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봉]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위하여
2009.1.20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 이수봉
1. 들어가며
구정연휴 전날 영등포역에서 시민을 상대로 이명박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홍보활동을 펼친 적이 있다. 그날따라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려하지 않았다. 홍보물을 내미는 손이 미안할 정도로 반응은 썰렁했다. 단지 추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시민들은 어찌됐든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새삼 피곤하게 유인물을 받아들 만한 수고를 감수할 기분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시장상인들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주로 손님들이 없어 무료하게 앉아있는 상인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시장상인들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절망’이었다. 예를 들자면 한달 임대료는 150만원이 넘는다. 그러나 매출액은 말하기도 창피한 수준이다. 결국 매달 적자로 운영되고 있다. 세금은 또 꼬박꼬박 내어야하고 이런 사정을 공무원들에게 말하면 그럼 그만두지 왜하느냐고 한다. 오로지 경기가 좋아지기만을 기다릴 뿐인데 내가 안타깝게도 지금 사람들은 다 비정규직화되어서 주머니에 돈도 없고 또 향후 경기가 전처럼 몇%씩 성장할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하니 한숨만 내쉰다. 용산철거민 참변이 있은 후라 이곳도 강제철거는 쉽지 않겠지만 철거하기도 전에 망해나가겠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다. 노동자들의 절반이상이 비정규직이 되면서 주머니에 돈이 없다. 정규직도 실질임금 삭감으로 절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제 소비가 늘어날 가망이 없다. 영세상인들의 대다수는 적자운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들의 희망은 오로지 경기가 좀 풀리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언제될지 모른다. 노동시장은 이미 고용이 더 늘어날 수 없는 구조이고 있다고 해봐야 비정규직같은 저임금직종들 뿐이다.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고 노후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아니 당장 먹고사는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특히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게 세계적 현상이라고 하니 대통령이 아니라 그 할아버지가 온들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상인들이 말하는 현실이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상태를 굳이 덧부칠 필요가 있을까? 중소기업하청업체 그리고 잘나간다는 대기업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미 공단의 절반이상이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실업급여에 의존해서 버텨야하는데 금액이 적을 뿐 아니라 몇 개월이면 그것도 끝난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죽 계속될 것이다. 이런 사태에 대한 이명박정부의 대응은 녹색뉴딜이란 이름으로 나온 바 있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토목공사가 대부분이며 그것도 기업주들 중심으로 나눠먹는 것이 대부분일 뿐 실제 서민들이나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별로 없다. 아랫목을 아무리 달구어도 이제 윗목이 따뜻해지는 사회구조가 아니게 되버린 것이다. 여기에 한가지 더 익숙하지만 여전히 불편한 시민들의 질타를 덧부치면‘정치인들은 자기끼리만 싸운다. 서민들은 죽어가는데.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여. 노동조합도 마음에 안들어!’......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생계를 보장하자는 ‘기본소득’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시작했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나온 복지정책에 비해 매우 급진적이면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담고 있다. 또한 진보진영의 대안적 담론을 형성하고 대중들의 실질적 생계안정을 위한 슬로건을 뒷받침하며 기존 사회운동의 한계를 넘어서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왜 운동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잊어버렸다. 절박한 생존권, 당면한 투쟁과제의 중압감 속에서 허덕이다가 진정한 인간의 자유와 해방, 인류의 진화발전이라는 목표와는 간극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끔은 멈춰서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고 물어볼 때 아닐까?
통상 주장하는 바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인용과 주석, 도표들의 적절한 배치가 필요하지만 이글에서는 최대한 자제했다. 그것은 첫째 조금이라도 쉽게 조합원들이 접근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이고 둘째 핵심을 분명히 하기위해서이다. 지금 이글에서 주장하는 바들이 다소 생소하고 황당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 글은 국가경제를 걱정하는 점잖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절망에 빠져있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자기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 좌절로 주저앉아있는 이 땅의 대중들에게 한번 우리 일어서서 우리의 꿈이 무엇이었던지 우리가 지켜야할 의미있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야기하고 싶다. 비록 비현실적이라고 느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언제는 우리가 제대로 꿈이라도 꾸어봤는가? 물론 이 글은 꿈이야기는 아니다.
2. IMF 당시 진보진영의 전략적 오류들
위에서 언급했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러 안타까운 서민들의 모습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것들 아닌가? 바로 IMF시기 직접 겪었던 상황들이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도 여러 정책적 대안들이 나오고 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 만들기 등의 운동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금반지들을 내놓아 천억 규모의 민간실업기금까지 만들어져서 실업지원활동들이 펼쳐졌었다. 당시 김대중정부는 신용카드정책을 통해 수요를 불러일으키고 정보통신산업을 중심으로 벤처기업 붐을 만들었다. 다행히 그 당시 국내상황은 어려웠지만 세계경제 자체는 아직 거품이 빠지기 전이었으므로 요행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이명박정권은 녹색뉴딜이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인 대규모건설공사를 중심으로 경제위기를 벗어나고자 시도하고 있다. 사실 벤처기업 붐이나 토목공사나 본질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고용창출기능도 그리 높다고 볼 수 없고 양쪽 다 거품이 끼기는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노동계를 비롯한 진보진영의 대응인데 그 대응방식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큰 차이가 보여지지 않는다. 당시 노동계의 주요 요구는 구조조정반대, 정리해고반대, 신자유주의반대였고 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운동들이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었었다. 지금도 거의 비슷한 의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단지 지금은 자본과 정부에서 더 강하게 일자리 나누기를 말하고 있다. 물론 그 의도는 임금삭감과 정규직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처 혹은 악화시키겠다는 것이다. 혹자는 노동계가 의제를 선점당했다고 한탄하지만 사실은 그 의제자체가 그런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 아닐까? 어쩌면 그런 한계가 있는 의제는 자본에게 물려주고 이제 새로운 근본적 의제를 제출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문제 아닌가?
