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윌 헌팅] 성장의 묘약, "네 잘못이 아니야!"
성장의 묘약, “네 잘못이 아니야!”
Lillith_20141031
(매그놀리아는 어떤 삶을 매만지는 영화일까. 굿윌헌팅과 아바타는 봤는데... 영화를 볼 때마다 내 생을 반추하게 되고 내 환경에 대해 이해하게 되어 고등학생 이후 꾸준히 영화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 보며 가을 철들기에 몰입하고 싶은 요즘, 해결해야 할 일이 쌓여있어서 철들기는 뒷전이다, 이 참 안타까운 나날들.)
친구의 죽음에 이어 사회적 지도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던 2009년과 이후 3년은 내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기간이었다. 이생을 이미 버린 것만 같았던 그 때를 지나서 제5막 인생을 시작한 최근에 나는 종종 다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병들고 늙어가는 엄마를 보며, 얼음장같은 모녀관계를 풀지못하고 말면 어쩌나 겁났던, 숙제처럼 느껴졌던 엄마와의 관계.
20세기 한국의 막막한 시대적 위협 속에서 여성으로 살아야했던 내 어머니로부터, 나는 '엄마가 나에게만 너무 차갑다'고 원망해왔다. 늦게서야 내 자신의 마음에 대해 공부하면서 엄마와 이별하기 전에 선업을 맺고싶어 버둥거려도 쉽지 않았다. 엄마도 나도 하루하루 늙어가는데...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로는 풀지 못하던 숙제를 제3자가 술술 풀어주는 사건이 얼마 전에 일어났다. 엄마는 천안으로 출발하는 나를 보며 늘 그렇듯 따뜻하게 손 한 번 잡아주는 일 없이 서있기만 했지만, 늘 서성거리고 틈이 없었던 엄마가 아니라 벽도 울타리도 없는 무방비 상태로 서있었다. 내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었다. 엄마를 안았다. 엄마는 그저 서 있기만 하는, 아쉬운 포옹이었지만, 놀라운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드린다. 지난 날들은, 내 잘못도 아니고 엄마 잘못도 아니다.
김준기 작가가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에서 영화 '굿 윌 헌팅'을 언급했다. 트라우마 치료를 막는 의심과 경계의 벽에서, 고립된 피해자와 치료자 사이의 전이/역전이/갈등. 그러나 그들의 내면과 내면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치료했다며,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외침에 주목한 것처럼.
나는 그간 내 인생이, 온통 생존의 위협에서 살아남기 식의 서바이벌이라고 느껴왔다. 그렇게 참 많이도 헤매다 낡을대로 낡아버린 나. 에릭 호피가 ‘지금 나와 다른 내가 되고 싶다면 지금의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윌 헌팅은 상담치료를 받으며 자기 상처를 바라보게 된다. 나도 타인에게서 알 수 없는 불편함이나 갈등을 느낄 때, '날 해치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상기하고 ‘이 새로운 관계의 이슈’를 바라보고 싶다.
Good will hunting(1997, 구스 반 산트 감독). 눈물 펑펑 흘리며 숀과 윌의 만남을 부러워했던 지난 어느 날. 이 영화를 봤던 그 당시만 해도 인생에 중요한 사람을 이생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경우, 이를 받아들이기란 절대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숀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를 하고 있던 청년 윌을 사랑하면서 아내의 죽음에 관한 벽을 뛰어넘는다. 윌도 부모로부터 얻은 상처로 인해 자기자신(self)을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숀에게서 서서히 자기 존재의 이유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유리처럼 깨질듯 한 자아로 퇴화된 윌은 숀과 함께 두꺼운 상처 껍데기를 뚫고 성장한다. 아무리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다 해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알아봐 주고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가능하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천재적인지 알아주는 친구나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아우성치다 저세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내 어머니를 평생 괴롭혔던 아버지도 타고난 재주를 부리지 못하자 그 고통을 아내에게 퍼붓다가 가셨다. 그런데 몸의 학교 친구들은 우리의 천재성을 키워주려는, 그것을 볼 수 있는 스승들을 만났기 때문에 자기실현의 전망이 좋은 것으로 보인다. Good lill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