
● 인터뷰 뒤안길인혁당 유가족 소식묻자닭똥같은 눈물이‥얼마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30돌 행사에 주빈으로 초청됐던 시노트 신부를 언뜻봤을 때는 얼굴과 덩치가 큰 때문인지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로 말하다 미진한 듯하면 영어로 보충하는 그의 말엔 따스함과 함께유머가 넘쳤다. 그의 책에도 그런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책은 영종도 공소의신부로 활동할 당시 만난 절름발이에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전군’이라는 아이의얘기로부터 시작한다. 수도원 정원을 산책하는 그에게 “양복이 잘 어울린다”고했더니, 그는 “양복점을 하는 그 전군이 해줬다”고 자랑했다.
그의 방은 세 평 가량의 서재와 두 평 가량의 침실로, 덩치에 비해 몹시 작아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에서의 삶에 지극히 만족해 했다. 그는 “이 수도원엔원장을 비롯해 네 명이 메리놀신학교 동창생이어서 우리 친구들 판”이라고‘뽐’내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눈에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는 “너무가슴이 아파 ‘한’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족들이 나를 만나면 늘 <노란 샤쓰 입은사나이>를 부르라고 졸라댄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노란…>은 그가 부를 줄 아는유일한 한국 유행가다.
그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에 대해선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책에서 ‘덕이 있는사람’으로 묘사한 김 추기경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주방으로 가 손수 커피를 타주던 그에게 미리 사갔던 책에 사인을 부탁하자, 그는“자유를 위해, 평화로운 한국을 위해. 진필세”라고 썼다. 진필세는 ‘세상에필요한 사람’이란 뜻으로 지은 그의 한국 이름이다.
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그러나 독재자의 폭력을 보고선, 곤봉든 경찰이 두려웠지만 거리로 나섰다. 그는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은 반공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독재정권을 떠받드는 유일한무기로 ‘색깔’을 조작하는 독재자의 실상을 보고 빨갱이로 내몰린 사람들과 그가족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데 평생을 보냈다. 그는 오직 하느님께만 봉사하기로다짐한 사제였다. 그러나 교회의 이익을 위해 독재와 야합한 교회에 대해서도날카롭게 비판했다.
내게 ‘선’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분명히 말할 수 없다그러나 ‘악’이무엇이냐 물으면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그 때 내가 본, 박정희 정권이 권력을유지하기 위해죄 없는 사람들에게 행한 그 짓이 바로 ‘악’ 이었다고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추방됐던 그는 2002년 한순간도잊지 못했던 ‘눈물의 땅’에 돌아왔다. 영구귀국이었다.
많은 것이 변한 것 같지만, 여전히 ‘현재’에 머물러 있는 ‘빨갱이 망령’앞에서 노신부는 자신이 직접 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큰 덩치만큼이나 눈물도 많고, 유머도 많은 노 신부를 그가 여생을 보내고 있는서울 광진구 중곡동 메리놀수도회에서 만났다.
-귀국 뒤 생활이 어떤가? =행복하다. 두려움에 떨며 할 말도 못했던 박정희 독재시절과 달리 자유롭게 말할수 있지 않은가? 또 많은 한국 친구들과 언제나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인혁당 유가족들과는 만나는가? =추방당할 때 사형당한 8명의 부인들이 공항에 있었고, 14년만에 비자가 나와89년 공항에 들어올 때도 그들이 그대로 있었다. 우리에겐 14년의 간격은 없었다.
우린 항상 함께 있었던 것이다. 난 한 순간도 그들을 잊을 수 없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이 사형당하던 날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 관련자들에게 부끄러운모습으로 사형을 선고하던 13명의 대법관의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판결다음날 아침 미군도서관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타고 있었는데, 뉴스에서‘인혁당’이란 단어가 들렸다. 그러나 난 기사에게 “그게 무슨 뉴스냐”고 묻지않았다. 불길한 소식을 전해줄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곧바로 현실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서대문형무소에 갔더니 그 날 새벽 이미 8명은 사형에처해졌다. 지난 1년 동안 남편의 면회 한 번 못한 부인들의 비통함을 어찌 잊을 수있겠는가? -그 때 무슨 생각이 들었나? =인혁당 관련자들을 끌고간 뒤 1년 동안 면회 한 번 시켜주지 않고 사형시켜버린박정희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송상진・여정남씨의 시신을 탈취해백제 화장터로 끌고가 화장해버렸다. 내게 ‘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분명히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내게 ‘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자신있게 답할 수있다. 그 때 내가 본 것,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죄 없는사람들에게 행한 그 짓이 바로 ‘악’이었다고.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를 가난에서 구제했다고 칭송하지않는가? =미국 대통령 린든존슨은 1968년 하와이에서 박정희를 만나 한국군을 베트남전에파병해준다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젊은이들을전쟁터로 보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독재체재를 보장받고, 경제 지원도 받았다.
한국의 경제 건설은 박정희 덕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죽은 젊은 넋들의 피의대가다. 더구나 경제 발전이 한국만의 특성이 아니지 않는가? 당시 경제건설을시작한 싱가포르와 타이베이는 한국보다 더 발전하지 않았는가? -지금 그의 딸 박근혜씨가 제1야당 대표이고, 차기 주자로 거론되고 있다.
=그가 아버지를 자주 거론하는데, 그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필요하지 않다.
그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심성을 따르는게 나을 것이다.
-고 육영수 부인에 대한 기억은 좋은 것 같다.
=그는 따뜻함이 있었다. 그의 죽음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실내에 어떻게 범인이 들어와 총을 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많았지만, 미국의케네디 암살 때와 달리 그의 죽음에 대한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박정희가 무서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는데, 장준하만이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주검으로 발견됐다.