심지어 사회공공성이란 이제 하나의 트렌드화되어서 한강에 고층빌딩을 짓는 사업까지 ‘한강공공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이니 이제 진보와 보수의 구별은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일까? 어쩌면 국민들이 하도 힘들어하니 정부가 앞장서서 진정한 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이런 상황은 그동안 진보진영의 정책적 대안들이 지금 위기의 역사적 성격을 놓치고 있는데서 초래된 혼란이다. 한마디로 보수가 내놓은 뉴딜식 정책들과 진보진영들이 내놓은 정책들이 양적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본질적 차이는 별로 없는 것이다. 본질적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IMF 당시 그런 정책들로 위기는 넘겼지만 그 운동들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멀리 볼 것도 없이 지금 노동자들의 생활상태를 살펴보자. 결국 파국을 일정정도 지연시켰을지는 몰라도 양극화는 더 심화되었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는 더 만성적 사태로 되었다. 사회는 더 황폐해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다시 말해 IMF당시의 위기탈출은 또 다른 감옥으로의 탈출에 지나지 않았음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감옥이라 함은 단순히 물질적 경제적 영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정신세계가 더욱더 사회적 요구를 자신의 요구화하는 현상, 즉 정신적 감옥의 세계로 갇혀가는 영역까지를 포함하는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더 큰 중요한 문제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수정당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IMF 이후 진보진영은 신자유주의적 정치세력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내지 못했고 서민들에게 대안세력으로 다가서지 못했으며 그 결과 노무현정권과 함께 통째로 불신임을 당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집권은 보수세력에 대한 국민적 지지의 확인라는 측면보다는 사이비좌파에 대한 심판의 측면이 더 강하다. 진보진영이 내놓은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세력들과 단지 양적인 차이만 있을 뿐 질적인 차이가 없을 때 당연히 그 헤게모니는 집권세력에게 빼앗기고 실패도 성공도 종속적으로만 누리게 될 뿐이며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인 것이다.
3. 놓치지 말아야할 변화의 핵심
IMF 당시 진보진영이 범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현재 위기의 성격규정을 좀 더 근원적 차원에서 분명히 하는 것 그리고 위기를 탈출하는 방안에 대한 구체적 요구를 정식화하는 것이다.
우선 현 경제위기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분명히 하자. 그것은 첫째로 지금의 위기가 단순히 경기변동의 한 과정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워지는 전 세계적인 위기상황이라는 점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해체되지는 않는다. 이번 위기도 죽을 기업은 죽고 살 기업은 살리고 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다. 단 노동자들과 자본가들 일부의 시체더미위에서 굴러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위기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위기를 내포한 체제로 변화되며 사람들은 또 다른 불행의 시한폭탄위에서 잠을 청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일국적 차원에서 시공간을 달리한 채 진행되어왔으나 이제 그 문제가 더 이상 외부화가 어려운 상태 즉 세계적 규모에서 동시에 연결되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위기라는 점에서 과거 IMF경제위기와 성격을 달리한다.
둘째로 반드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현 경제위기의 본질은 거품 낀 금융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이윤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제조업의 과잉설비로 인한 공급과잉현상에 있다. 이 문제를 자본에 맡기면 결론은 뻔하다. 즉 설비와 투자를 완화시키고 나머지는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 외에는 없다. 그러한 정책의 결과는 ‘총수요감소’ 즉 비정규직, 실업자의 양산만 초래할 뿐이고 자본주의는 더 이상 생산해도 팔아먹을 시장이 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지금 노동자에게는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일어서서 시스템자체를 바꿀 것인가 두가지 길 외에 없으며 또한 대부분의 자본가에게는 노동자에게 계속 전가시키면서 생존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파산할 것인가만 남아있다. 이명박정부는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세금을 기업들에게 퍼주면서 줄을 세우고 부를 일부에게 축적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펴고 있다. 이것은 망하는 길이며 불행을 가중시킬 뿐이라는 것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위기를 ‘빨리, 그리고 가능한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는 것은 전체 대중의 이익에 부합되며 그것을 진보진영은 최대한 빨리 앞당기도록 해야한다.
