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OSHO

실다이 2015. 8. 25. 20:03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알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에 화를 낸다. 그들은 그런 일에 참지 못한다. 세상에서 사색하는 것 이상의 범죄 행위는 없다.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자는 스스로의 십자가를 준비한 것이다.
우리는 한 존재계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든 결국은 그대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그대가 좀더 각성하게 되면 그때 그대는 말할 것이다. "맙소사! 이 상처는 내가 나에게 입힌 것이다." 그대는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면서 누군가를 상처 입혔다. 아무도 서로 다르지 않다. 전 존재계는 하나이며 우주적인 단일체이다. 이러한 이해로부터 비폭력이 생긴다.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국가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며,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혁명은 실패했다. 왜냐하면 분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은 무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슴을 열어 보여야 하는데 그 가슴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즉흥적인 관계만 맺는 것도 다 이런 탓이다. 그들은 깊은 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치고 달아나 버린다. 겉만 살짝 건드린 뒤 실체가 미처 드러나기 전에 도망간다. 외면적인 만남만이 있을 뿐,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육체적 배설과 카타르시스, 그뿐이다. 친밀하지 못한 관계에서는 계속해서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 진정 깊은 관계를 원한다면 발가벗을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는 그대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상대에게 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나누어 주기 전에 먼저 그대가 그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명상이 중심이라면 사랑은 그 중심의 둘레다. 명상이 불꽃이라면 사랑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다. 명상이 꽃이라면 사랑은 그 꽃의 향기다
모든 질문들은 본디 인간이 만든 것이다. 존재는 아무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존재는 아무 해답이 없는 완전한 침묵 상태이다. 따라서 그대가 모든 의문들을 떨쳐 버릴 수 있다면, 바로 그때 그대는 존재와 교감할 수 있다. 그대가 의문들을 버리고 철학과 이론과 논리를 버릴 때, 그대는 살아 있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대가 실존적인 존재가 되고, 아무 질문이 없는 바로 그 상태가 해답이다.
전체적으로 살아라. 존재계는 그대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대가 충분이 강해져서 사회속에서도 진짜 얼굴을 갖고 움직이고 싶은 날이 올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대에게 달려있다.
행복을 그대의 종교로 삼아라. 만일 그대가 행복하지 않다면 필시 뭔가가 잘못된 것이고, 따라서 어떤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즉,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쾌락주의자다. 그리고 행복은 인간을 규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이외에 다른 기준은 없다. 행복은 만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표시이고, 불행은 어떤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으며, 따라서 어떤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표시이다.
그대가 누구든 간에 그대는 그대다. 그대를 받아들이라. 다른 무엇이 되기를 욕망하지 말라.
산야스는 인격이 없으며 도덕이 없다.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에 관계 없는 것이다.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오는 높은 도덕성을 갖는다. 밖으로부터 오는 어떠한 강요도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강제는 그대를 하인이나 노예로 바꿔놓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노력은 그대에게 위엄과 영광을 주려는 데 있다.
북극성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별이다. 다른 모든 별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이 별만큼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은 북극성과 같다. 다른 모든 것은 변하지만 사랑만큼은 영원하다. 오직 사랑만이 영원불변하다. 기억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사랑이다. 두 번째는 그대가 걷고 있는 동안에도 그대의 영혼, 북극성은 걷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대는 먹고 있지만, 그대 안의 영혼은 먹지 않는다. 그대가 화를 내더라도 그대 안의 영혼은 결코 화내는 법이 없다. 그대가 수천, 수만 가지 일을 하더라도. 그대 안의 영혼은 그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초연하다. 그것이 그대의 북극성이다. 그대 안에 있는 그 변함 없는 존재가 참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그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방책이다.
그대 주위의 사람에게 무감각해지지 말라.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경배하는 법을 배우라. 그리고 인간의 가슴을 지성적으로 들여다 보는 법을 배우라. 오직 인간의 가슴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만이 신성의 가슴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삶은 흐르고 있다. 그것은 강이며, 끊임없는 흐름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정적(靜的)인 것으로 생각한다. 오직 사물들만이 정적이다. 오직 죽음만이 변하지 않고 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삶이 많을 수록 더 많은 변화가 있다. 풍부한 삶에는 매순간 엄청난 변화가 있다.
시간은 세가지 시제 - 과거, 현재, 미래 - 로 이루어진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잘못이다. 시간은 오직 과거와 미래로 이루어진다. 현재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삶이다. 그래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 사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 과거는 단지 기억들의 집합이며 미래는 단지 그대의 상상이며 그대의 꿈이다. 실재는 지금 여기이다.
아이들이 그대의 소유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아이들은 그대를 통해 태어났지만 그대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대는 과거를 가지지만, 그들은 오직 미래만을 가진다. 그들은 그대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그대처럼 사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 것과 거의 같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자유 속에서, 책임 속에서, 위험 속에서, 그리고 도전 속에서.
진정한 책임은 그대 자신의 가능성, 그리고 그대의 지성과 각성에 대한 것이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두려움을 선택하지 말라. 두려움을 선택하는 자는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두려움은 그자리에 가만 두어라. 그 대신에 사랑을 선택하라.
외부로 부터 내면으로 방향을 바꾸라 그러면 그것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대가 마음속에 있을 때 그대는 외부에 있는 것이다.그대가 무심속에 있을 때 그대는 내면에 있는것이다.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생각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둘은 정반대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예속되지만 유쾌한 사람, 더없이 행복한 사람은 예속되지 않는다.
미풍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살며시 가 버린다. 미풍은 속삭이듯 다가온다. 너무나 조용히 오는 바람에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어느 순간 와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오는 방식이다. 진리와 사랑이 다가오는 방식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매달린다. 사랑이 다가올 때는 행복에 겨워하다가도 사랑이 가려 하면 큰 상처를 입는다. 그것은 우리가 매우 무의식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고, 배은망덕한 탓이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간다는 것을 명심하라. 삶을 미풍처럼 받아들이면 매달림도 집착도 없다. 가만히 맞아들이고 즐겨라. 일어나느 대로 받아들여라.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 좋다.
