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사랑

[이오덕] 어른의 꿈과 어린이 꿈

실다이 2006. 10. 8. 01:29

이오덕(≪참교육으로 가는 길≫, 한길사, 1990년 제1판)

 

1) 어른 마음, 어린이 마음


내가 아주 어렸을 때니까 벌써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이다. 그 때 나는 학교의 선생님들이 왜 저런 양복을 입고 다닐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넥타이는 뭣 때문에 매고 다닐까? 방에서고 바깥에서고,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할 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으로만 보였다. 또 옷이란 것은 추위를 막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것일 텐데, 어째서 겨울에도 단추를 끼우지 않고 다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어른이 되고 선생이 되고 보니 나 역시 다른 도리 없이 그런 옷차림을 하게 되었다. 넥타이가 처음에는 답답하고 불편했지만, 자꾸 매니까 차츰 예사로 여겨졌다. 또 이 나라의 기괴한 교육계에서는 넥타이를 안 매고는 선생 노릇을 못 해먹게 되어 있으니 어찌하랴? 교육자의 위신을 무엇보다도 ‘단정한 복장’으로 세워 보이려고 하는 것이 행정 관리들의 중요한 할 일의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넥타이란 물건이 항상 사람을 괴롭히는 장식물 노릇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겨울철에 이놈으로 목을 딱 졸라매 놓으면 찬 바람이 목으로 침입을 못 하여 몸이 후끈후끈하다. 겨울철만은 넥타이가 꽤 실용적인 방한 목댕기 노릇을 해낸다.

 

하지만 봄이나 가을, 여름에는 이것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서양 코쟁이들의 ‘복장의 역사’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넥타이를 처음으로 매기 시작한 족속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추운 지방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남방셔츠만 입어도 등에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8월인데 넥타이를 매고 양복으로 정장을 하고는 강의실에 나온 어느 교수님을 보았다. 그 교수님의 신념에 따르면 교육자는 항상 옷차림을 단정히 해야 되었다. 참으로 비참하게 길들여진 ‘모범 교수님’이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미국에 가 있는 공병우 박사 얘기가 생각난다. 공박사 곁에서 오랫동안 일을 한 ㅅ 씨가 들려준 얘기인데, 그 분은 평생 한 번도 넥타이를 매어본 일이 없고,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 불편한 것을 날마다 매고 풀고 하느라고 아까운 시간까지 허비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말하더라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느새 서양 문명에 정복되고, 병든 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되었구나 싶다.

 

그대로 넥타이야 어떤 철에는 제법 실용품이 된다고 우길 수도 있지만, 내가 아무리 좋게 보려야 볼 수가 없는 것이 여자들의 뾰족구두다. 키를 높게 보이려고 그런 신을 신는 모양인데, 키가 높아야 미인이라는, 그런 사람 값 매기는 눈은 서양 사람 것 아니고 누구 것인가? 이래서 여자들은 서로 서양 사람 되려고 얼굴은 희게 화장하고, 머리털을 지지고 노랗게 물들이고 한다. 아기들에게 주는 인형은 서양 인형뿐이다. 이게 무슨 꼴인가? 어떤 근사한 학문의 이론을 말해도, 민주주의고 남녀평등이고를 외쳐도, 그 위태위태한 구두를 신었다 하면 나는 믿지 않는다.

 

또 귀고리가 있다. 이게 웬일인지 최근에 와서 부쩍 유행이다. 어떤 귀에는 제법 송아지 코뚜레의 반쯤은 될 듯한 쇠붙이가 덜렁거리고, 얼굴이 쭈글쭈글한 노인네의 귀에도 달려 있으니 참 꼴불견이다. 이놈의 풍습도 필시 서양 것을 배운 것일 텐데, 우리 겨레가 왜 이 모양으로 되었는지 너무너무 한심하다.