진보진영들이 그러한 임무를 완성하기위해 놓치지 말아야할 변화의 핵심이 있다. 그것은 지금의 위기는 노동의 성격변화에 대한 대응시스템이 없는 가운데 진행되는 경제적 위기라는 점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 속에서 자본주의 생산방식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 물론 자동차공장에서 콘베어를 타는 노동자에게는 그러한 변화가 크게 느껴질 수 없겠지만 이제는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중요한 요소가 인식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인식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사실은 전 사회성원이 참여하고 있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적 존재인 것이고 개인적으로 보이는 창작물조차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바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볼보자동차를 제치고 수출1위 상품이며 많은 수익을 스웨덴에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이런 주옥같은 노래들이 그냥 탄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절대빈곤의 사회인 아프리카 빈민촌 같은데서는 나오기 어려운 것이다. 사회민주의적인 복지제도가 잘 갖추어져있고 사람들이 평화롭게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낙천적인 삶을 영위하는 그런 사회적 환경에서 뽑아져 올린 것이다. 스웨덴이 이 수익의 절반을 회수하여 복지체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근거에서이다. 미국의 가장 돈많은 투자귀재인 워랜버핏은 부시의 부자감세안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자들은 스스로 땀흘려 번 ‘그들의 돈’이기 때문에 재산을 고스란히 간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부유하게 살수 있도록 해준 공공투자의 혜택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내 경우 나는 우연히 자본을 적절하게 배정해서 투자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전적으로 내가 태어난 사회에 달려있습니다. 내가 만약 사냥으로 먹고사는 부족사이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능력은 전혀 쓸모가 없었을 것입니다. 너구나 나는 빨리 달리지도 못하는데다 몸이 특별히 튼튼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아마도 야생동물의 먹잇감이나 되었겠죠. 그러나 나는 운이 좋아 적당한 시기와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내 재능을 높이 사줄뿐더러 훌륭한 교육으로 그런 능력을 개발해주었지요. 게다가 정부와 법률과 금융제도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어 나는 결국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에 보답하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 도리를 다하고자 합니다.
사회적 부의 창출에 기여하지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측정할 수 없는 노동을 비물질노동 혹은 그림자노동이라 칭하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이루어낸 많은 재화들은 사실은 그러한 보이지 않는 그림자노동에 의한 것이며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급되지 못한 돈은 계산조차 할 수 없다. 이 수익은 그대로 생산수단을 장악한 일부 자본계급에만 축적되게 되어 사회의 양극화현상은 극도로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잉유동성은 당연히 노동자들 생산자들에게 지급되었어야 할 돈들이지만 그것이 한쪽에만 쌓이게 되어 수요부족현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결국 생산설비투자의 이윤율은 떨어지니 가수요촉발정책 이른바 자산가격케인즈주의라고 불리우는 부동산, 금융상품 등의 거품을 키우는 방향으로 돈이 흐르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결국 현 경제위기의 원인은 자본의 탐욕도 있지만 노동의 적절한 대응의 부재에도 있다는 점도 짚지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를 노동운동 역시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해왔다. 개별적 노동자 혹은 개별공장 혹은 산별차원의 노동자들의 몫에 대한 공정한 분배만을 주장해왔지 전체 사회성원들의 가치창출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올바로 의제화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약간 극단적인 예를 들면 병원노동자는 무엇으로 먹고사는가? 바로 환자이다. 환자가 없다면 병원은 망한다. 경제적 맥락에서 보면 환자는 바로생산자원에 해당한다. 농업노동에서 토지, 목축노동에서 가축, 공업노동에서 철강과 마찬가지로 재료에 해당한다. 그런 점에서 교육노동이 생산하는 것이 지식도 무지도 아닌 바로 교육 그 자체인 것처럼 의료노동은 의료 그 자체를 생산한다. 다시 말해 건강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낳지않는 병도 의료화해서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의료 그 자체 즉 병자의 병든 채 살아있는 ‘생명력’이 의료산업을 유지하는 자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환자 역시 생산과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어디에선가 정당한 댓가를 치러야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그런 논리에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불치병 환자에게 무조건 일년에 1천만엔씩 지급하라’는 주장을 하고 있기도 하다. 무상의료나 무상교육같은 것이 공허한 슬로건이 아니라 공공성의 영역에서 제기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점에서 일종의 ‘사회적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4.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케인즈주의적 정책대안은 차고 넘친다. 그리고 그러한 대안은 아마도 한나라당에서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정권하에서 내놓은 녹색뉴딜이니 한강공공성 같은 정책들은 역시 그 내용이 기만적이고 일부에게만 혜택이 돌아가게 될 뿐이다. 또한 김대중정권이나 노무현정권하에서 진행되었던 복지정책 역시 형태를 달리하여 시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폭동’을 막기 위해서는!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다는 것이다.