변화가 곧 삶이고, 삶이 곧 변화라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라. 매 순간 속에서 항상 새롭도록 하라.
만일 그대가 나를 사랑해 왔다면, 만일 그대가 나를 신뢰해 왔다면, 그대는 수천가지 길로 나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그대의 신뢰, 그대의 사랑, 그리고 바로 그대 가슴 속에서, 바로 그대 가슴의 고동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수 많은 답변을 하면서도 단 하나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철학자는 나는 모른다고 말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은 것이다.
기쁨은 무엇인가를 완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것, 즉 그대의 모든 강렬함을 가지고 갈망하는 데 있ㅇ며 그대가 그것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온 세상을 잊는 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대 전 존재의 유일한 초점이다.
진리는 하나다. 허위는 그대가 원하는 만큼 많을 수 있다. 종교는 하나다. 둘 일 수도 없다. 진리는 하나이므로. 그러나 철학은 그대가 원하는 만큼 많을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철학을 가질 수 있다
삶은 그대의 통제권 밖에 있다. 삶을 즐길 수는 있지만 조종할 수는 없다. 삶과더불어 살고 삶과 더불어 춤출 수는 있지만 결코 삶을 통제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놓치는 것은 삶을 지나치게 조종하려는 탓이다. 유유히 흐르는 저 세찬 강물이 되어라. 강물은 꿈도, 상상도, 희망도 갖지 않고 흐른다. 아무리 그대가 강물을 움켜쥐려 해 보아도 강물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이것이 삶이다. 넒은 창공이 곧 삶이다.
사랑은 한 줄기 강물이다. 사랑은 언제나 강물처럼 흐른다. 그러한 움직임이 바로 강물의 생명이고 사랑의 생명이다. 강이 흐름을 멈추면 고여 썩고 만다. 그것은 더 이상 강이 아니다. 그러나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지 말라. 허전함은 사라의 속성이다. 완전하지 않기때문에 사랑이 좋은 것이다. 뭔가 빠져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채우려고 할 것이 아닌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두 세계가 만났는데 어떻게 딱 들어 맞을 거라고 기대하는가? 그런 기댜가 좌절과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서로 맞지 않다고 걱정하지 말고 조화와 조율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사랑의 방법론이다.
어떤 전쟁도, 어떤 투쟁도, 질투도, 증오도 필요가 없다. 삶은 너무나 짧고 사랑은 너무나 고귀하다. 그리고 그대의 삶을 사랑과 조화와 기쁨으로 채울 수 있고, 그대의 삶 그 자체를 시(詩)로 만들 수 있는데 그대가 그것을 놓친다면, 그것에 대해 오직 그대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다른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주시자 속에 더욱 더 많은 중심을 가져라. 낮이 오고 밤이 올 것이며 삶이 오고 죽음이 올 것이며, 성공이 오고 실패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주시자 속에 중심을 갖는다면, 그것만이 그대 속에 있는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된다. 단지 한순간이라도 내가 말하는 것을 느끼려고 해 보라.
별의 기쁨은 빛을 앞으로 비추는데 있다. 집착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라
명상은 그대 존재의 본질적인 핵심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질 수 없다. 의식은 단순히 의식이다. 거울은 거울이다. 거울은 남성이 아니며 여성도 아니다. 거울은 단순히 비출뿐이다. 의식은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리고 명상은 그대의 거울이 비추도록, 움직이는 마음과 움직이는 몸을 단순히 비추도록 해준다. 몸이 남자의 것인지 여자의 것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든 - 감정적으로 작용하든, 논리적으로 작용하든 -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이든, 의식은 단순히 마음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그 깨어 있음, 그 각성이 바로 명상이다.
삶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만 발전한다. 삶은 신선해야 하고 결코 아는 자가 되지 말고 언제까지나 배우는 자가 되어라.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 두어라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은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지려는 갈망이 없다.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만일 그대가 고요하고 중심이 잡혀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만일 그대가 중심에 머물지 못하고, 내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명상의 상태에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끊임없이 선행을 베푸는 많은 사람들이 자선사업가로 그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들이 베푸는 선행은 궁극적으로 해로운 결과만 낳을 뿐이다.
우정은 가장 순순한 사랑이다. 우정은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이다. 그 속에서는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으며, 어떤 조건도 없고 단지 주는 것을 즐길 뿐이다. 그는 많은 것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며 사실 그것은 저절로 일어난다.
세상은 메아리의 세계이다. 우리가 분노하면 세상도 분노로 되받아 친다. 우리가 사랑을 주면 세상도 사랑으로 화답한다. 이 자연의 법칙 안에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진리가 있다. 이것이 바로 카르마(인과응보)의 법칙이다. 뿌린대로 거두리라! 미움은 미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으리니.
사람들은 자유에 대해 말하지만 자유를 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는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우리에게 알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대는 항상 곁에 있는 배우자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대는 자녀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들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보다 고귀한 것이 더 상처 입기 쉽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법칙 중의 하나이다. 나무의 뿌리는 매우 튼튼하지만 꽃은 그렇지 않다. 꽃은 매우 상처 입기 쉽다. 단지 심한 바람에도 꽃은 파괴될 것이다. 인간의 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증오는 매우 강하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못하다. 사랑은 꽃과 같다. 어떤 돌에 의해서도 쉽게 부서지며 어떤 동물에 의해서도 파괴된다. 삶의 보다 높은 가치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동양의 윤회설은 아름답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대에게 삶에 대해 아주 이완된 태도를 갖게 한다. 이것이 윤회설의 참된 아름다움이다. 나는 형이상학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설령 이것이 진리가 아니라해도 상관없다. 나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내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것이 그대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자신의 일부분만을 드러내고 계속해서 자신을 베일로 감춘다. 그대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실체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은 그대에게 더 이상 관심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가 계속해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상대가 관심을 갖고 그대 주위를 배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는 미지의 것을 찾아 그대를 탐색하고 유혹하고,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 역시 그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신비가 풀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동물적인 이해방식이다. 서로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이고, 사랑의 신에 완전히 항복한다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다. 그와 같은 완전한 열림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대 존재의 자연스런 길을 따른다면 비록 지옥에 있다 해도 그대는 천국에 있을 것이다.