 

어느 사립 국민학교 선생님한테서 들었는데, 요즘은 어린 국민학생들이 귀를 뚫어 온갖 고리를 달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이러니까 치사스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점수 쟁탈의 비참한 싸움을 교육이라고 강요하여 자살 소동이 연달아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마음은 본래 티 없이 맑다. 어느 국민학생이 이런 글을 썼다.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서는 여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나온다.

내가 볼 때는 미친 사람같이 보인다. 만일에 시내에서 그렇게 다니면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나? 아마 모두들 “미친 년”이라 할 것이다. 돈 들여서 그런 거 하는 사람들이 한심하다.

미스 코리아를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미친 사람 선발대회라고 할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아이들이 뭘 안다고 이런 건방진 말을 글로 쓰는가? 어째서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비판하는 이런 글을 쓰게 하는가, 하고 이런 글을 쓴 아이와 지도한 교사를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 옛날의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소리친 아기의 말을 듣고 부끄러워 도망을 갔는데, 요새 어른들은 그 어리석은 임금님보다 얼마나 더 어리석고 못난 인간으로 되어 버렸는가?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불온한 사상을 가진 놈들로 잡아 가둘 판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나라고 아이들이야말로 깨끗하고 바르다. 나 같은 사람은 공병우 박사한테야 맨발로도 따라갈 수 없지만, 그래도 아이들과 같이 살아오고, 아이들의 글을 어른들 글보다 더 많이 읽은 탓으로 이 정도라도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1988. 3)

 


2) 잘 살아 보자


사람들은 모두 ‘잘 살아 보자’는 꿈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잘산다’는 것은 ‘편리하고 편안한 삶’을 말한다. 물론 그것도 자기중심으로 말이다. 될 수 있는 대로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은 적게 하고, 가만히 앉아서 온갖 보고 싶은 것을 다 보고, 듣고 싶은 것 다 듣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 먹고 싶은 것 다 먹는 것이 꿈이다. 편안하게 앉아서 온 세상 구경도 다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얼마나 그릇되고 허망한 꿈이랴.

 

이 맹랑한 꿈의 허상 때문에 지금 인간들은 시시각각 역사의 끝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모든 자원을 파헤쳐 없애고, 살아 있는 모든 짐승과 벌레를 죽이고, 가두어 고통을 주면서 그것을 즐기고, 풀과 나무를 베어 없애고, 하늘과 땅을 남김없이 더럽힌다. 그러면서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고 뉘우칠 줄 모른다..오직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풍족하게 살아야지, 다른 나라를 이겨야지 하는 것이 목표다.

 

“잘살아 보자!” 이 길을 가로막는 자는 적이 된다. 적을 무찌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기다. 무기를 만드는 것이 또 경쟁이 되고, 될 수 있는 대로 한꺼번에 많은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 새로운 무기를 서로 다투어 만든다. 무기를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버는 나라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또 자기의 자식들을 사정없이 채찍질해서 자기와 똑같은 추악한 동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우리 어머니는

시험 점수 못 맞아 오면

너 공장으로 보낸다 한다.

그럴 때는

내 마음이 덜컹 한다.


우리 아빠는

시험 점수 못 맞아 오면

너 내 딸 안 하고 내쫓는다 한다.

(국교 5년생이 쓴 시 <시험점수>의 첫머리)


나는 집에만 오면 바쁘다. 1시간 공부, 산수공부, 일기, 관찰일기, 문제집 등, 할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제일 일찍 잘 때가 10시 반이나 11시이다. 또 덜해서 아침에 겨우 일어나 하기도 한다. 정말 피곤하다. (국교 5년생이 쓴 글 <나의 고민>)