IMF시기 민중진영이 그러했었다. 각종 복지제도의 도입 속에 진보진영들은 서서히 관료기구의 하위체계로 흡수되어갔다. 그것을 활용하여 실질적으로 대중들의 생활이 개선되기는 커녕 빈곤의 장기화 상태에 놓이게 되었뿐 아니라 진보적 역량의 축적에 성공하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구는 무엇인가? 무엇이 전체 대중들의 상황을 개선하고 또 세계자본주의의 위기 앞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진보적 요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 보장’이며 그것도 전체 국민에게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 슬로건은 과거 지주가 농노를 착취하던 시기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구호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우선 지금은 자본주의사회라는 것, 따라서 모든 사람은 기본적인 생계수단을 가지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인권의 의미라는 것이고 둘째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의 성격은 이제 완전히 과거와 달리 규정해야한다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슬로건이다. 셋째 정규직양보론에 대응하는 공세적 슬로건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이 문제 관련해서는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 일부 고임금정규직의 경우 지금은 직업자체가 자산으로 보이는-대단히 불안정한 것이지만-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마치 지주가 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소득을 얻는 것처럼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이 되버린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자 전체가 두 가지 방면으로 공격을 받고 있다. 하나는 그러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실업자. 비정규직 등으로부터의 공격이고 또 하나는 자본주의 자체의 공격이다. 즉 자본축적의 구조가 이윤율저하를 만회하기 위해 그동안 허용했던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침범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것이 신자유주의이다. 경제공황시기에는 이러한 두 방면의 공격이 더 강화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상황이 고약한 것은 자본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의 박탈감을 이용하여 정규직을 공격하고 있는 점이다. 비정규직이 많아지는 원인이 마치 정규직에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정규직의 해고가 쉬워야 비정규직이 줄어든다는 것을 집요하게 주장하고 있다. 만일 정규직이 쉽게 해고될 수 있다면 세상은 비정규직으로만 채워질 것인데 정규직으로 되는 것은 일부 자본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한시적으로 생존권을 보장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노사간의 대등한 계약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됨을 의미한다.
정규직 양보론은 비정규직이 발생하는 원인은 정규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구조 그 자체에 있다는 점을 은폐한다. 끊임없는 이윤추구와 과잉생산구조는 필연적으로 이윤률을 저하시키고 이에 따라 과잉노동인구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해 필요인력이 대폭 줄어들고 노동조합의 통제를 벗어나는 산업이 늘어나면서 비정규직화는 확대일로에 있는 것이다. 지금 정규직이 자신의 월급을 조금 내서 연대한다고 한들 비정규직의 숫자가 더 많은 상황에서 실질적 효과는 극히 미미할 것이다. 물론 그러한 연대는 지금 각 산별들에서도 나름대로 하고 있으며 보건의료노조의 경우만 하더라도 작년에 비정규직과 임금을 나누어 정규직화하기도 했다. 문제는 정규직 책임론에 대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없다는 점이다. 자본의 책임을 추궁한다고 하더라도 실업자들의 박탈감에 따른 공격은 어떻게 할 것인가? 실업자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정규직의 직장자체가 일종의 특권 내지는 자산으로 이해되어지는 상황은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는 민주노총의 사회적 영향력 혹은 정치적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 민주노총이 어떤 정치적 사업을 하건 본질적으로 사회경제적 관계 속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사회적 특권-그것은 노동조합의 투쟁을 통해 비록 정당하게 형성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한 관계로 -을 포함한 사회개조의 전망을 제시하고 실천적으로 사업을 전개하지 않는 한 민주노총을 포함한 노동운동의 영향력은 광범위한 사회적 소외계층과 지배세력의 양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벗어나기는 대단히 어려울 것이다. 이 점이 현재 민주노동당을 포함한 진보정치세력의 지지도가 한계에 부딪쳐있는 지점을 설명해준다. 노동에 기반한 정치세력의 입지는 딱 이 범위에 묶여있는 셈이다. 이것은 다시말해 노동계 출신 인사가 지역에서 출마한다고 했을 때 대중적인 지지를 받게 되는 일은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고 집단적 노력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져야 가능한 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추상적인 대동단결론이나 모호한 선동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과 복지 체계의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정규직의 몫을 일정부분 내놓는 정도가 아니라 전면적인 노동시장과 복지체계의 변혁프로그램과 연결된 문제이다.
핵심은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진정한 리더쉽을 누가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고 노동계가 그 전면에 서서 이끌고 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고임금정규직 조합원들이 자신들의 누리고 있는 부가 부당한 사회시스템에 의해 혜택을 받고 있는 쪽에 속하는 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아마도 조금 혹은 많이 불편해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정규직양보론은 초점을 명백히 벗어났다. 사회전체의 평등과 진화를 위한 사업에 자신의 특권을 일정부분 기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 동정심이나 희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앵벌이에게 약간의 돈을 준다고 해서 그런 상황이 개선되는 것이 아니고 그 돈이 배후의 조폭으로 전달되어 그런 상황이 오히려 지속되게 만들 뿐이듯, 사회전체의 부를 순환시키는 구조 자체를 바꿈으로서, 좀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면 모든 국민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기 위한 재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세제개편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비로소 진보적 의의를 가질 것이다.
5. 해가 있어야 달은 빛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전체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일부 조합활동가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해보고 싶다. 1월19일 기자간담회자리에서 노동부장관은 노사정대타협에 부정적인 속내를 내비쳤다. 발언내용은 ‘당면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것 뿐 아니라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고용유연화를 해야한다. 그런 것들을 노사정 대화에서 모두 다루면 위기가 지난 뒤에야 합의될 수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고용까지 포함하는 총고용을 자본이 담보한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열어놓고 대화하겠다는 노동계의 제안에 자본의 대답은 명확히 ‘노’이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도에게 협상을 제기해서 대화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강도를 제압할 물리적 수단이 있어야하고 그런 것이 없이 대화는 될 수가 없다.
