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살림교회 2007

90816 - 천안살림교회에 오신 타케우치 목사님

실다이 2009. 8. 21. 10:53

 대전노회와 교토교구 목회자교환프로그램으로 방문하여,
이번 주일(8.16) 우리 교회에서 설교하시는 타케우치 목사님의 자기소개입니다.

[자기소개]

竹內 宙 / 타케우치 히로시 / TAKEUCHI, Hiroshi(일본기독교단 카타타교회 목사)

【고향 톳토리에서】
1946년 12월 한반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톳토리(鳥取)현에 태어나 대학 4학년의 만 스물한 살까지 거기서 지냈습니다. 어머니를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고등학교 졸업 시에는 가죽 표지 성경을 포상으로 받았습니다. 대학에서는 학생 YMCA 활동, 교회에서는 청년회ㆍ교회학교를 비롯해 ‘교회에서 사는'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때, 시대는 '월남반전투쟁', '전공투운동'(全共鬪運動), '70년 안보ㆍ오키나와투쟁'이라고 하는 폭풍과 같은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학생 YMCA 시설(옛 고아원)의 어린이들을 방문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러한 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지 않았으면 한다”는 소리를 들어 교회 사역의 ‘겉과 속'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킹 목사는 월남 반전을 주장함으로 암살되었고, 빌리 그래햄은'하나님 쪽과 악마 쪽의 싸움'이라고 월남전쟁에 대해 외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교회는'월남 전쟁'에 무관심했습니다. 그와 같은 기독교에 반감을 느껴 반전운동ㆍ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그 당시 화해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제 자신 속에서도 이 양자를 병립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나갈 것인가를 찾고자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신학부에 편입했습니다. 1969년 4월은 학생운동이 가장 고양되는 해이기도 하였습니다.

【신학부 중퇴, 신좌익운동에】
3학년에 편입했지만, 곧바로 전교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 신학부 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서 일본기독교단의 '만박총회'(万搏總會, 69년 11월)에 몰려가기도 했습니다.
편입 직후, 임석균(任錫均), 박정공(朴正功) 구원투쟁에 관계된 것이 계기가 되어 오오무라 수용소(大村收容所, 현재 없음)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재일 코리안의 역사적 존재 이유(강제징용의 기록), 일본의 ‘출입국관리 체제'의 실태(동화, 분단, 추방)에 대해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70년대에는 교내에 임의 동아리 '아시아문제 연구회'를 친구들과 조직하고 '관서입관투'(關西入管鬪) 결성에도 참여하여, '쿄토입관투'(京都入管鬪) 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1971년 '오키나와 반환 협정'을 반대하는 토쿄 시위에서 체포ㆍ구류되었는데, 석방 후 돌아왔더니 시험은 이미 끝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중퇴하였습니다. 그 후, 신좌익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대 중반까지 전념했었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배운 것은 신학이 아니라 한일관계사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역사관과 정치 사회관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시 기독교 세계로, 목사가 되어】
1994년 말 신장암이 발견되어 1995년 전반에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한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 항암제 치료가 잇따랐습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함께 "살아날 수 있다면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병상에 있는 텔레비전 '한신ㆍ아와지 대지진'(95년 1월 17일~), 옴진리교의 '사린 사건', '사티안에서의 마쯔모토 체포’등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제가 퇴원할 즈음, 이번에는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습니다. 그로인해, 아내는 가슴 한쪽을 절제하였지만, 이미 암세포는 임파선으로 퍼져 있었습니다. 아내의 남은 인생 5년이라고 각오했고, 그동안 생계를 지탱해 주었던 아내 대신에 제가 아이들을 길러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기 때문에 목사의 길에 뜻을 두었습니다. 교회적을 되살리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이수한 학점이 거의 없었기에 C 코스로 응시했습니다. 3년에 걸치는 시험이었지만, 보교사(補敎師: 우리의 ‘전도사’에 해당) 합격과 준윤(准允: 보교사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부임지에 나설 때 교구총회에서 거치는 절차)은 아내에게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3개월 후인 2002년 2월,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3학년의 딸들을 남기고 아내는 하늘로 부름 받았습니다. 2002년 7월부터 저는 카타타교회를 섬기기 시작했고, 2005년 4월부터는 주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탕자'와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하나님은 제 형편을 자주 보러 오시는 것 같습니다. 2005년 4월 1일, 담임목사로서 혼자 살게 된 사택에 짐을 옮겨 설교 준비, 주보 작성 등의 일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얘기 들어 주실 수 있나요?”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근처에 사는 ‘우울증’ 청년이 교회 앞에서 건 전화였습니다. 부임 후 처음으로 손님은 맞이하여 3시간 정도 말씀을 듣고 나서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한밤중 개인 주택에 안면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일은 없습니다. ‘교회’가 어떠한 곳인가라는 것을 부임하자마자 배울 수 있었습니다. 4월 말의 주일 전날, 다음날 ‘취임식’을 위해 교인이 회당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을 때, 노숙생활 하는 부부가 “오늘 밤 재워 주실 수 있나요?”하면서 왔습니다. 전혀 생각치도 못한 순간에 하나님은 이렇게 찾아오십니다. “너는 어떻게 할 것인가?”하면서…
그때까지 주일예배 때밖에 문을 열지 않았던 교회는 ‘열린 교회’라는 구호를 내걸어 평일도 가능한 한 문을 열어 어떤 사람이라도 맞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으로 인한 '화학 변화'를 통해 교인들도 변해 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화여대와 같이 보리스 건축인 카타타교회는 10년 전에 나라의 등록문화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훌륭한 건물 안에서 벌어지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상호관계, 즉 의지하고 의지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삶, 지역의 한 '부분'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쿄토교구에서는 선교부 위원과 '교회와 사회'특설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와 사회' 특설 위원회는 ① 재일ㆍ일한, ② 천황제ㆍ야스쿠니 문제, ③ 반(反) 원자력 발전ㆍ환경, ④야간 순찰(노숙자 지원), ⑤ 헌법문제라는 다섯 소(小) 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상치위원회(常置委員會) 하에 있는 성폭력문제 소위원회와 전후보상문제 소위원회에 위원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가지구(滋賀地區)에서는 사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70년대 중반, 일본잡지의 한 기자가 한국의 민주화 투쟁을 취재하던 중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살리고자 취재 대상자를 모두 자백했습니다. 그 결과, 취재받은 사람들은 체포되어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섣불리 외국에 가면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해서 해외를 향한 꿈은 접었습니다. 그 후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채 지내 왔지만, 이와 같은 형태로 처음으로 국외를, 그것도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나라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번역 한수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