그대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미묘한 소유욕의 물결이 있다. 말해지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이제 당신은 나의 소유물이며 누구도 당신을 사랑해서는 안됩니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신뢰 속에서는 그대가 신뢰하는 사람을 소유하는 문제는 없다. 반대로 그대는 "나를 소유해 달라. 에고로서의 나를 파괴하고, 내가 사라져서 그대 속으로 녹아들어 그대와 함께 가는 데에 저항이 없도록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끊임없는 투쟁이며 싸움이다. 신뢰 속에서는 어떤 싸움의 문제도 없다. 그것은 진정한 내맡김이다.
삶에서는 깊이와 높이 사이에 균형이 필요하다. 나는 그대에게 동시에 두 가지를 가르친다. 명상의 중심으로 들어갈 때 그대는 우주 속에 더 깊게 뿌리 내린다. 그 중심에서 붓다를 데려오는 것은 그대의 향기를, 우아함을, 환희를 하늘에서 꽃피울 수 있는 곳으로 더 높게 보내는 것이다. 그대의 환희는 그 높이를 향한 움직임이고, 그대의 명상은 그 깊이를 향한 움직임이다. 그대가 이 두 가지를 완성할 때 그대의 삶은 축복이 된다. 그대의 삶이 슬픔에서 축복으로 변하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일이다.
그대가 내버려둠(let-go)을 신뢰하는 순간, 그리고 그대가 존재계와의 투쟁을 멈추는 순간, 그대는 어떤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존재계가 돌보아 주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행복한데 돈이 있다면 더 큰 행복을 위해 돈을 쓸 수 있지만, 불행한데 돈이 있다면 더 큰 불행을 위해서 돈을 쓰기 때문이다.
고는 불행을 먹고 산다. 좀더 불행할수록 에고에 양식을 주는 것이다. 축복으로 가득한 순간에 에고는 전적으로 사라진다. 반대로 에고가 사라지면 축복이 그대에게 퍼부어지기 시작한다. 그대가 에고를 원하면, 그대는 용서할 수 없다. 특히 마음의 상처와 손해, 모욕과 박대와 불쾌를 그대는 잊을 수 없다.
지식의 힘은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무념의 상태엣 발견되는 것이다. 너무나 완전히 침묵하여 단 하나의 샹각도 방해물로서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 침묵 속에서 그대는 바로 그대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것은 하늘처럼 광대하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모든 지식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성장은 자각을 통해 일어난다. 실존적인 변화가 아니다. 실존은 예전과 똑같다. 붓다, 그리스도, 그대 혹은 누구나 똑같은 상태이고 똑같은 공간에 있다. 하지만 자각하는 이는 붓다가 되고, 자각하지 않는 이는 여전히 거지로 남는다.
당나귀는 웃지 않는다. 물소도 농담을 즐기지 않는다. 농담을 즐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다. 세상의 성인들은 물소나 당나귀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인간 이하로 전락 했다. 그들은 무한한 가치를 상실했다. 웃음이 없이는 인간은 꽃이 없는 나무와 같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 없다. 죽음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삶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죽음이다. 그런데 이처럼 필연적인 것에 대해 왜 걱정하는가?
그대가 세상이다 오직 그대만이 존재할 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거울 일 뿐이다. 사념이나 기분을 통해서 세상을 보지 말라 맨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맨 귀로 세상을 들어보라. 그대와 세상사이에 마음을 개입시키지 말라.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만약 그대가 그것을 갖는다면 그대는 왕이나 여왕이다. 자유가 함께하는 사랑, 그것은 진정한 신의 왕국이다. 사랑은 그대에게 땅으로 통하는 뿌리를 주며, 자유는 그대에게 날개를 준다.
과거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말라. 단지 현재에 살라. 그러면 모든 과거도 모든 미래도 그대의 것이 될 것이니
불행은 그대의 에고에 자양분을 준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그토록 많은 불행한 사람을 보는 이유이다. 근본적이고 중심이 되는 것은 에고이다. 에고는 가장 커다란 속박이며 내가 아는 유일한 지옥이다.
연민의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우정을 맺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우리는 다른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가능성도 사라진다.
지적능력은 하나의 폭력이다. 그것은 공격성이다. 여자 과학자가 드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과학이 손대는 것의 무엇이든지 죽는다. 그래서 과학은 영혼이 없다고 말한다. 삶이 신비하다는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삶과 신비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성(sex)은 씨앗이고 기쁨이다. 성이 자연스럽게 성숙하고 존중받고 가치있게 평가된다면 변형과 질적 변화가 일어난다. 성은 예술과 음악, 시, 춤, 그리고 수천 가지의 다른 창조적인 차원의 잎사귀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예측불허한 자가 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가 되라. 결코 변화하기를 멈추지 말고 결코 예측불허가 되기를 멈추지 말라. 오직 그때에야 비로소 삶은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대가 예측 가능해지는 순간, 그대는 기계가 된다. 기계는 예측 가능하다. 그것은 어제도 같은 상태였고, 오늘도 같은 상태이며 내일도 같은 상태일 것이다. 기계는 변화지 않는다. 매순간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만의 특권이다. 그대가 변화하기를 멈추는 날, 미묘한 의미에서 그대는 죽은 것이다.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시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은 철학도 아니요, 예술이다
만일 마음과 가슴 사이에 선택의 문제가 있다면, 가슴이 항상 옳다. 왜냐하면 마음은 사회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교육된 것이다. 그대는 마음을 존재계로부터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받았다. 가슴은 오염되지 않았다. 가슴은 순수한 존재이다. 그래서 그것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 가슴의 관점에서 보라. 그러면 모순들이 얼음처럼 녹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들을 넘어 움직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생각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마음의 부분이다.