총고용보장이나 일자리나누기라는 요구들이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서구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소비에트와 볼세비키라는 무시무시한 세력이 호시탐탐 자본주의를 넘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뉴딜정책이 가능했던 것 역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노동자들이 빠지게 되는 것을 막기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드러난 상식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자본가들이 양보하는 것은 선의나 도덕적 양심에서가 아니라 오직 ‘불가피성’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 양보가 유지될 수 있다. 우리가 ‘현실성’이라는 이름하에 케인즈식 뉴딜을 이야기하고 합리적이고 온건해보이는 정책적 대안에 집착하는 이상 자본가들은 아주 우습게도 우리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변질시켜버릴 것이다. 노동계가 제출한 바 있는 일자리나누기운동에 대해 자본은 그것을 이용해 임금삭감과 고용유연화의 계기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 단적인 예이다. 물론 우리가 순진하게 그런 자본의 속성을 모르고 온건해보이는 요구만 제출했다기 보다는 주체역량 상 어쩔 수 없는 지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지 않는 당면한 현상적 해결책에만 집중하는 한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전체가 균형을 잃어버리는 것이 반복해서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지난 20여년 간의 노동자투쟁의 경험이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총고용보장이라는 요구가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가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고려지점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서 총고용보장을 하게하는 이른바 ‘볼세비키’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대중적 지지이다. 우리의 요구를 대중들이 지지하고 공감한다면 그 힘은 무엇보다 강력하다. 두 번째 측면은 그렇다면 대중의 지지를 받는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총고용보장이라는 요구가 과연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파괴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검열기준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한국자본주의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방식으로 제기되고 있는가? 둘째 대중들의 절박한 생존권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담아내고 있는가? 또한 그런 요구의 진리성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는가? 또한 대중들의 잠재적 욕구 즉 자유와 평등, 그리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꿈을 자극할 수 있는가?
6.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관념의 사슬들
많은 현장의 투쟁에서 언급되어지는 투쟁사들 중 ‘우리는 현장에서 일하고 싶을 뿐입니다’라는 말이 이제는 왠지 서글프게 들리는 것은 왜일까? 물론 당면투쟁의 승리를 위해 명분을 세우고 지지를 얻기위한 측면이 있고 또 먹고살기 위해서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고용이라는 것이 영원한 임금노예상태를 의미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요구인가? 이런 요구조차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현실은 또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싶다라는 구호에서의 ‘인간’은 과연 어떤 의미의 인간일까?
기본소득보장이란 한마디로 모든 노동자, 모든 국민들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기본적 생활비를 지급하자’라는 것이다. 당장 두 가지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돈은 어디서 나오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그냥 나눠주면 누가 일할려고 할건데요?
대개의 경우 그 질문은 이미 ‘그것은 환상적이지만 불가능한 그리고 적절하지도 않는 공상’이라는 선입견을 깔고 있다. 기본소득이란 제도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본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 역시 이와 유사했다. 심지어 이런 제도의 도입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게되는 계층조차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우리는 기본소득제도 보장이라는 발상과 관련하여 우선 우리 노동자들, 아니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기존 이데올로기의 장벽과 먼저 직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첫째는 일하지 않는자여 먹지도 말라!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 노동에 대한 ‘사회적 강제’로 작동되고 있는 이 원리는 노동운동에도 깊은 내면적 영향을 미쳐 노동가요에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주자고 하면 깜짝 놀라며 ‘그래도 될까?’하고 마치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어릴 때부터 묶여 자라던 코끼리가 풀려나서도 그 울타리를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탈자본주의적 대안을 먼 미래의 막연한 공상으로만 여기고 있다. 자본주의적 탐욕이 지구를 망치고 있고 현대인의 삶을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며 현재의 경제위기는 더 이상 자본주의적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히 드러나는 이 시점에서도 말이다.
노동을 함으로써 인간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세계관은 뿌리깊은 토대를 가지고 있다. 노자도 무항산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을 이야기함으로써 항상 무언가 일을 하고 있어야한다고 했고 헤겔은 소위‘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노동의 긍정성을 이야기했다. 즉 주인은 노예를 통하여 사물에 간접적으로 관계하고 사물의 비자립성의 측면과 사물을 가공하는 노예에게 떠맡겨버림으로써 그 사물을 향유할 수 있다. 결국 주인은 비자립적 의식을 성취하게 되고 오히려 노예는 주인이 시킨 노동을 통해 자립적 의식을 획득한다. 이런 논리가 헤겔좌파들에 의해 노동만이 인류를 촉진하여 해방시킨다는 선언으로 이어지고 맑스주의는 이것을 계승했다. 레닌도 그런 철학하에 게으름을 쁘띠부루조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철의 노동규율과 테일러주의에 열광하여 적극 도입을 서두른다. 이것은 스탈린에 의해 완성되는 데 결국 노동은 생산력이고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상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며 자본주의적 소유관계가 나쁜 것은 생산력자체를 질곡으로 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주의란 생산관계의 소유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현실사회주의는 따라서 노동 그 자체에 대한 분석과 대안까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 사회주의가 추구했던 해방전략은 진정한 노동해방, 인간해방으로까지 나가지 못하고 단지 노동에 주인이 자본가에서 국가로 변하게 한 것에 불과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쨌던 적어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공유했던 가치관이 있다면 그것은 거칠게 말해서 긍정적 노동관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립하는 탈노동패러다임 즉 부정적 노동관의 핵심적 해방전략은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즉 노동이 불필요해지는 시대에 노동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은 노동자들간의 경쟁을 격화시키며 이는 자본주의의 노동비용감소논리에 이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세상은 더 이상 노동윤리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노동외의 자율적 시간을 늘여나감으로써 개인의 해방, 사회의 재조직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을 숭배하고 존엄한 가치로 경배하는 노동운동은 이미 그 혁명성과 불온성을 상실한 자본지배이데올로기의 한 곁가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고 노동자로 하여금 영원히 자본의 노예로 살기를 속삭인다. 노동해방이라는 구호는 단지 장시간, 억압적 노동환경, 저임금착취구조에서의 해방이라는 의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즉 인류가 꿈꾸어왔던 세상, 일과 놀이가 구분되지 않고 힘든 강제노역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특성에 맞게 창조적 노동을 통한 삶의 완성을 의미하는 그러한 세상을 의미한다.