자신의 밥을 위해 진실과 약자를 외면하고 독재자와타협이라는 편한 길을택했기에 난 그때 신문사들을밥통일보라고 불렀다. 지금과 그 ??가 같다는말인가?-얼마 전 박근혜 대표가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을 때 김 추기경이 국가보안법폐지에 반대한다고 했다.
=난 추기경의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젊은 신부들도 추기경이 방문자를대접하려 한 말에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다. 국가보안법은 공산당을 잡기 위해 쓰인게 아니라 반대자를 공산당으로 조작해서 몰아 고문하고 죽이는데 쓰인 법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부끄러운 법이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죄 없는사람들을 죽인 법이었다.
-사제지만 로마 가톨릭을 비판하고,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을 비판했는데? =자신의 이익을 위한 독재자와의 야합을 참을 수 없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공산당에 대해 거부 반응을 일으키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박정희와미국은 ‘공산당’을 이용해 자신을 이익을 챙겼다. 미군이 한국에 온 것은공산당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기 위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미국의이익을 위한 것이다. 지금 미군이 이라크에 간 것도 마찬가지다. 독재자로부터이라크 민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은 석유가 필요하기때문이다.
-74~75년 동아자유언론실천투쟁에도 함께 했는데, 당시 독재와 타협해 기자들을쫓아낸 신문사들이 지금은 정부에게 언론탄압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자신의 밥을 위해 진실과 약자를 외면하고 독재자와의 타협이라는 편한 길을택했기에 난 그 신문사들을 밥통일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이 밥을 핑계 대며고통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핑계 대지 않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박정희 독재 때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도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죽던 시대다. 무슨말이든 내놓고 하는 지금과 그 때가 같다는 말인가?인혁당 조작 폭로하자 강제출국 당해공산주의와 싸워 하느님께 봉사할 것을 서약했던 31살의 사제가 1960년 선교사로한국에 왔다.
인천교구 소속으로 영종도 무의도 등 섬지역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사목활동에만열중하던 그는 어느날 미국 대사관 직원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필요할 때 반체제인사들을 묶어 공산주의자로 조작한 사건을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뒤 그것은 사실로 나타났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그것이었다.
64년 중앙정보부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등이 20일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기소할 가치가 없다’고 밝힌 뒤 사표를 낸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검찰총장이던 신직수씨가 10년 뒤 중앙정보부장이 돼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반대자에 대한 본보기로 그 사건을 다시조작해 엮었다. 평소 알던 미 대사관 직원과 미중앙정보국(CIA) 정보원, 그리고사건 관련자 가족들을 통해 사건 조작을 간파한 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피해자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인혁당 관련자 8명은 세계 사법사상 유례 없이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이 난지 19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그는 그 뒤 박정희 정권의 비리를 폭로했고, 정부는 체류 연장을 거부해 인혁당관련자들이 사형당한지 21일 만에 강제 출국 당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간 뒤에도 인혁당 사건의 조작을 폭로하기 위해 백악관이 있는워싱턴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벌였고, 온갖 집회와 모임에서 이를 증언했다. 80년들어 남미에서 사목하면서 역시 한국에서 했듯이 미국의 도움을 받던 독재자들에게고문받고 죽어가던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싸웠다. 그가 인혁당 사건 당시 기록한자기 고백서를 함세웅 신부가 발견해 인혁당 관련자들이 사형당한 날을 기려<1975년 4월 9일>(빛두레)이란 책으로 펴냈다. 또 그가 1960~75년 일한 영종도의한 가족이 3・1운동 때부터 당시까지 한반도에서 겪은 눈물겨운 가족사를 소설로쓴 <영종도 사람들>(성바오로)도 함 신부가 옮겨 함께 펴냈다.
● 인터뷰 뒤안길인혁당 유가족 소식묻자닭똥같은 눈물이‥얼마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30돌 행사에 주빈으로 초청됐던 시노트 신부를 언뜻봤을 때는 얼굴과 덩치가 큰 때문인지 접근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어로 말하다 미진한 듯하면 영어로 보충하는 그의 말엔 따스함과 함께유머가 넘쳤다. 그의 책에도 그런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책은 영종도 공소의신부로 활동할 당시 만난 절름발이에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전군’이라는 아이의얘기로부터 시작한다. 수도원 정원을 산책하는 그에게 “양복이 잘 어울린다”고했더니, 그는 “양복점을 하는 그 전군이 해줬다”고 자랑했다.
그의 방은 세 평 가량의 서재와 두 평 가량의 침실로, 덩치에 비해 몹시 작아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국에서의 삶에 지극히 만족해 했다. 그는 “이 수도원엔원장을 비롯해 네 명이 메리놀신학교 동창생이어서 우리 친구들 판”이라고‘뽐’내기도 했다.
인혁당 사건 유가족들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한참이나 말을 잊지 못했다. 그의눈에 물기가 어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굵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는 “너무가슴이 아파 ‘한’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족들이 나를 만나면 늘 <노란 샤쓰 입은사나이>를 부르라고 졸라댄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노란…>은 그가 부를 줄 아는유일한 한국 유행가다.
그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에 대해선 예리하게 비판하면서도, 책에서 ‘덕이 있는사람’으로 묘사한 김 추기경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주방으로 가 손수 커피를 타주던 그에게 미리 사갔던 책에 사인을 부탁하자, 그는“자유를 위해, 평화로운 한국을 위해. 진필세”라고 썼다. 진필세는 ‘세상에필요한 사람’이란 뜻으로 지은 그의 한국 이름이다.
글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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