우리가 진정한 삶의 흐름 속으로 뛰어들지 않고서는 우리는 언제까지나 죽은 삶을 살 뿐이다. 그 죽은 삶을 우리는 안정된 삶이라고 부른다.
가장 깊은 내면의 존재에 도달할 때 사람은 관계가 아니라 그대의 상태가 된다. 세상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가 변할 때 모든 것이 변한다 그대와 함께 우주는 변할 것이다.
신은 창조적인 사람을 사랑한다. 익명의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고, 사회에, 역사에, 종족에, 종교에, 교회에 함몰되어 버린 사람들은 신과 친해질 수 없다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위험 없이는 변화하고 싶어도 변화할 수 없다. 그런 조건 - 위험이 없는 - 하에서는 모든 것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위험이 따라야 변화가 이루어진다. 진정한 이해만 있으면 변화는 저절로 일어난다. 이해는 급진적인 혁명이다. 이것 외에 혁명이란 없다.
모든 것이 지나가지만 그대는 남아 있다. 그대는 실재이다. 모든 것은 단지 꿈이다. 거기 아름다운 꿈이 있고, 악몽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름다운 꿈이든 악몽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꿈을 지켜 보고 있는 자이다. 그 지켜보는 자가 유일한 실재이다. 그 지켜보는 자가 절대적으로 여원한 어떤 것이다.
평범한 삶에 안주하지 말라. 이것은 삶을 거역하는 죄악이다. 위험이 없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나쁜 일이 있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지점이 있다. 그것이 바로 평상심의 상태이다. 그대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그런 상태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대는 삶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내면이 고요하기 때문이다. 행복도 불행도 없다. 어떤 종류의 소란도 없는 완전히 고요, 그 자체이다. 붓다는 그것을 "중도中道"라고 일컬었다.
그대가 안녕과 행복감을 느낄 때 지켜보는 자를 기억하라. 그대가 불행 속에 있을 때, 고통 속에 있을 때 지켜보는 자를 기억하라. 모든 환경 속에서, 모든 분위기 속에서 지켜보는 자를 계속 기억하라. 곧 그대는 지켜보는 자 속에 중심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더 이상 기억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날은 한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날이 될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깊이 받아들이면 그것은 축복이 된다. 모든 것은 내면의 존재가 침묵을 원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존재의 부름에 응하라.
마음 전체가 빛으로 가득할 때, 삶은 비로소 하나의 기적이 된다.더 이상 평범한 삶이 아닌, 모든 일들이 비범해지는 특별한 삶으로 바뀐다. 자잘한 일상들이 신성해지고 하찮은 작은 것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중요한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그대가 환하게 빛나면 존재 전체가 빛으로 넘쳐 나고, 그대가 어둠에 싸여 있으면 존재 전체도 어둠에 잠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대 몫이다.
성(sex)은 씨앗이고 뿌리일 뿐이다. 그것이 지탱되며 자양과 물이 주어지고 보살펴진다면, 그때에는 많은 가지들이 자라고 많은 싹들이 나고 수많은 녹색 잎들이 사방팔방으로 솟아나 바람 속에서 비와 태양 아래서 춤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교육은 그대의 마음만을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대에게 훌륭한 생계를 주지만 훌륭한 삶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가슴은 그대에게 훌륭한 생계를 주지는 못하지만 그대에게 훌륭한 삶을 줄 수 있다. 그리고 마음과 가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마음을 사용해야 할 때는 마음을 사용하고, 가슴을 사용해야 할 때는 가슴을 사용하라.
두 개의 극성을 가진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마음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긍정에서 부정으로 시시각각 변한다. 마음의 이 두 극은 마치 음극과 양극을 가진 전극과도 같다. 하나의 극으로만 전기가 발생하지 않듯이 인간의 마음 역시 하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그대가 때로는 환희의 기쁨을, 때로는 암담한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암담한 절망의 정도는 환희의 기쁨을 느끼는 정도에 비례한다. 만일 그대가 기쁨의 절정을 맛본다면, 머지않아 반드시 슬픔의 밑바닥까지 추락할 것이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깊은 바닥으로 추락할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정비례한다. 올라가는 만큼 내려가고, 슬퍼하는 만큼 기뻐하게 된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발명한다.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진리'라는 것은 그들의 지적인 발명품에 불과하다. 진리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다. 발명된 모든 것은 하나같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이미 그곳에 존재한다. 인간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우월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열등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서로 같지 않다. 모든 사람은 독특하다. 평등함은 심리적으로는 잘못된 것이다. 우월과 열등, 평등과 불평등이라는 모든 개념을 버려야 하며 그것들을 독틈함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개인은 독특하다. 단지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라. 그러면 그대는 모든 개인이 다른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독특함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상처를 숨기지 말라. 상처를 가리지 말라. 아픔에 직면하라. 잊어버리려 하지 말라. 천을 벗겨내고 아픔에 대해 알아내서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픔을 잊어버리려고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아픔을 파괴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삶의 신비를 알 수 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언제나 행복할 거야. 어떤 일도 나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독립적인 사람이다.
생명은 위태롭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안정적이지도 못하고, 안정적일 수도 없다. 안정은 오직 죽은 자에게만 있을 뿐이다. 생명력이 높은 것일수록 더 연약하다. 장미와 시와 태양과 음악을 보라. 아주 잠깐 흔들리기만 해도 사라지고 없다! 사랑을 보라. 그것은 단 한 순간의 요동으로 사라지고 만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일수록 그것들은 더 쉽게 상처받는다. 이것이 생명에 대한 이해력이다. 강한 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강하지 않으며 강할 수도 없다. 강한 척 하는 것은 단지 에고의 장난이다. 예민할 수 있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그로 인해 심오한 이해와 함께 에너지가 내면 깊숙이 흐른다면 더 이상 그대의 민감함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화가, 시인, 조각가, 무용가들은 결코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 본 적이 있는가? 사실, 그들은 지나치게 성적이다. 그들은 넘 심하게 사랑한다. 그들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사랑한다. 아마 한 사람만으로는 그들의 열정을 식히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걸쳐 성직자들에 의해 맹렬한 비난을 받아 왔다. "시인, 화가, 조작가, 음악가들은 건전한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인류를 아름답게 만든 유일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이 삭막한 세상에 환희의 꽃빛으로, 찬란한 음악으로, 또한 아름다운 춤으로 수놓은 유일한 사람들이다.
