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작품을 상영하는 18회 서울인권영화제 첫째 날(23일)에 연이어 상영한 두 편의 영화 <가면놀이>와 <잔인한 나의, 홈>은 한 가지 소재를 다룬 영화이다. 두 영화를 관람한 후, 50분간 광장 토크를 진행하며 공통 소재인 ‘친족성폭력’ 문제에 대해 관람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안타깝게도 성폭력은 우리 사회에서 익숙한(?) 사건이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아동들 절반은 친족성폭력 피해자라는 것이 아직 ‘너무 낯선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어루만져주지 않는 상처를 매만져주고 치유해주기 위해 함께 힘을 내는 엄마들이 있다, 극히 소수지만! 그들은 '가족의 힘'이라는 힘찬 조직이 되었다.
아오리 감독은 예전에 어떤 영화제에서 '감독과의 대화' 후에 다가온 "한 여성(돌고래)으로부터 놀랍고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여성은 오랫동안 성교육을 받아오던 중 도서관에서 『난 싫다고 말해요』라는 책을 읽고서야 자신이 아빠에게 성폭력을 당해왔음을 깨달았다"는 것. 그러나 "가족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가해자는 시치미를 뗄 뿐 아니라 오리발을 내밀기까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친족성폭력 피해여성 ‘돌고래’는 가출 후 쉼터에서 지내며 2년 간 다큐 출연을 자임할 뿐 아니라 아빠를 신고하고 고소했다. 엄마는 갈등관계가 되어 서로 다르게 주장하는 가족들 중 남편을 택하고 딸의 주장은 의심하거나 묵살했다. 2012년 7월 26일 상고가 기각된 3심에서야 비로소 ‘그 새끼(피해자 측 호칭)’는 대구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보호자를 잃은 여동생들에게 언니는 여전히 냉대를 당하고 있다.
친밀한 여성 혹은 집안 여성들을 자기 배설구로 취급해온 남성들의 욕망. 그 욕망은 이 사회의 오랜 파괴범이었으나 아내들의 모성에 보호받으며 딸들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철저히 비밀이 강요되었고 처벌은 피해갔다. 피해자 ‘돌고래’는 대법원 판결 즉시 구속된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남겨진 ‘아내’, 그러니까 자기 ‘엄마’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엄마, 어떡해요……”
영화가 상영된 순간, 엄마를 향했던 돌고래의 한탄은 우리 사회를 겨낭한다. 가부장제도에 지배당하고 억압당했던 우리 사회, 피해자를 품어줘야 할 이 ‘사회는 이제 어떡할 것’인가.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성문화를 우리가 언제까지 용인할 것인가. 낯설지만 오래된 범죄인 ‘친족성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옹호하고 약자인 여성 가족들이 연대하도록 지지하는 것이 사회가 따뜻한 품이 되는 길일텐데, 구체적으로 우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성폭력 피해자가 불편하고 두려운 삶을 헤쳐 나가려면 사회안전망의 보호가 절실하다. 피해자의 엄마가 진실에 직면하기를 회피하고 부정하면 그 딸은 가출해서 몸을 팔아야 겨우 살 수 있는 게 우리 사회 수준이다. “아빠가 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피해여성이 말해도, 친족 성폭력 가해자는 최고 7년형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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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크 인 플라자-익숙한, 그러나 너무나 낯선 '성폭력' (왼쪽부터 토리(상담가), 아오리(영화감독), 문정현(영화감독), 레고(상근활동가), 황선희(수화통역 자원활동가) (사진/김난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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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래 가족들은 모두 등을 돌렸지만, 싸울 수 있는 힘을 끌어내주는 지지자 집단을 만났기 때문에 진실이 밝혀졌다. 피해자들 옆에 있는 사람들이 조력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도 시급하다.”고 의견을 밝힌 성폭력 상담가 ‘토리’는, 이제 “성폭력범죄 인지자의 역할”에 대한 교육용 매뉴얼을 만들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문정현 감독은 “사실을 목도했을 때 침묵하지 않고 증언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의 현실을 이제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18회 서울인권영화제에 상영할 작품을 완성한 것은, 문 감독이 친족성폭력을 사실대로 바라보고자 용기를 낸 결과인 셈이다.
성폭력 가해자 지원업무를 맡고 있는 경찰(여, 울산)도 영화를 관람한 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고민을 말하며 조언을 구했다. 이 업무를 맡는 경찰관들이 2차 가해를 일삼지 않도록 교육하기 위한 10분짜리 동영상을 제작하는 중인데, 초점을 어디에 맞추면 좋을지 물었다.
상담가 토리는 “아동에 대해서는 친족성폭력이 가장 많은데 검찰과 경찰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피해를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보호를 잘 받으리라는 통념을 깨야 한다”고 했다. 문정현 감독은 “수사 현장에서 경관들의 부당한 행위들을 수집해서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아오리 감독은 “아버지를 고소한 중학생이 극심한 불안증세를 보이지 않을 경우, 경찰이 ‘피해자 같지 않다’고 보고하고 증언해서 무죄가 되었다”며 피해자의 심리정서 상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태도가 변할 필요성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친족성폭력 가해자는 한 여성의 삶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통째로 파괴한다. 그러나 피해 가족을 편들어주는 가족들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낸다. 도저히 살 수가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지만 피해자를 위해 힘을 내면, 그 힘은 왜곡되고 포기했던 ‘자기’에 대해 희망이 되고 자아정체감마저 회복시키는가 보다.
벌은 가해자가 받는 것일 뿐, 피해자가 얻고 싶은 건,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네 잘못이 아니야. 넌 이제 괜찮아"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닌 사건으로 인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친족성폭력 피해자는 가족 누군가에 의해 "너랑 나랑 죽을 때까지 비밀이야"라는 말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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