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합★체
저자
1985년 출생.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를 졸업했다. 세계고전이나 추리소설, 만화책을 좋아한다. 하지만 소설가를 꿈꾼 적은 없다. 그래서 아직 소설이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른다. 모르면서도 뭔가를 쓰긴 쓴다. 두 번째 이야기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난쟁이 쌍둥이 형제의 코믹무협 열혈성장분투기『합체』.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난쟁이' 아버지를 둔 키 작은 쌍둥이 형제의 성장에 대한 열망을 그려낸다. 사회의 약자로 살아가면서도 세상에 대한 따뜻한 긍정을 잃지 않는 아버지, 정반대 성격을 지닌 쌍둥이 형제, 그들을 오직 사랑으로 감싸 안는 어머니, 엉뚱하면서도 희화적인 언행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적 가치를 일깨워 주는 계도사 등 개성 강한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모습들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45.
깃발을 든 청년, 베레모를 쓴 아이들. 군중들은 한 남자의 얼굴이 박힌 사진을 십자가처럼 떠받들며 파도 치듯 앞으로 보내고 있었다. 체는 텔레비전 앞에 바짝 다가가 그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별이 새겨진 모자와 깊은 눈동자, 헝클어진 머리,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리포터가 인파 중의 한 명을 붙잡고 인터뷰를 시도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체 게바라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레모를 쓴 남자가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체 게바라는 혁명 그 자체입니다. 이 세상은 아직도 부조리투성이에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미 제국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를 좀먹고 있습니다. 다 뒤집어야 합니다. 형제들, 혁명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현실에 이대로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체는 아직도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체 만세, 만세, 만세.”
49.
사회 선생은 부러진 분필로 칠판에 한 자 한 자 써 나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별을 새하얗게 칠했다.
C H E ★
한바탕 연설을 마친 사회 선생은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다시 교과서를 펼쳐 들었다. 그때였다.
“빨갱이.”
사회 선생은 교과서를 내려놓고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누구죠?”
아이들도 웅성거리며 목소리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방금 누가 그런 거죠?”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는데 체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목소리를 교실의 정적을 깨뜨릴 정도로 날카로웠는데 손은 쭈뼛쭈뼛 반도 들지 못했다. 사회 선생은 손을 든 아이 쪽으로 천천히 걸어와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며 이야기했다.
“박명호. 명호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요?”
박명호는 사회 선생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혁명이니 데모니 그런 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했어요.”
멀리 있는 사람은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사회 선생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명호를 오해하게 한 것 같네요. 혁명을 꼭 정치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역사에 남는 혁명은 주로 정치와 관련된 것이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환경을 위해 분리 수거에 앞장서는 것도 혁명이고, 고생하시는 부모님 생가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혁명이고, 친구와 싸운 후 먼저 사과를 하는 것도 혁명입니다. 저는 꿈을 가진 사람이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혁명은 빨간 머리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붉은 피가 만들어지는 바로 여기, 여기에 있습니다.”
사회 선생은 주먹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툭툭, 쳤다.
70.
"그러나 합, 체야. 좋은 공이 가져야 할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바로 공의 탄력도란다.“
“탄력도? 그게 뭔데요?”
“아직 학교에서 거기까지는 안 배웠나 보구나. 공의 탄력도란 말이지. 땅에 떨어져도 다시 튀어 오르는, 그러니까 실수로 잘못 쏜 공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그대로 깨지지 않고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을 말한단다.‘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이요?”
“그래, 그래서 쇠공이나 유리공 같은 건 아무리 강하고 예뻐도 절대 좋은 공이 될 수 없는 거지. 계네들은 쏘기도 어렵지만 일단 쏴도 다시 튀어 오르지 않고 땅에 박히거나 깨져 버리니까. 벽에 부딪혀도 거기서 더 힘을 얻어 다시 힘차게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인 탄력도, 이게 좋은 공이 가져야 할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거란다. 합, 체, 아버지 말이 이해가 가느냐?”
88.
너는 그냥 작은 공이 아니라 존나 작은 공을 쏴야겠다. 안그랬다간 떨어지는 공에 맞아 죽기라도 하면......(중략)
그러게 왜 하필이면 작은 공이야, 작은 공이. 난쟁이라고 작은 공만 쏘라는 법 있어? 난쟁이는 큰 공 좀 쏘아 올리면 안 돼?