하루에 4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놀이와 휴식 그리고 창조를 위한 자기개발에 쓸 수 있는 세상! 불가능하다고? 자본주의의 생산력발전은 2세기동안 이런 여가를 즐기기에 차고넘치게 이미 발전해버렸다. 자본주의 초창기에 1000명이 해야했던 일들이 이제 한명이 손가락하나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노동력이 남아돌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에 대한 찬가만 계속 불러야한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한 일 아닌가? 문제는 이런 생산력의 발전을 인류가 공유하지 못하고 일부 자본가들만 독점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역시 이런 상황에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의 예속, 즉 고용 그 자체를 요구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인가? 실업자는 일자리를 요구하고 비정규직은 정규직을 요구하고 정규직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고용관계는 더욱더 절대적 제도로 존재하며 이것을 둘러싼 자본주의는 더욱 고도화로 치닫지만 그 끝은 지구의 파괴와 그 기차에 올라탄 인간의 파멸인데도 누구도 이 고리를 끊어낼 생각을 하지 않는 이 현실이 과연 정상인가? 그렇게 해서 벌어들였다고 하자.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가? 모든 아이들을 가망없는 교육시장으로 몰아넣는 사교육비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쾌락을 즐기는 브랜드 명품들에? 혹은 부동산투기나 더큰 아파트. 또는 주식투자, 아니면 현실의 삶의 고통을 마비시키는 자극적인 오락활동에 탕진될 뿐 아니던가? 이런 지출구조라면 아무리 임금을 올려봤자 항상 부족할 뿐이다.
자본주의하에서 어차피 일자리는 제한되어있는데 누군가는 실업자의 대열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학업성적을 기준으로 학생의 우열을 나누는데 누군가는 반드시 기준에 미달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런 학생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실업자들 역시 무언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있으며 그런 관점에서 워크페어, 즉 일자리와 복지를 연계한 복지체제가 나온다. 일을 하지않으면 돈을 주지않는다는 일종의 징벌적 개념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쓸데없는 공공근로사업에 억지로 동원해서 일을 시키고 겨우 풀칠할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그것도 일정기간만..... 그 이후로는 알아서 죽어주세요.... 아닌가? 한국의 자살률이 OECD국가 중 1위라는 것은 이런 시스템의 당연한 결과이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크는 다음과 같이 갈파한 바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지배하면서 본성까지 타락시키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리려면 가공할 만한 힘으로 떨쳐 일어나야 한다. 단지 자본가들의 착취의 권리만을 의미할 뿐인 ‘일할 권리’가 아니라 누구든 하루 네시간 이상을 일할 수 없도록 금지하는 철의 법칙을 주조하기 위해 봉기해야한다. 그러면 대지는 , 기쁨으로 전율하는 이 오래된 대지는 안에서 펄펄 살아 뜀뛰는 새로운 우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 윤리에 의해 타락한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이처럼 진짜 사나이다운 결심을 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러한 탈노동해방전략은 기존 노동중심의 해방론이 갖고 있던 한계 즉 전체 대중의 생존권을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으로 대변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극복하는 중요한 담론이다.
그러나 이 논리의 기반이 기술결정론에 근거하고 정규직 직업노동의 축소를 노동사회의 소멸로 오해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기술결정론이란 기술 혹은 정보화가 노동의 소멸을 결정한다는 것인데 이는 꼭 그렇게만 결론지을 문제는 아니다. 즉 기술과 노동의 결합은 탈숙련화로만 결론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질적전환을 통해 맑스의 일반지성, 혹은 네그리의 대중지성론으로도 이해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더 큰 문제는 삶의 의미가 노동밖에서도 추구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는 정당하지만 현실 노동에서 인간이 느끼는 노동의 의미, 그리고 노동에서 비롯되는 해방의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고 노동자체만을 문제삼기 때문에 현실 노자관계의 모순을 부차적인 문제로 떨어뜨려 현실 계급투쟁의 전선에서 스스로 주변화시키는 경향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노동패러다임을 구축하고 해방전략을 제시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순차적인 문제가 한꺼번에 밀어닥친다는 의미에서-이라는 역사적 과제에서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약간은 추상적 수준의 이야기를 진행해왔지만 이것을 좀 쉽게 현실상황과 결부시켜 설명해보자.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당장의 고용이라도 보장받는 것이 절실한 문제이다. 다른 소리는 배부른 소리에 불과하다. 반면 정규직 고임금노동자들에게는 다른 과제가 제기된다. 즉 절박한 투쟁의 목소리보다는 노동의 질적발전을 통한 자기해방의 과제가 더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런 상이한 노동형태에서 이들을 하나의 민주노조운동의 선상에서 단결해서 투쟁하게 할 수 있는 노동해방의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이것은 우리가 마련할 대안사회의 전망과도 관련된 것인데 그것은 한편에서는 비물질적 노동의 가능성과 결합한 ‘노동안에서의 해방’과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지속적인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의 길이 필요하며 또 한편에서는 노동과 가치의 고리를 끊어 자본주의 지배의 근원이 되고 있는 추상노동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기본소득의 보장을 쟁취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노동운동이 해결해야할 과제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노동기본권을 확보하는 것과 동시에 포스트포디즘하에서의 노동의 성격변화에 따른 사회적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확보하는 과제이다. 이 양자의 과제는 한국사회의 굴절되었던 현대사로부터 물려받은 숙제가 해결되지않은 채 계속 넘어오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제기되고 있다.
