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리스트 카터]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아름드리미디어
331. 위험한 고비
인디언은 절대 취미 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동물을 잡는다. 즐기기 위해서 살생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할아버지는 분개하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그 모든 것들이 정치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끝나면 사람을 죽이러 갈 수 없으니까 그동안 살인하는 방법을 잊지 않기 위해 동물을 상대로 그 짓을 하게 하는 것이다.
383. 산꼭대기에서의 하룻밤
저 위대한 붉은 독수리와 빌 훼더포드, 맥길버리 황제, 매킨토시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그들은 인디언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을 자연에 내맡겼다. 자연을 정복하거나 이용하려들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인디언이라고 생가하길 좋아했고, 그 마음은 갈수록 커져서 마침내는 자신들을 백인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429. 윌로 존
해는 아침 시간을 늘리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위로 올라가지 않고 도로 옆걸음질하더니 산등성이에 눌러앉아버렸다. 할아버지는 해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일이 가끔 있다, 특히 오후 늦게 밭일을 끝내고 한시바삐 냇가에서 몸을 씻고 싶다는 생각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는 더 그렇다고 하셨다. 또 할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일엔가에 몰두해서 해가 아무리 더디게 움직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면, 해도 게으름 피우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471. 교회 다니기
할아버지는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목사란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여서, 천당으로 들어가는 문의 손잡이를 자신이 쥐고 있고,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도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걸로 생각하고 있다. 할아버지는 목사들이 신조차도 그 결정에는 참견할 수 없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남에게 무언가를 그냥 주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훨씬 좋은 일이다, 받는 사람이 제 힘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면 앞으로는 필요할 때마다 만들면 되지만, 뭔가를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삶은 평생동안 남이 주는 것을 받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지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인격이 없어지고 자신의 인격을 도둑질당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도리어 불친절한 것이 되고 만다고 하셨다.
529. 산을 내려가다
그해의 마지막 나비 한 마리가 골짜기로 날아왔다. 나비는 우리가 옥수수를 따낸 옥수숫대 위에 앉았다. 그놈은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은 먹이를 모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나비는 죽어가고 있었다. 나비 슷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놈이 보통 인간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비는 다가오는 죽음을 놓고 안달하지 않았다. 나비는 자신이 할 바를 다했으니 이제 죽는 것만이 자신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옷수숫대 위에 앉아 태양의 마지막 온기를 쬐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557. 산을 내려가다
“작은 나무야, 늑대별 알지? 저녁에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보이는
별 말이다.“ 내가 안다고 하자, 할머니가 당부하셨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저녁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꼭 그 별을 쳐다보도록 해라, 할아버지와 나도 그 별을 볼 테니까, 잊어버리지 마라.“
591. 늑대별
나는 수사슴이 암사슴의 엉덩이 위로 뛰어오른 걸 보면 그들이 짝짓기하는 중인 게 틀림없다, 게다가 주위의 풀이나 나무 모습들을 보더라도 그때가 사슴들이 찍짓기하는 철이란 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중략) 한두 걸음 뒤로 비실비실 물러서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한 그 여자가 갑자기 내 쪽으로 달려왔다. 그 여자는 내 멱살을 움텨쥐더니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 여자는 얼굴을 벌겋게 붉히면서 고함을 질렀다. “진작에 알았어야 하는데......우리 모두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이, 이렇게 추잡스럽다니......이 사생아 녀석아!”
593. 늑대별
목사가 책상 뒤에서 굵직한 막대기 하나를 집어들었다. “너는 악의 씨를 받아서 태어났어. 그러니 애초에 너한테 회개 같은 게 통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너의 사악함이 다른 기독교도들을 물들이지 못하도록 가르쳐줄 수는 있지. 회개하지는 못하겠지만...... 울게 만들 수는 있지!”
629. 집으로 돌아오다
몸의 마음만을 가진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 역시 몸의 마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고 이해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연은 나에게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고, 내 출생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으며, 악의 씨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자연은 그런 말들이 만들어내는 기운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있노라니 나도 금방 그런 말들을 잊을 수 있었다.
637. 죽음의 노래
때로는 혹독한 겨울도 필요하다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정리하고 보다 튼튼히 자라게 하는 자연의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얼음은 약한 나뭇가지만을 골라서 꺾어버리기 때문에 강한 가지들만이 겨울을 이기고 살아남게 된다. 또 겨울은 알차지 못한 도토리와 밤, 호두 따위들을 쓸어버려 산속에 더 크고 좋은 열매들이 자랄 기회를 제공해준다.
653. 죽음의 노래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모카신을 약간 끌듯이 하며 걸으셨다. 나도 되도록 많은 위스키 병을 내 자루 속에 넣고 짊어지려 했으며, 힘든 일도 더 많이 떠맡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그런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도끼 사용법을 가르쳐주셨다. 활 모양을 그리듯이 해서 내리치니 통나무를 쉽고 빠르게 쪼갤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옥수수를 할아버지보다 더 많이 땄다. 할아버지가 따기 쉬운 것은 일부러 남겨두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 늙다리 링거에 대해서 할아버지가 “자신이 여전히 가치 있는 존재라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