94.
“도사님, 전 죽어서 별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해도 별 같은 건 되고 싶지 않아요.”
“이유가 무엇이냐?”
“너무 작잖아요. 전 작은 건 싫어요. 다시 태어나면 큰 걸로 태어나고 싶어요. 산이나, 바다나, 그런 것들이요.”
“모르는 소리. 실상 별에 비하면 산이나 바다는 티끌만도 못한 것을.”
“그래도 보기에는 작잖아요. 여기서 보면 손톱만도 못한데 실제로 큰 게 무슨 소용이에요. 보이는 게 가장 중요한데......”
노인이 흐음, 하며 지그시 눈을 감더니 체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작은 걸 싫어하느냐?”
체는 그 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도사님, 작은 건요....... 불쌍한 거예요. 초라하고요, 무시당하고요, 밟히고, 깨져서 결국 죽는 거예요.”
“......”
노인은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던 체는 개미 한 마리가 신발 끄트머리를 넘어 가기 위해 인간힘을 쓰는 것을 보았다. 체는 가만히 개미를 집어 올려 바위 가까이에 놓으며 말했다.
“이것 보세요. 개미는 이렇게 작으니까, 제가 당장이라도 발바닥으로 비벼서 죽일 수도 있잖아요. 진짜 불쌍한 인생 아니에요?”
체는 개미 옆을 발바닥으로 세게 비볐다. 개미는 갑자기 움직이는 물체에 어쩔 줄 모르며 신발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노인이 말했다.
“비록 니가 그 개미 한 마리를 당장 죽일 수는 있다고 하나, 개미 세계 전체를 무너뜨릴 수는 없지 않느냐. 오히려 이 개미의 죽음이 전해지고 전해지면 개미들은 더 강한 방어 체계를 만들 것이고 더 힘을 기를 것이다. 멀리 보면 그렇게 해서 개미들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체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아는 사람은......죽으면 그냥 끝이던데요.”
168.
“야, 넌 진짜 지겹지도 앉냐?”
합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건성으로 되물었다.
“뭐가?”
“어떻게 기계처럼 하루 종일 공부만 하냐?”
“기계는 무슨, 하면 할수록 재밌는 게 공부야. 니가 안 해서 그렇지.”
“뭐가 그렇게 재밌는데?”
“내가 노력한 만큼 그대로 돌아오잖아. 세상에 공부만큼 정직한 것도 없어.”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얘기하네.”
“그리고 뭣보다도 공부가 내 생존 수단이거든.”
“거창하네.”
“거창한 게 아냐. 사자한테 안 먹히려고 죽을 듯이 뛰는 가젤 본 적 있지? 사자 같은 이빨이 없으니까 대신에 그렇게 달리기라도 하잖아. 인간도 마찬가지야. 가젤의 다리처럼 각자 생존 수단 한 가지씩은 만들어야 한다고.”
“안 만들면 어떻게 되는데?”
“잡아먹히는 거지.”
“누구한테? 사자?”
“바보 같긴, 사자가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
263.
한 손으로 잡기에는 불편하고 두 손으로 잡을 때 꼭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순간, 아버지가 오래 전에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이 정도? 너무 커서도, 너무 작아서도 안 돼. 두 손에 딱 잡힐 만큼의 크기, 그게 좋은 공이지. 물론 어깨는 조금 많이 벌려도 좋아. 하지만 자기 두 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이거나 아니면 두 손을 쓸 필요도 없이 한 손에 움큼 들어오는 공은 그다지 좋은 공이 아니란다.
체는 농구공을 들고 공중으로 풀쩍 뛰어올랐다. 공은 무겁고 귀찮은 느낌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그런 존재감을 더 살아나게 해 주었다.
......무게도 마찬가지야. 너무 무거워서도, 너무 가벼워서도 안 돼. 공을 들었을 때 내가 이 공을 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이상적인 무게지. 그 공을 드느라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면 절대 좋은 공이라 할 수 없고, 또 반대로 공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그래서 잃어버려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공이라면 그것 역시 안 좋은 공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