7. 기본소득의 현실성과 잠재력
다시 구체적 문제로 돌아와 거꾸로 물어보자. 지금 폐업을 앞두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어떤 대책이 있을 수 있는가? 사업주는 수출도 안되고 납품할 길도 막혀서 도망가버렸다. 이런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가능한 방안이 있는가? 우선 실업수당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로는 1년도 버틸 수가 없고 수당도 50%가 안되는 현실이다. 사장이 도망갔는데 누구에게 고용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경기가 앞으로 좋아질 가능성도 없다. 눈높이를 낮추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다. 치킨집이나 분식집을 알아보지만 이미 포화상태인데다 임대료도 너무 높다. 자! 이런 노동자에게 총고용보장이라는 요구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폐업을 앞둔 노동자. 장기 실업자. 적자상태에 돌입한 영세상인들. 취직을 못하고 있는 젊은이들 수백만의 당장 생계가 걱정인 대중들에게 자살말고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적 요구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가 기본소득을 책임지고 실시하라는 단체행동이다. 적어도 기본적 생존권리는 보장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아닌가? 일단 생존권을 확보한 다음 할 수 있는 구상은 노동자 자주관리라든지 자치운영체계를 갖추어서 지역경제나 기존 경제시스템에서 일정한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다. 적어도 도산에 대한 노동조합의 전망이 있어야 한다면 이런 정도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서 모든 불로소득은 환수하고 세금체계도 바꾸고 나라의 운영방식도 바꾸고 각 지역에서의 시민들의 삶도 재배치되면서 공동체성을 회복하면서 이 경제위기를 넘어서자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해법은 몇 년전의 상황 즉 자본주의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시기였다면 공상으로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공황상태의 지금 대중들의 삶이 극한이 처해있는 지금은 충분히 논의할만한 주제가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논의가 가지는 의미는 케인주주의적 처방과 진보적 처방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노동해방의 대의를 좀 더 변화된 현실에 맞게 가져가게 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노동대중 내부적으로 볼 때 자본이 노동을 분열시키는 물적토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고임금정규직노동자들을 근본적 변혁에서 분리시켜 자본의 들러리로 묶어두는 이데올로기는 여러 방면에서 작동하고 현실적 힘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지금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아니 그런 힘 이상으로 자본이 포괄해내지 못한 외부적 영역에서의 힘이 축적되고 있는 중이다. 공황기에는 이것이 급속한 팽창을 이루게 될 것이며 노동운동의 성패는 이 힘을 조직하고 새로운 토대로 엮어내는 것에 달려있다.
8. 단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민주노총의 약화를 말하면서 한쪽은 대중과 함께 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주요하게 지적해왔고 또 한쪽은 과감하게 싸우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고 있지 못하다. 민주노총의 위기는 선도적인 투쟁을 안해서도 아니고 대중적인 사업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위기의 핵심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 그 진리에 대중을 묶어세우지도 않는 것이다. 세계사적인 거대한 변화에 우왕좌왕 따라갈 뿐 변화의 핵심을 포착하고 노동자들이 거대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세상의 건설자로 나서게 하지 못하는 무능한 인식, 실천에서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이고 진리에 대중을 결속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성장도 아니고 분배도 아닌 탈성장 시대의 담론을 제시하는 것. 노동과 가치의 고리를 끊어 자본주의의 이념적 지배 자체를 해체시키기 위해 기본소득을 쟁취하는 것. 그리고 노동안에서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포괄하는 새로운 노동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실제 실천사업을 통해 스스로 모범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대중들의 몸과 마음이 바뀌면서 운동의 기쁨을 이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지금 경제위기의 피해자는 노동자만도 아니고 농민만도 아니고 이 경제구조하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계급계층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제시하고 있는 총고용보장이라는 의제는 일정하게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민주노총이 고용되어있는 80만 조합원만의 이해, 그리고 노동시장에 진입해있거나 하려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조직이라면 지금 제출되고 있는 총고용보장이나 일자리나누기운동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는 요구들임은 분명하다. 또한 각 산별들이나 단위노조에서 그런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경제위기하에서 피해를 보고 있는 전체 국민들의 요구를 집약하고 사회구조 자체를 새롭게 바꾸는 요구는 어떤 곳에서 해야하는가 하는 것이다. 일단 보수여당은 논외로 하고 소위 개혁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이? 혹은 진보적 정치세력을 표방하는 민노당이나 진보정당들이 하고 있는가? 물론 나름대로 일정정도 제기하고 있지만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의제를 제출하는데는 망설이고 있으며 기껏해야 케인즈주의식의 양적 변화를 추구하는 정책만 내놓고 만족하고 있는 듯 하다. 오랫동안 대중성, 혹은 현실가능성이라는 덫에 걸려 어떤 급진적, 혹은 근본적 전환을 위한 의제는 자체 검열에 의해 제기되기 어려운 상태이며 이는 많은 진보적 단체들도 마찬가지 상태에 놓여있다.
