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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타자

실다이 2007. 4. 6. 23:36

글쓰기와 타자

상식의풍경/대화와비판 2005/07/16 10:37

◇ 잘 쓴 글
잘 씌어진 글은 정보성, 논리성, 창의성을 갖춘 글이라고 한다. 물론 아무런 정보도 담지 않아도 되는 글, 또는 논리를 갖출 필요가 없는 글, 독창성이 없어도 되는 글 등이 있을 수 있다. 창의성을 미덕으로 삼는 시와 소설은 논리와 정보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와 소설도 여전히 모종의 메시지(정보)를 지니고 있으며, 사고의 일관된 흐름(논리)을 표현하고 있다. 한 단편소설 속에는 삶의 비밀스러운 심연이 해독되어 있고, 몇 마디의 시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정보가 담겨 있다. 해독된 삶의 비밀과 메시지가 많을수록 위대한 작품일 것이다. 한편 독창성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제품설명서조차도 사실은 문학작품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독창성을 요구한다. 그래서 정보성, 논리성, 창의성을 골고루 갖춘 글이 잘 쓴 글이라는 주장에 대체로 동의할 수 있다.

◇ 정보성: 타자 읽기
만일 글쓴이가 자기 글이 다루고자 하는 사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면, 그 글은 독자에게 신뢰를 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글 쓰는 사람은 관련 대상에 대해 풍부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정보성은 탐구, 반성, 읽기 등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 외부 세계를 기술하고 현상들을 설명하는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 전에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탐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내 생각을 표현하거나 나 자신을 알리는 글을 쓰고자 한다면, 그 전에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반성과 탐구를 수행하는 가장 탁월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글읽기이다.

너를 기다림. 글은 타자에게 읽히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다. 그에게 제대로 읽힐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이천삼년칠월이십삼일 전남 완도 명사십리에서.

타자는 언제나 나에게 선생으로 다가와 있다. 내가 정보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거절할 수 있기 전에, 마치 어린 아이처럼, 나는 무작정 타자의 목소리를 수용해야 한다. 타자의 목소리를 한 번도 수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세계가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타자가 세계를 어떻게 보는지를 읽으라. 내가 실제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타자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읽으라. 타자는 정보와 앎, 이해와 통찰의 창고이다.

◇ 논리성: 타자 배려하기
글은 원리상 독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독백조차도 사실은 내면의 독자나 가상의 독자, 또는 다른 장소의 독자나 다른 시간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서 글은 타자 의존적이다. 글이 언어인 한, 그것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의미는 타자에게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해받으려는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글은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충동의 산물이며, 타자에게 제대로 읽히고 이해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점에서 잘 쓴 글은 타자에게 잘 다가서는, 그에게 올바르게 이해되는 글이다. 그런 글쓰기는 단순히 쉬운 글을 쓴다고 해서 충족되는 것이 아니다.

타자에게 잘 다가서는 글은 정보들이 조리 있게 엮어진 글이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문단과 문단이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글이다. 왜 논리적인 글이 타자에게 잘 다가서는 글인가? 그것은 독자(타자)가 단지 내 생각을 무조건 수용하거나 내 의견에 무조건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타자는 오히려 내가 영원히 압도할 수도 장악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타자는 단순히 내 말을 듣고 내 글을 읽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타인의 말에 대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듯이, 그도 내 말에 대해 언제든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무작정 내 말만 들으라는 식으로 쓰는 글은 한갓 낙서이거나 중얼거림이지 진정한 글이 아니다. 글쓰기는 타자와 함께 생각하고, 타자의 의견을 구하는 활동이며, 이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일종의 대화이다. 모든 참된 대화(dialogue)는 언제나 서로(dia)의 논리(logic)를 교류하듯이, 글쓰기를 통해 나의 논리와 타자의 논리가 교류되고 교차되어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곧 타자를 방문하거나 그를 초대하는 것이다. 논리란 바로 그 방문과 초대의 에티켓이다. 그 에티켓으로 타자에게 다가서야 한다.

◇ 창의성: 타자 되기
글쓰기는 말하기와 달리 그 활동의 산물(글)이 시간과 공간상에 지속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글과 동일한 정보, 동일한 논리를 담고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낭비인 것처럼 보인다. 가치 있는 글은 기존의 글들이 표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잘 쓴 글은 글쓴이 자신의 고유한 창의성이 돋보이는 글이다. 창의성은 다른 정보를 다루거나, 같은 정보를 다른 방식(논리)으로 엮거나, 같은 정보와 같은 논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붉은 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타자들에게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또 하나의 타자가 됨으로써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천삼년팔월사일 지리산 천왕봉 올라가는 길에서.

달라진 세계를, 다른 시각으로 파악된 세계를, 여태 파악되지 않았던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가? 내가 타자와 다른 위치에서,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라. 타자와 다른 나를 표현하고 싶은가? 타자와 다른 나는 내가 타자에 대해 또 하나의 타자가 될 때 발견된다. 그때 그곳의 나와 다른 나를 표현하고 싶은가? 나 스스로가 나 자신에게 타자가 되라. 새로움과 다름은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 타자들에게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또 하나의 타자가 됨으로써 얻어진다.

그러나 타자가 된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나 자신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고정된 물체가 아니며, 개성 없이 복제된 클론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조적 글쓰기는 스스로 타자가 됨으로써 나 자신이 되어가는 운동이다. 이 과정 속에서 나를 휘감고 있는 세계는, 내가 지금 여기서 겪고 있는 세계는 풍만하고 자비로운 자궁으로 나에게 다가 온다. 세계는 그냥 공짜로 나를 아늑하게 감싸는 자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애써 발견되는 것이며 애써 창작되는 것이다.
이 글은 국정브리핑에 게재된 글을 수정한 글이다. ⓒ 옥시스 04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