삶은 철학이 아니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삶은 하나의 신비이다. 타인이 결정해 놓은 방식이나 조건에 따라서 삶을 살아선 안된다.
중심이 하는 말은 뭐든지 따르라 그리고 표면이 하는 말에는 귀기울이지 말라.
온 세상을 사용하라. 그러나 그대가 세상을 소유하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대가 나무를 소유하지 않으면 나무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오직 소유가 없을 떼 진정한 관계가 생긴다.소유한 자는 언제나 그가 소유한 것에 의해 소유당한다.
자유 속에 살고 있는 독립적이고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만이 진리의 경험에 이를 수 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명상의 핵심은 주시다. 명상은 모험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이 명상이다.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 행위도 없다. 사념도 없고 감정도 없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아무런 행위도 없이 존재할 때 이 순수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또는 모든 곳에서 온다. 이 기쁨은 다른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체가 기쁨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명상에서 덕(德)의 꽃이 자라 피어난다. 이 꽃의 향기는 바람을 타고 퍼지면 존재의 무한대 속으로 사라진다. 붓다는 그대에게 오직 하나의 율법을 전한다. 그것은 의식이다. 그대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자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붓다는 삼마사티Sammasati, 곧 정념(正念)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자유, 이것이 인간이 가진 문제의 전부이다. 사랑과 자유, 이것이 인간의 언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이다. 사랑을 선택하고 자유를 버리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로인해 그대는 항상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고, 결국에는 그 욕망이 사랑마저 산산조각 낼 것이다. 어느 날 그대는 사랑을 떠나고 자유를 향해 돌진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 없이 자유롭기만 한다면 또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사랑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은 영혼의 호흡과도 같다. 역설을 선택하라. 모순, 그대로를 받아들여라. 사랑이 자유를 , 자유가 사랑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하나가 아니라 둘 다 선택하라. 사랑 속으로 뛰어들고, 그 속에서도 자유로움을 유지하라.
그대는 나무를 보고 있다. 그대가 거기 있고, 나무가 거기 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더 발견하지는 못하는가? 즉 그대는 나무를 보고 있고, 그대가 나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 내면의 주시자가 있다는 것을. 세상은 단지 객체와 주체로만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 그 둘 다를 넘어선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그 넘어섬이 명상이다.
삶이란 원래 위험한 것이다. 그대는 기꺼이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대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은 많지만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우게 마련이다. 삶이란 그 자체가 시행착오인 것이다
쾌락은 동물이고, 행복은 인간이며, 축복은 신성이다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혼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홀로 있음은 가장 근원적인 것이기에 거기서 달아날 방법은 없다. 혼자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혼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만일 그대가 홀로 있음을 즐기지 못한다면, 사랑 또한 하기 힘들다. 혼자 있지 못하는 사랑은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방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도, 진정한 관계도 아니다. 자신조차도 사랑하지 않는 그대가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사상이나 이념 앞에 서면 사람들은 비참함과 더불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런 관념들은 터무니없고 실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생 안에 놓치 말라, 인생이 인간 안에 있게 하라
그대는 그대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공기와 육체와의 관계는 사랑과 영혼의 관계와 같다. 그것의 값어치는 무한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거저 얻는다. 사람들은 아직도 너무나 어리석어서 신의 위대한 선물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강은 바로 옆에서 계속 흐르는데 사람들은 항상 목마르다.
성자가 악한이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악한은 성자가 될 수 있다.
오르가즘은 생식자용에 필요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보다 높은 진화를 위해서 창문을 여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는 자신을 극복한 사람들이다. 어떤 욕망도 그들을 좌지우지하지 못하고, 어떤 무의식적 본능도 그들을 지배할 수가 없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 참 주인다.
종교성은 단지 성장하기 위한 도전을 의미하며 씨앗이 그 표현의 궁극적인 정점에 도달 하는 것, 그리고 수천 개의 꽃을 피워 그 속에 숨겨져 있던 향기를 퍼뜨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향기를 나는 종교성이라 부른다.
분노는 항상 나약함의 표시이다.
우리가 비참한 것은 사랑이라는 언어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언어를 잊어버린 것은 우리 자신을 이성과 지나치게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이성이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성은 독점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 그대의 존재 전체에 바짝 들러붙어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성에서 느낌으로 옮겨 가 내면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진정 용기 있는 자 - 미친 사람 - 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성이, 논리가, 수학이 지배하는 마음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참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를 버리는 순간, 내면 속에는 산문이 아니라 시가 자리잡게 된다. 목적이 아닌 놀이가, 돈이 아닌 명상이, 권력이 아닌 검소함과 무소유와 삶의 기쁨이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집을 찾지 말라. 거기 어떤 집도 없다. 그대 자신을 찾아라. 거기에 집이 있다.
이완하라. 그대가 단지 주시자일 뿐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 육체는 그대가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대가 거울과 같은 주시 속으로 침잠함에 따라 전 존재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오르가즘의 경험은 항상 비성적(非性的)이다. 비록 그대가 성을 통해 오르가즘을 얻었다고 해도 그 자체 속에는 어떤 성적인 것도 없다.