이래서 아이들에게 잡동사니 지식을 마구 쑤셔 넣는 공부를 점수 따기 경쟁으로 시키는데, 이 공부의 목표가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위해 유치원 때부터 아이들을 들볶는다. 그 결과 아이들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나에게 필요한 게 뭘까? 만화책, 아니 인형, 동화책, 장난감 옷, 그래 공부야! 생각이 난다, 공부라는 것을. 공부를 못 하면 시집도 못 가고, 돈도 못 벌고, 공부를 못 하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인제서야 왜 엄마가 공부 공부 하는가를 알았다. 인제 엄마가 귀따겁게 공부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교 3년 여학생이 쓴 글 <나에게 필요한 게 뭘까?>)


이 글은 공부에 대해서 강박관념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길들여 가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도시 아이들이고 농촌 아이들이고 할 것 없이 ‘축구 선수’ ‘농구 선수’ ‘가수’ ‘과학자’가 대부분이다. 땀 흘려 일하면서 살아가겠다고 하는 아이를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이만하면 ‘편안하고 편리함’을 찾기만 하는 어른들의 꿈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잘 이어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그 ‘편안하고 편리함’의 환상에 취해 있더라도, 결코 덮어 가리고 숨겨버릴 수 없는 것은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이다,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자꾸 나오는 이 현실도 꿈을 위한 것이라고 억지말을 할 수 있겠는가? 현재를 불행하게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무슨 앞날을 기대하겠는가?

 

인간들은 잘못된 꿈을 꾸고 있다. 허망한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그 병든 꿈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본래 아이들은 참으로 순박하고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었다.


참새는 겨울이 지나간다고

지저거리며 얼마나 좋아할까?

나도 봄이 오면 일요일날은

보리밭 매러 간다.

들로 호미를 들고 가면

참새도 보리밭에 앉아서

땅을 쫓으며 벌레를 잡는다.

(1964년 국교 4년생이 쓴 시 <봄이 오면>)


이 얼마나 건강한 삶의 꿈인가? 지금으로부터 24년쯤 전만 해도 농촌의 아이들은 이런 인간스런 삶의 꿈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직금은 이런 꿈이 거의 없어졌다. 없어졌지만 산골에서 아직도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꿈의 씨앗 같은 것이 귀하게 남아 있다.


마늘 집 식구는 가난한데 왜 이리 식구가 많을까? 참 이상한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마늘을 하나 쪼개가지고 밭에다 심으면 꼭 식구가 많아요. 해마다 해마다 마늘의 식구가 다섯 식구도 있고, 여섯 식구도 일곱 식구도 있고, 아홉 식구도 있고, 열 식구도 있죠. 나는 마늘 한 송이가 있으면 욕심장이라고 하고, 여러 식구와 같이 살면 착하고 귀엽다고 생각합니다. 비가 오면 빗물도 혼자 먹지 않고 같이 먹어요. (국교 5년생이 쓴 시 <마늘>)


마늘을 까면서, 마늘 식구들이 빗물도 같이 나눠 먹으면서 정답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이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가? 여기에는 편안하고 편리한 삶의 꿈, 즉 점수 많이 따서 좋은 학교 나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 하는 꿈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꿈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이들이 가져야 할 순수한 꿈이요, 우리 모든 어른들이 찾아 가져야 할 참된 꿈이다. 민주와 통일로 이어지는 겨레의 꿈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사람을 화합하게 하는 바른 삶의 꿈, 그 꿈의 씨앗은 아이들의 것이다, 이 꿈의 씨앗은 천만다행히도 삭막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도시 아이들까지 아직은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나는 반장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아이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를 부를 때는 반장이라고 부른다.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친근감을 줄 텐데, 뻑뻑하게 반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싫다. (국교 6년생이 쓴 시 <반장>)


어른들이 가르치는 입신출세의 길에 끌려가야 하는 아이들은 반장이 되면 크게 기뻐하고, 반장이라 불러주면 우쭐거린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어쩌다가 반장이 되기는 했지만, 자기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주기를 바란다, 깨끗한 꿈을 잃지 않은 아이이다. 이 아이의 꿈이 우리 모두의 꿈이 될 때, 민주주의도 통일도 저절로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만 편안하고 편리하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개인이든 나라든 꿈을 가질 수 없지만, 불행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되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건강한 꿈속에서 살아간다.

