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보명] 대학의 몰락_동연출판사
의도된 외화내빈…대학은 죽었다 | |
대학의 몰락 서보명 지음/동연·1만2000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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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포섭당한 한국 대학들
구조조정·경쟁력 강화 허울뿐
본디 교육은 사적 영역의 일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미국 연방정부에 교육부가 설치된 건 1867년이었으나 반대여론 때문에 1년도 안 돼 문을 닫았다. 교육부가 부활돼 자리를 잡은 건 1981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권이 집권한 뒤였다. 이후 미국 교육부는 일제고사를 통해 학교들을 서열화하고, 평가산업을 확산시키고, 경쟁을 제도화하는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추진을 도맡아 하는 강력한 부서가 됐다. 영국 마거릿 대처의 이른바 대처리즘과 더불어 앵글로색슨식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이끈 레이거노믹스의 ‘보수주의 혁명’이 절정에 달했던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의 우열순위 매기기, 곧 대학 평가 및 서열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때 <타임>이나 <뉴스위크>보다 보수적이고 판매부수도 적었던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가 미국 대학 및 학과별 순위를 보도하면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지금은 온라인 전용으로 변신하고 있는 이 잡지가 대학 순위를 발표하면 접속자들이 사흘 안에 1000만 페이지 뷰를 기록하는데, 이는 평소의 한 달 평균 50만 페이지뷰에 비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 한국 유력 일간지들이 대학 순위 매기기로 큰 재미를 보기 시작한 것도 1997년 말 이른바 아이엠에프 사태(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미국 월스트리트 금융제국의 신자유주의 그물망에 완전히 포섭당하면서다.
198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재미동포 1.5세 서보명 미국 시카고 신학교 교수(신학·철학)가 쓴 <대학의 몰락>은 레이건 시대의 이런 대학 순위 매기기를 “비판의 공간이었던 대학을 죽이려고 의도적으로 만든 현상”으로 파악한다. “1980년대 레이건의 등장은 1960년대 반전, 학생, 히피, 민권 운동 등으로 대변되는 좌파세력에게 문화적으로 밀렸고, 그 때문에 베트남 전쟁에 졌다고 생각하는 보수파들이 결국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으로 무장해 세력 확장에 성공한 것이었다. 80년대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대학을 몰입시키려는 노력은 60년대 좌파운동의 본산지였고 당시에도 좌파 지식인들의 피난처였던 대학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미국의 대학들은 철저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경쟁 구도라는 덫에 갇히게 된다.
기업과 자본의 논리로 세계를 평정하려는 자본주의 철학과 비판적 기능을 없애려는 정치적 판단을 앞세운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이 제국주의 식민지배로도 이루지 못한 전지구적 자본주의 완성의 마지막 방해요소인 대학을 길들여 하부조직으로 편입하기 위한 비책. 그것은 철저한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도입이었고 그 핵심이 대학 평가와 서열화였다. 그것은 결국 돈의 경쟁이고 자산 불리기 경쟁이다. 대학은 이제 교수와 학생이 주체가 되고 그들 사이에 지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는 비판적 배움과 진리 추구의 공동체가 아니라 피고용 생산관리직인 교수와 교육소비자인 학생, 상품화된 지식을 연결하는 기업형 행정관리체제로 변했다. 대학은 이제 획일화된 품질관리체제와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며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해야 하는 이윤 산출의 공간이지 현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문화 창조와 인간적 가치를 논하는 공간이 더는 아니게 됐다. 이게 대학 위기, 몰락의 원인이자 결과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로 대표되는 정치적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이 대권을 장악했던 아들 부시 정권 때 절정의 위세를 떨쳤던 미국 공화당 보수혁명의 전략을 가장 그럴듯하게 모방한 것은 건국 반세기 만의 정권교체로 권력을 잃고 금단증세 속에 허우적거리던 한국 ‘보수’세력이었다. 그들 자신이 아이엠에프 사태를 초래한 장본인이면서, 엉뚱하게도 일본 장기불황을 수식하는 ‘잃어버린 10년’을 차용해온 한국 보수세력은 생뚱맞게 ‘좌파정권 타도’를 외치며 정권탈환에 성공했다. 그러고는 앞선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조차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면서 대학과 싱크탱크 등 지식인 사회의 비판세력을 ‘숙청’하는 대대적인 보복을 감행했다.
대학들이 경쟁력을 키우지 않아서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대학이 산업과 기업, 곧 수요자들이 원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대학교수들이 종신직을 얻거나 직급이 오르면 놀기만 하므로 종신직을 없애든지 연구평가와 성과 기준을 대폭 높여야 한다, 정부지원을 줄이고 산학협동을 강화해야 한다 등 1980년대 이래 대학을 향한 미국 사회의 비판은 한국에 그대로 복제됐다. 대학의 몰락과 체제내화는 재정적으로 더 취약하고 정부 통제를 더 많이 받는 한국 대학들 쪽에서 더 극적으로 진행됐다. 하버드와 예일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기금 모금과 금융자산 불리기에 목을 매듯, 한국의 대학들은 등록금을 마구 올리면서 캠퍼스 꾸미기와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영어강의를 세일즈 포인트로 내세웠다. 온갖 상품과 광고, 10대 가수들의 노래 등 대중문화에서 대학 교육까지 한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영어광풍은 지난 식민지시대 제국의 도구였던 언어 통제 차원을 넘어섰다. 이제 영어는 자발적 수용을 통한 내면화로 자본 세계화의 또다른 통로가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영어가 경쟁력의 척도가 아니라 억압과 지배의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대학을 살릴 것이라는 보수매체들의 줄기찬 노래를 경계하라.
얼마 전 한국의 대학에 방문교수로 와 있던 서보명 교수는 이런 현실을 목도하고 충격을 받았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 체제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시대정신을 비판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대학은 그동안 최소한 형식적으로나마 자본주의 질서를 비판하고 그것에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사정없이 자본주의 세계화의 펀치를 맞고 있었다. …대학의 구조조정, 경쟁력 강화, 교육시장 개방 등의 일방적인 논의가 언론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그 흐름에 반대하는 이들은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으로 견제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학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학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서 교수가 <대학의 몰락>을 쓴 이유다.
대학의 현실과 그 역사를 짚어보고 칸트, 하이데거, 리오타르, 데리다, 블룸, 매킨타이어, 레비나스 등 철학자들의 대학론과 학문론까지 살핀다. ‘김예슬 선언’까지 낳은 ‘자본에 함몰된’ 한국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위기구조를 명료하게 드러내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시의적절한 통찰이 담겼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