세상 모든 사랑을 누릴 수 있는데도 그대가 비참하다면, 그것은 그대가 비참해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고 불행해지는 것은 그대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그대가 행복을 선택한다면, 사랑 또한 그대를 향해 달려올 것이다. 애써 오라고 손짓할 필요가 없다. 물이 아래로 흐르고 불이 위로 피어오르는 자연법칙처럼 사랑이 행복을 향해 흐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인간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결코 미련을 갖지도 않는다. 자기 본성에 반하는 것은 어떤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가 무한한 자기 존중과 함께 진실되고 전인적인 인간이 되라고 가르친다
사람들은 자유를 사랑하지만 아무도 책임을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은 함께 온다. 그들은 서로 떨어진 수 없다.
정신병원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사랑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목사는 신도를, 정치가는 국민을 사랑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반드시 현명한 것은 아니다. 사랑이 현명해지면 연민이 된다. 여기서 연민이란 전혀 다른 특질의 사랑이다. 연민은 그대에게 자유를 준다. 사랑은 있지만 각성이 없다면 그것은 파괴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랬다면 세상이 벌써 천국이 되어야 했다. 사랑을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나는 사랑이 먼저오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각성이 먼저 온 뒤에 사랑이 그림자처럼 와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유머 감각을 갖는 것, 깊고 사랑하는 특질을 갖는 것, 그리고 쾌활함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삶에 반대하는 모든 태도에 전적으로 반대한다. 그리고 신성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은 삶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삶에 찬성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쾌활함, 유머 감각, 사랑과 존경,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 삶에 대한 경의가 신성에 대한 유일한 경의이다. 왜냐하면 삶 그 자체보다 더 신성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지금 그대는 과학기술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수혜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내일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상상 가능한 모든 욕망을 실현했지만, 그것들은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제는 채우지 못한 진정한 불만족을 충족시켜야 한다. 참된 불만족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은총이다.
너희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이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검은 실이 끊어지면 천 짜는 자는 헝겊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고 베틀까지도 조사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 중 누군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려 한다면 그 남편의 속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보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거든 그 죄와 대상이 된 자의 정신도 들여다보라. 너희 중 누군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내려 악한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도 살펴보라. 그러면 분명 선과 악의 뿌리, 열매 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가 대지의 말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진정 용기 있는 자는 자신의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것은 단지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공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두려움을 수용하라.
그대의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 그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해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권위주의적인 사람들은 열등 콜플렉스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서 그들의 우월감을 내세운다. 그들은 그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말이 법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 그들은 매우 열등한 존재들이다.
성숙함은 그대의 삶의 경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대의 내적인 여행, 내적인 경험과 관계가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사람이 할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라. 그것이 유일한 출발점이다.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시간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정지할 때의 느낌, 완전한 정지의 느낌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경험과 같다.
가슴은 이중성을 초월한다. 가슴은 사물을 명료하게 보며, 사랑은 가슴의 자연스런 특징이다. 거기 어떤 것도 훈련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사랑은 대조물(counterpart)로서 중오를 갖지 않는다.
주위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다 우연임을 볼 수 있다. 그대의 전 생애는 우연적이다. 그대는 단지 위안을 얻고 싶어서 거기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의미도 없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은 무의식적인 한 우연의 일치로만 살 뿐이다. 그의 삶은 단지 우연의 일치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무의식적인 사람의 삶은 우연적인 삶이다.
차라리 벙어리가 되어라. 내면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아니면 입도 벙긋하지 말라. 사람들이 미쳤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냥 일어나는 대로 수용하라. 억지로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애쓰지 말라. 침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말라. 침묵은 신을 포착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일단 그대가 침묵을 이해하게 되면, 진정으로 해야 할 말이 내면 속에서 우러나온다.
언젠가 그대가 좋아하는 것을 더 이상 갈구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일어나는 그대로 즐기는 날이 오면, 그날로 그대는 성숙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선택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슴 대신에 머리가 선택되어서는 곤란핟. 가슴은 존재계와 그대와의 관계이며, 머리는 사회와 그대와의 관계이다.
가능한 것을 바라면 불가능한 것도 이루어지지만, 불가능한 것을 바라면 가능한 것조차 이루기 힘들다.
삶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적인 농담이다. 삶은 절대로 심각한 현상이 아니다. 삶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대는 삶을 놓칠 것이다. 삶은 오직 웃음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며, 도전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어떠한 믿음도,관념도 갖지 말라. 믿어야 할것이란 세상에 없다. 그렇다. "알아야"할건 많지만, 믿어야 할건 없다. 믿음이란 모두 두려움,공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되 세상에 소속되지 말라. 삶은 매 순간 미지의 길을 향해 나아간다. 그 길을 두려워한다면 삶은 정지해 버릴 것이다.
책임은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진실한 삶의 방법 중 하나이며 또한 위험한 방법이기도 하다.
세상을 정복하는 자가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을 정복하는 자이다.
사랑 속에서 그대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자신과 연결된다. 두 가지 모두 그대를 풍요롭게 한다. 사랑이 깊은 명상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피상적인 차원에 머물 것이다. 그 사랑은 친밀해지지 않으리라, 결코 깊어지지 않으리라, 그 사랑은 그대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고 오직 고통만을 줄 것이다. 결코 환희를 불러오지 못하리라. 사랑은 명상을 바탕으로 해야한다. 한편 사랑이 빠진 명상은 건조한 사막이자 황무지다. 그곳에서 꽃은 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 속에서 안식처를 찾지 않는 한, 거기 어떤 안식처도 없다.
소유욕은 그대가 존재계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단지 한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무소유는 근본적으로 존재계를 신뢰하는 것이다. 거기 소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전체가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최선을 다해 수행하라. 그리고 일단 그 역할이 끝나면, 그것이 성공했든 실패했든간에 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 또 다른 역할들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실패와 성공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대의 삶 전체가 이런 각성으로 가득해질 때, 그대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인이 될 것이다. 그대는 가면을 이용하지만 그것이 진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이 게임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사람만이 본연의 얼굴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알아야 할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다.
