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세상을 바꾸는 통찰의 순간들
아하! 세상을 바꾸는 통찰의 순간들
(무의식이 아이디어를 발생시키는 방식 탐구)
윌리엄 어빈 지음
-라이트 주립대학교 철학교수
-21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욕망의 발견 :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는 왜 원하는가(까치글방, 2008)
-직언
-알게 모르게, 모욕감
전대호 옮김
까치출판사_20150630
...차례........................................................................................................................................
제1부 종교에서의 통찰의 순간...31
제2부 도덕에서의 통찰의 순간...79
제3부 과학에서의 통찰의 순간...135
제4부 수학에서의 통찰의 순간...201
제5부 예술에서의 통찰의 순간...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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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무의식에서 형성된 다음에 마치 불청객처럼 의식에 떠오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발견한 욕망의 소유자로 자처하면서 그 욕망을 채우려고 애쓰기 시작하곤 한다.
이것은 불행한 실존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통찰의 순간을 경험할 때 어떤 느낌이 들까?
수학자가 오랫동안 열심히 노력한 끝에 마침내 어떤 정리를 증명하면 엄청난 환희를 느낀다.
몇몇 수학자들은 수학에서 얻는 쾌감이 섹스와 마약이 주는 쾌감을 능가한다고 증언한다.
도덕의 영역에서 통찰의 순간은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 있다.
중요한 도덕적 통찰에 이른 사람은 대개 삶의 방식을 바꾸고, 어떤 경우에는 인생 계획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
종교에서의통찰의 순간은 말 그대로 공포를 자아낼 수 있다.
선지가 에스겔은 신과 마주했을 때 두려움에 질려 바닥에 쓰러졌다.
중대한 통찰의 순간에 앞서 어떤 과정 혹은 활동이 일어날까?
수학자들은 여러 해 동안 수학을 공부한 다음에 수학 중에서도 특정한 분야를 더 오랫동안 파고들고,
이어서 그 분야에서도 특정한 문제를 더욱더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세상과 공유할 만한 통찰의 순간을 경험한다.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흔히 수학자가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애쓰는 순간이 아니라 문제 풀이에 매달리는 시간들 사이의 휴식 시간에 떠오른다.
수학자의 의식이 다른 활동을 하는 동안 무의식은 수학 문제에 매달리며, 의식보다 무의식이 수학적으로 더 유능하다는 생각이 들 만하다!
도덕 분야에서는 여러 해에 걸쳐 공부하지 않아도 통찰을 경험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도덕적 믿음들을 가지는 것, 그 믿음들에 명백한 비일관성이 있음을 알아채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종교적 계시를 경험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그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이 지상에서 자신을 대변할 개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도 덧붙여야 한다.
어떤 뇌 과정들이 통찰의 순간을 발생시킬까?
이 책에서 나는 아이디어 형성에 관한 신경과학(neuroscience)을 탐구할 것이다.
통찰의 순간에 당사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는 통찰의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통찰에 이르면 서둘러 세상으로 나가서 자신의 경험을 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공익에 기여할 수 있다.
특히 그의 통찰이 발명에, 예를 들면 생명을 구하는 약의 발명에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최초 발견자로서 명예와 부를 거머쥠으로써 말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통찰과 연계된 개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이익을 챙겼다.
누군가가 자신의 통찰을 널리 알리면 세상은 어떻게 반응할까?
한 과학자가 지적인 도약의 순간을 경험하여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론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고 가정해보자.
그는 동료 과학자들이 사려 깊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어서 자신의 이론을 환영하리라고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자는 흔히 동료들의 회의적 반응에 직면한다.
그의 이론이 급진적일수록, 동료들의 반응은 더 회의적일 것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동료 물리학자들 다수는 그의 상대성이론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1921년에 받은 노벨 물리학상은 광전효과를 연구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개발하고도 20년 동안 세상에 알리지 않은 이유들 중 하나는 의심할 바 없이 그 이론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윈이 그 이론을 발표하지 않으면 독자적으로 똑같은 통찰에 도달한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더 먼저 그 이론을 발표함으로써 진화론의 창시자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 의해서 비로소 극복되었다.
예술가도 예술계 내부와 외부에서의 반응을 염려해야 한다.
예술가가 대중이나 평론가로부터 받는 비난은 경력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다.
오줌처럼 보이는 액체 속에 잠긴 십자가 사진으로 악명을 얻은 안드레 세라노는 거주지의 가톨릭 주교로부터 팬레터를 받았다.
아마도 그 팬레터를 받고 공포를 느꼈겠지만 말이다.
종교적 통찰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들이 그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가능성이 높다.
도덕적 통찰을 알리는 것도 타인의 호응을 얻기 어려운 행동이다.