 


3) 어린이가 가져야 할 꿈


어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자.”

“꿈을 가지고 공부해라.”

“이 동화에는 꿈이 있다.”

이런 말에 나오는 꿈이란 무엇일까?

 

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밤에 잠이 들었을 때 꾸는 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먼 앞날 - 10년 뒤, 20년 뒤에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고 그리는 것이다.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꿈은 바로 뒤의 것, 즉 먼 훗날의 소원을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 나라 어른들이 어린이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꿈이란 것을 좀 못마땅하게 여긴다. 왜 그런가 하면, 실상 어린이들은 먼 훗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오늘을 살아갈 뿐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산다. 어린이가 자라서 청년이 되면 그때는 먼 앞날을 생각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참고 살겠지. 그러나 어린이들은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어린이들은 먼 훗날을 위해 오늘을 고통스럽게 살아갈 수가 없고, 그렇게 살아가도 안 된다. 오늘을 즐겁게 살아야 먼 훗날이 행복해지는 것이 어린이들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꿈이라는 짐을 억지로 지우려고 한다. 겨우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어린이들에게 장차 어른이 되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싶으냐고 묻기를 잘 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대장이 되겠다든지 의사가 되겠다든지 하면 재미있어 한다.

 

요즘은 대통령이나 의사가 시세가 없어졌는지, 과학자가 되겠다는 어린이,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어린이, 가수가 된다는 어린이가 많아졌다.

 

어린들이 왜 그렇게 과학자가 되고 싶어 할까? 그것은 학교의 선생님들이 과학을 강조하고 과학자가 제일 훌륭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르쳐놓고 장차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고 물으니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은 뻔하다. 이것이 바로 꿈을 억지로 덮어씌우는 짓이다.

 

체육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수나 코미디언이 된다는 것도 밤낮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니 그렇게 되지. 이전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어린이들이 많았던 까닭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이 의사가 되면 돈을 잘 번다고 생각해서 “너는 커서 부디 의사가 되어라.”고 늘 말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체육선수가 되고 가수가 되고 코미디언이 되면 농사는 누가 짓고 옷은 누가 만들고 쓰레기는 누가 치울까? 나라가 망해 버리지.

 

중고등학생들에게는 ‘큰 뜻’이란 말을 써서 “큰 뜻을 품어라.”고 말한다. 이 ‘큰 뜻’이란 말은 ‘꿈’이 둔갑한 말이다. 큰 뜻을 가지고 죽자살자 점수따기를 하라고 하는 이것이 바로 아이들 잡는 입신출세주의 교육이다.

 

대관절 국민학생이 어른이 된 다음에 무슨 직업을 가지겠다느니 하는 것부터 크게 잘못되었다. 중학생들도 장차 무슨 직업을 가지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공부만 즐겁게 잘해서 장래에 무슨 일을 맡아도 잘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면 되는 것이지.

 

만약 굳이 어린이들이 꿈이란 것을 가진다면 어른들에게 강요받거나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꿈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린이다운 꿈을 가졌으면 한다.

 

내가 자라나면 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질 수는 없을까? 내가 어른이 되면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일을 싹 없애겠다, 내가 어른이 되면 대통령이고 국회의원을 서로 하라고 권하는 세상이 되게 하겠다, 내가 어른이 되면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이 가장 큰 대접을 받는 사회가 되도록 하겠다, 어른이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무기를 없애겠다, 어른이 되면 동물원의 짐승들을 모두 풀어놓아 산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남북통일을 이루어 백두산에 올라갈 것이다⋯⋯ 이런 꿈들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이런 꿈이야말로 어린이의 꿈이요, 어린이다운 꿈이다. 이런 어린이다운 꿈이 사실은 온 인류의 희망이 되어야 하겠지.(198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