느낌과 이성이 균형을 이룰 때, 인간은 자유로워진다. 바로 그러한 균형 속에 자유와 평정과 고요와 침묵이 있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물을 긷든지 아니면 왕이나 대통령, 수상이 되어 왕좌에 앉든지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는 그대 자신일 뿐이다. 나무할 때 불행하다면 그대는 대통령이 된다 해도 불행할 것이다. 외면의 것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거지일 때도 행복할 수 있어야 황제가 돼서도 행복할 수 있는 법이다. 그 외에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변한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신뢰할 수 없다. 오늘 사랑은 거기에 있지만 내일 그것은 가버린다. 사랑은 신뢰보다 더 윤택하고 더 자연스럽지만 신뢰가 더 높은 특질이다.
진리에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적은 지식이 있는 사람이며 가장 커다란 친구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경험으로 살고, 그것을 어떤 말로도 표현하려 하지 말라. 말은 그대의 체험을 옹색하게 만든다. 애써 말로 표현하려 하지 말라. 부득히 해야 한다면 아주 신중하게 가려서 하라. 말 하나하나에는 각각의 뉘앙스가, 특질이 있다. 단 한마다의 말조차 수없이 곱씹어 생각하는 시인이 되어라.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즐거운 것은 무엇이든 하라. 그대에게 즐겁고 그대 주위의 사람들에게 즐거운 것을. 그대에게 노래를 가져다 주고 그대 주위에 찬양의 리듬을 만들어 주는 것을 하라. 이러한 삶을 나는 종교적인 삶이라 부른다. 거기에는 어떤 원칙도 없고 어떤 규율도 없으며 어떤 법률도 없다. 거기에 접근하는 데에는 오직 하나의 방법만이 있다. 그것은 지성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 즉,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또 사는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 거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현재 이 순간의 정수(精髓)를 마셔라. 현재 이 순간을 완전히 짜 내어라. 왜냐하면 그것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번 지나가면 그것은 영원히 지나간 것이다.
이 순간부터 그대 자신이 삶과 세계의 주체임을 자각하라. 이것이 곧 구도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구도는 자신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뜻이다.
만족의 가장 고요한 순간은 조건 없는 사랑을 줄 때 찾아 온다는 것을 알아차린 적이 있는가.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무것도 되돌려 받기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
진실로 아름다운 사람, 진실로 조화로운 사람은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만일 길에 바위가 놓여 있다 해도 그것을 거부하려고 하지 말라. 그것을 디딤돌로 사용하라
내가 그대에게 이르노니 세상에는 악이나 악의 힘 같은 것은 없다. 거기 오직 깨달은 사람과 쉽게 잠에 빠지는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잠은 어떤 힘도 없다. 모든 에너지는 깨달은 사람의 손안에 있다. 그리고 한 명의 깨달은 사람은 온 세상을 각성시킬 수 있다. 하나의 불켜진 촛불은 그 빛을 잃지 않고도 수백만개의 초에 불을 붙일 수 있다.
참사람은 마음놓고 웃고 또 울줄도 안다. 참사람은 행복해 할줄도 불행할 줄도 안다. 그의 불행,그 고통은 하나의 삶이다
죽음은 없다. 그것을 기억하라. 그러나 내 말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그것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죽음은 없다. 단지 생명이 있을 뿐이고 생명은 영원하다.
시인이란 오로지 실제와 시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 실체를 파악하는 사람이다. 사랑은 시인에게만 일어나고, 신은 시인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 아주 작은 일상의 삶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천진무구한 사람만이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은 삶의 아주 작은 부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 삶은 불안정하다. 이것은 삶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삶이 안정적이라 함은, 곧 그대가 그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나는 고타마 붓다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종교의 핵심적인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불교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는 세상에 전혀 다른 종류의 종교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종교아닌 종교를 제창했다. 그는 종교(religion)가 아니라 종교성(religiousness)을 제시했다. 이것은 인류의 의식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다.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그대가 불행할 때에도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것 또한 가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너무 많이 혼란되지 말라. 편안하게 남아 있으라. 마치 밤과 낮처럼, 기쁨의 순간도 있고 슬픔의 순간도 있다. 그것들을 자연이 갖는 이중성의 일부분으로, 그리고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라.
사람들은 명사의 세계를 창조하고는 그 속에 갇혀버렸다. 그리고는 나무와 강, 산들과 별들의 세계를 잊어버렸다. 신의 세계는 명사라는 것을 모른다. 단지 동사만을 알 뿐이다. 모든 것이 과정이다. 신은 어느 대상이 아니라, 진행 그 자체인 것이다.
붓다의 심리학은 마음 안에서 작업하지 않는다. 붓다의 심리학은 분석이나 종합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단순히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그래서 바깥으로부터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라봄이 곧 변형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내면에서 흘러넘칠 때 비로소 그대는 그것을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대가 자신을 사랑할 때만이 가능하다.
삶과 죽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삶이 곧 죽음이며, 죽음이 곧 삶이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대 없이도 성장할 것이다. 그대의 역할은 이미 성장하고 있는 것을 지지해 주며, 자양분을 주고, 도와주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지시를 하지 말며 이상(理想)들을 주지 말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말해주지 말라. 그들이 스스로의 경험으로 찾도록 하라.
희망의 덫에 걸려 들지 말라. 자신의 밖에서 구원의 손이 뻗칠 거라는 생각에 붙들리지 말라. 누구도 그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리니, 만족은 속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은 삶이다 신은 사랑이다 신은 바로 이 세상이다 삶이 흘러 넘치는 것 이것이 지복이다
나의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 죽고, 어떤 사람은 내일, 또 어떤 사람은 모레 죽는다. 근본적으로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조금 더 먼저 죽고 조금 더 나중에 죽을 뿐이다. 다시 말해 시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시간은 단지 삶이라는 환영을 만들어낼 뿐이다.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꿈에 불과하다. 진리를 구하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한 때라야 비로소 참된 삶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의 본질은 우정이다. 연인들은 관계가 순조로우면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안정되면, 만사가 고요해지고 그 모습이 우정을 닮아 간다. 우정은 사랑이라는 빵의 크림이다. 사랑의 정수(精髓)이다. 그러니 진정하라! 염려하지 말라.