타인들은 당신이 그들의 도덕적 가치관을 평가하려고 들거나 심지어 당신의 가치관에 따라서 살기를 강요하려고 들까봐 염려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영국의 노예무역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노예무역에 투자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자산가를 생각해보라.
그는 노예제도의 비참함을 폭로하는 클라크슨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클라크슨이 자신의 일이나 걱정하고입을 다물었다면, 그 자산가의 삶은 훨씬 더 단순했을 테니까 말이다.
통찰의 순간을 경험하고 널리 알린 사람은 세상의 반응에 어떻게 대응할까?
어떤 사람이 중대한 발견을 동료들이나 대중에게 알리고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인 반응을 얻는다고 해보자.
처음에 그는 자신이 보기에 지극히 확실한 통찰 앞에서 타인들이 반발하는 모습에 당황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당황이 가라앉으면, 그는 이렇게 자문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한다.
나는 타인들의 부정적 반응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 가지 선택지는 그런 반응에 굴복하는 것이다.
과학자라면 자신의 이론을 철회할 수 있을 테고,
화가라면 통상적인 화풍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며,
도덕적 통찰이나 종교적 계시를 경험한 사람은 대중을 개종시키려고 애쓰는 것을 중단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깨달은 당사자가 동료들이나 대중을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이끌기 위해서 어떤 대가라도 감수하기로 결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자라면 자신의 급진적인 이론으로부터 발을 빼는 대신에 논문을 출판하고 강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이론을 옹호하는 일에 납은 경력을 고스란히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내부공생 이론을 담은 획기적인 논문을 열다섯 번이나 퇴짜를 맞은 끝에 발표했을 때, 그녀는 20대 후반이었다.
그 이론은 우리의 세포 속에 미토콘드리아라는 작은 에너지 생산공장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한다.
마굴리스는 그후 40년의 경력을 마치 어미 곰이 새끼 곰을 돌보듯이 그 이론을 보호하는 데에 쏟아부었다.
통찰을 얻은 사람은 도덕성 개혁에 앞장설 수 있을 것이고,
종교적 계시를 받은 사람은 자신을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는 사람들의 적개심을 무릅쓰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할 수 있을 것이다.
통찰의 순간이 세상을 바꾸려면, 누군가가 그 순간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순간을 경험한 당사자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
그는 자신의 통찰을 널리 알려야 한다.
또한 아마도 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세상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든 통찰의 순간들을 경험한 개인들을 조사해보면,
그들의 대다수는 지능이나 창조성이 출중했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용기와 인내력이 남달랐음을 알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성격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살았더라면, 역사에 남은 위대한 통찰들을 적대시했을 것이다.
이것이 슬픈 진실이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주변에서 발생하는 통찰의 순간에 반응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톨찰에 대한 불관용은 인류의 진보를 늦출 수 있지만, 통찰에 대한 의심의 결여 역시 위험할 수 있다.
완벽한 세상의 사람들은 통찰의 순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의심을 품을 것이다.
관건은 수용과 배척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모든 사회가 직면한 중대한 과제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나는 통찰의 심리적 측면 뿐 아니라 정치적 측면도 탐구할 것이다.
사회는 통찰의 혜택을 받는데 사람들은 통찰의 표출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면, 정부는 통찰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제2부 도덕에서의 통찰의 순간
1893년 모한다스 간디는 어떤 소송을 위해 남아프리카로 가는 길에 일등석 열차표를 샀다.
그가 일등칸에 들어가자 한 승객이 '유색인'과 함께 여행하기 싫다며 반발했다.
간디는 일등칸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가 거절하자 경찰관이 그를 밀어냈다.
"나는 내 의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할까?
아니면 인도로 돌아가야 할까?
그도 아니라면, 이 모욕에 괘념치 말고 프리토리아로 가서 소송을 끝낸 다음에 인도로 돌아가야 할까?"
여행의 다음 구간에서 역마차를 탄 간디는 또다시 인종차별에 직면했다.
마차 안에 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차의 백인 우두머리는 간디에게 '당신은 마차 안에 앉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에 간디는 마차 외부에 마부와 함께 앉아야 했고, 간디는 이에 응했다.
얼마 후에 그가 담배를 피우며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오자, 간디는 한동안 마부 옆자리를 그에게 내주고 마차 입구의 발판에 주저앉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간디는 그렇게 하기는 싫다면서 대신에 마차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욕설을 퍼부으며 간디를 때리기 시작했다.
더 나중에 한 호텔은 손님이 가득 찼다는 핑계로 간디를 문전박대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사는 인도인들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놓았을 때, 그들은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들이 겪은 유사한 경험들을 술술 풀어놓기까지 했다.
이 일은 온화한 법률가 모한다스 간디가 민권운동가 마하트마 간디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마하트마(Mahatma)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을 뜻하며, 그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가능하다면 인종차별이라는 병의 뿌리를 뽑으려고 애쓰면서 고난을 겪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