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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애] 내가 만난 동화

실다이 2011. 10. 8. 18:23

 

대전일보 >오피니언 > 외부기고 > 특별기고   편집 2011-10-07
2011-10-08 15면기사
[릴레이에세이]내가 만난 동화
동화작가 소중애


태어나기를 초등학교 교장 관사에서 태어났다. 학교 울타리 속에서 자라 배우는 학생이 됐다. 공부 끝에 이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으니 여전히 내 인생은 학교 울타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2년 전, 퇴직하고 동화만 쓰리라 결심했다. 결심은 했으나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간다는 두려움이 컸다. 그 두려움 중 하나가 아침을 먹으면 어디론가 갔던 수십 년 된 오랜 습관을 어찌 할 것인가 였다. 궁리 끝에 작은 산 아래 작업실을 마련했다.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 2일.

학교에 가지 않으면 굉장히 이상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밖에는 마침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단숨에 산꼭대기에 뛰어 올라가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소리에 놀란 산새가 푸드득 거렸다. 눈 위에 찍힌 산토끼와 고라니 발자국을 따라 뛰어 다녔다. 동화 속이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속에서도 나는 행복했다.

학교와 관련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평일, 벌건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차도 안 막히고 영화관 매표소에서 줄 서 기다리지도 않았다. 음식점이나 관공서도 한가하니 친절하게 안내를 받아 기막히게 좋았다.

학교 울타리 밖에도 이렇게 즐거운 세상이 있었구나. 학교 안에만 동화가 있는 줄 알았더니 밖에도 있구나. 세상도 동화 속이었다.

그런데 진짜 동화는 따로 있었다.

작업실 동네 이장님은 칠십 쪽으로 기울어진 나이인데 동네 일을 자기 일처럼 걱정하고 해결해 주는 부지런한 분이다. 시골 살림에 서툰 내게는 더욱 고마운 분이기도 하다. 호랑이 새끼 칠 것처럼 자란 풀도 깎아 주시고 장작도 날라 주셨다. 힘 쓰는 일에는 속수무책인 나는 이장님에게 많은 것을 의지했다.

이장님은 일을 하러 올 때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와 여름에는 그늘에 앉혀 드리고 쌀쌀한 날씨에는 양지에 앉혀 드렸다. 돗자리에 입맛 다실 주전부리를 놔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장님은 일을 하면서 간간이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천진한 아이처럼 웃었다.

‘참 효자시구나.’

혼자 생각했는데 이장님과 할머니는 모자지간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운전기사가 세 명이나 있었던 부잣집에서 태어났단다. 커서도 부잣집으로 시집와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마나님으로 사셨다. 세월이 지나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재산과 함께 자식들도 곁을 떠났다. 부잣집 마나님은 가난한 할머니가 되고 말았다. 먹을 식량이 떨어지고 난방할 나무가 없었다. 할머니가 딱해 나무를 해다 주던 이장님이 (그때는 이장님이 아니었다) 말했다.

“할머니 저희 집에 오셔서 저 밥도 해 주고 빨래도 해 주시고 같이 사십시다. ”

이렇게 혼자 살던 이장님과 할머니가 살림을 합쳤다. 외로운 사람들끼리 의지하며 살게 되니 좋은 일도 많이 생겼다. 이장님의 집은 안팎으로 깨끗해지고 사람 사는 훈기가 돌았다. 마을 아줌마들이 놀러와 집안이 시끌뻑적지근하기도 했다.

이장님은 하루 세 끼 뜨거운 밥을 먹고 입성도 깔끔해져서 새 장가를 가야겠다는 농담을 듣게 됐다. 이렇게 변한 이장님에 대해 할머니도 자부심이 컸다. 후에 이장님이 되자 은근히 자랑도 했다.

“이장? 나 아니었으면 이장도 못 됐어 !”

일 년 쯤 지난 어느 날.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 할 할머니가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이장님이 발견했다.

“어디 편찮으세요? ”

물었으나 이장님도 못 알아 봤다. 치매가 온 것이다. 사람도 못 알아보고 말도 제대로 못했다. 그러니 어찌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겠는가? 이때부터 이장님은 할머니를 봉양하게 됐다. 하루 세 끼 뜨거운 밥을 해 드리고 빨래도 자주 해 드려 전처럼 깔끔한 모습으로 지내도록 했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니 드나들던 사람들 발길이 끊겼다.

“나 일 나가면 할머니 혼자만 계세요. 혼자만 계시면 점점 더 병이 심해질 것 같아서 일할 때 모시고 다니지요. ”

이장님은 당연하게 말했다. 할머니도 이장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황금 실처럼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일하는 이장님과 그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내가 퇴직한 후에 만난 가장 감동적인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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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daejonilbo.com/news/newsitem.asp?pk_no=973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