사회와 자연이 충돌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항상 자연의 편에 서라. 언제나 승리할 것이다. 사회를 위해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는 하나의 조직에 불과하짐ㄴ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지 않은가.
삶의 진정한 여행에 있어서 그대 자신의 직각(直覺)이야말로 그대의 유일한 선생이다.
그대가 주변에 있을 때는 세상이 그대를 건드린다. 그러나 중심에 있을 때 그대는 세상을 초월할 것이다.
가슴은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현재만을 알 뿐이다. 가슴은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다.
명상은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사랑도 살 수 없고, 우정도 살 수 없으며, 감사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이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다.
만일 지성이 순수하게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가능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순수함에 반대한다면 그것은 단지 교활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성이 아니다.
인간은 아직까지 홀로있음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그는 항상 어떤 관계를 갈망하여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갈망한다.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든 그대가 홀로라는 것을 잊기 위해서이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으므로 해서 그대는 홀로 태어났고 홀로 죽을 것이며, 그대가 무엇을 하든 그대는 홀로 산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홀로 있음은 그대의 존재에 있어서 그토록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삶은 불안정하다, 이것은 삶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삶이 안정적이라 함은 곧 그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주어라, 보답으로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 때에 그것은 비즈니스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비즈니스가 아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대 자신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것이다. 판단하는 대신에 모든 불완전함과 나약함과 실수투성이인 그대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라. 그대 자신이 완벽해 지기를 요구하지 말라. 그것은 단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대는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결국 하나의 인간일 뿐이다.
바람과 비와 태양의 햇살을 두려워하지 말고 즐겨라.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성숙해지는 것은 그대가 날마다 새로운 것을 흡수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수용은 그대가 문을 열때 가능한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 즉 존재계는 아무 목적이 없으며, 존재계의 한 부분으로서 나도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대가 목적을 갖는 순간, 그대는 존재계로부터 그대 자신을 잘라 내는 것이 된다. 그때 작은 이슬방울은 바다와 대항해서 싸우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불필요한 싸움이며, 의미없는 투쟁이다.
사람들은 신에 대해 쓰면서 마치 신을 본 것처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각자가 쓰는 신의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논쟁을 그치지 않는다.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신에대해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논쟁이 오고 있다. 그러나 누구하나 그것이 가설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신을 본 자는 없다. 따라서 누가 나는 신을 보았다 나는 신을 안다. 해도 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는 자나 별반 다를 것 없는 헛된 것이다.
집을 찾는 사람들은 항상 절망에 빠지며 결국에는 이렇게 느낄 것이다. "우리는 속아 왔다. 삶이 우리를 속였다. 어쨋든 삶은 우리에게 집을 찾고자하는 욕망을 주었다. 그러나 거기 집은 결코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남편을 찾고, 아내를 찾고, 아이를 낳고..... 그는 가족을 만드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심리적인 집이다. 그는 건물이 아니라 거의 살아 있는 실체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종류의 생각은 그대에게 불행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느날 그대는 함께 살아온 남편이, 그리고 함께 살아온 아내가 낮선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50년을 함께 살고도 낯설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깊어졌다.
신발이 발에 꼭 맞을 때는 발의 존재를 잊는다.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을 때는 허리의 존재를 잊는다. 마음이 옳으면 모든 옳고 그름의 판단을 잊는다. 무리하지도 않고, 강요하지도 않으며,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유혹되지도 않는다. 그때 그대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그대는 자유인이다.
그대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니 우선 그대가 가능한 행복해져라. 그대는 단순히 행복해 하기만 하라. 그러면 그대의 행복이 그들에게 불해을 떨쳐 낼 용기를 줄 것이다. 그대의 행복이 그들에게 동기와 자극과 모험심을 줄 것이다. 그대의 행복이 그들에게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붓다처럼 장터 속으로 걸어가라. 세상에서 살라.... 세상은 그대를 풍요롭게 하리라. 관계는 그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관계는 거울과 같다. 그대는 다른 존재의 거울 속에서 그대의 얼굴을 본다.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보기란 매우 어렵다.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보기 위해 다른 사람, 즉 거울이 필요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눈보다 더 좋은 거울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존재계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다. 그런데 어떤 것도 되돌려줄 방법이 없다. 심지어 감사를 표현할 말조차도 없다.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모든 호흡이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도달한 것과 똑같은 의식의 에베레스트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이용되게 하는 것이다.
웃음은 종교의 근본이다. 심각성은 결코 종교적이 아니며, 종교적이 될 수도 없다. 심각성은 자신의 에고에서 나오는 것이며 병의 근원이다. 웃음은 에고가 사라진 상태다
작은 힘이라도 쓸 때 남들을, 모든 만물을 받들고 사랑함에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의 보잘 것 없는 머리로 남들의 삶을 간섭하고 방해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가 참으로 힘이 있다면 남들에게 농간 부리지 말고 창조적으로 쓰라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마음은 가슴의 하인이 되도록 훈련되어져야 하며 논리는 사랑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면 삶은 빛의 축제가 될 수 있다.
설령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해도 그대가 직접 부딪혀서 얻은 것이 아니면 믿지 말라. "나는 스스로 볼 것이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직접 대면할 수 있다."
쾌락과 행복의 차이는 그것이 기분전환이 아니라 풍요함이라는 데 있다
명상에서 오는 힘은 힘으로 오지 않는다. 그대 위에 내리는 꽃과 같이 향기로 온다. 사랑으로 오고, 자비로 온다. 그 힘은 삶의 모든 위대한 특징과 가치가 피어나게 한다. 그 힘은 의식의 봄이다. 모든 것이 갑자기 푸르게 변한다. 모든 것이 시원해진다. 산들바람이 향기로 가득해진다. 그대가 보이지 않는 꽃ㅇ로 활짝 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열린 사람들은 분명 그 힘을 느끼리라. 그들은 그 힘의 노래를 느낄 것이다. 그 힘의 춤을 느낄 것이다.

 

 - OSH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