어쩌면 이런 문제들은 그다지 심각하게 다뤄오지 못했다. 단위나 산별들의 요구들을 ‘종합’하고 ‘나열’하는 것으로 충분히 변혁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시기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워낙 빠르게 변화한 세계정세의 성격은 미처 활동가나 정책전문가들 조차 따라잡을 수 없었고 설령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운동의 주체들인 조합원들과 올바로 결합하는데 실패했다. 이것은 또한 민주노총의 조직적 기반이 대다수 정규직 대기업 혹은 시장 내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 중심이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체 정세의 요구를 예민하게 파악하는 문제와 그것을 조직의 중심사업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심각한 불일치가 발생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먼저 우리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주체의 위상을 보다 분명히 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계급의 대표체적 성격을 가지고 발언할 것인지 아니면 산하 조합원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발언할 것인지 하는 것이다. 만일 전자의 입장에서 말해야 한다면 분명히 총고용보장이라는 요구 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선 고용되지 않은 전체 노동자, 영세상인. 청년실업자. 그리고 아예 고용보장 자체를 거론하기 힘든 무수히 많은 중소사업장의 노동자들과 영세자본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고용보장이라는 요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결성 당시 민주노총의 역사적 의미는 전체 노동계급의 희망으로서의 대중조직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현 시기에 보다 정확히 살려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체 대중의 대담한 행동의지를 조직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구태여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독자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투쟁력이 약화되고 언제부터인가 대공장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굴러간다는 악선전이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 것은 비록 실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의 한 측면을 반영하는 징표이다. 따라서 비록 악의적인 비난이라 할지라도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경향적 오류에 대한 엄밀한 분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되거나 과소토론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우선 조직내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지 않는 것과 선진활동가들의 문제의식 부족과 결부되어있다. 전자의 경우는 조직적 토대-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와 연결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역시 의식적 노력의 문제와 결부되는 것이라 심각히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시 정확히 정의하자면 통일단결의 중요한 한 축인 정파세력들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소위 ‘경로의존성’의 문제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경로의존성이란 민주노조운동의 20여년 역사 속에서 형성된 운동주체들의 자기조직논리들, 정파주의적 경향들과의 연속성을 말한다. 민주노총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실제 사업 그 자체라기 보다 사업을 둘러싼 소모적 정파적 갈등이 더 크게 작용한다. 그 뿌리는 80년 당시 진보적 노동운동세력의 역사적 진출과 좌절에 닿아있다. 주지하듯이 80년 노동운동의 과제는 한편으로는 군부독재와의 투쟁 속에서 일반민주주의의 확보라는 과제와 근대적 노동기본권과 노동계급의 지배 그 자체의 철폐라는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전자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진보적 노동운동 자체가 고립되고 배제되기 시작하였는데 개혁적 자유주의세력에서 뿐 아니라 시민운동 나아가 노동조합의 대중운동 속에서 조차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가장 핵심적 이유는 사상이론수준에서 교조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파적 분열주의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애초 문제의식 즉 한국의 문제가 기존 보수야당세력에 의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고 따라서 급진적 노동운동의 전진이 필요하다는 제기자체가 무용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선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운동 역시 자본의 축적구조가 와해되고 경제위기가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됨에 따라 보다 급진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정파적 갈등의 악연들이 서로 손을 잡고 공동의 목표와 과제를 통해 협력하고 새로운 전망을 열어 가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노동조합운동도 자기 혁신하고 급진적 노동운동세력도 새롭게 정세를 분석하며 오로지 대중에 대한 책임감과 역사진화의 관점에서 공동의 목표를 통해 손을 잡을 수 있을 지는 불확실하다. 이것은 민주노총이 정치세력화운동으로 당을 만들면서 구조화되어가는 복잡한 상황과 연동되어있기 때문이다. 즉 현안문제가 아닌 정치적, 혹은 중장기적이라 생각되는 문제는 자신의 과제로 하기보다는 당에 위임해버리는 경향이 발생하면서 문제해결은 더 지체되어온 셈이다. 그러나 그 당조차도 그런 과제들을 제대로 수행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더구나 분열해버리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무리 좋은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있다고 하더라고 이렇게 복잡하게 분열된 구조에서는 제대로 된 싹을 틔우기가 어렵다는 점에서이다. 사회연대임금전략이나 일자리나누기운동이나 사회개혁전략이나 나름대로 의미있는 전술들이 제대로 논의되고 발전하기 보다는 내부정파적 소모전의 희생물로 전락하는 한 운동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에 관한 의제 역시 이러한 내적조건 하에 매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동운동에서 활동하는 모든 정파들 역시 이러한 상황을 뼈아프게 탄식하고 개선하고 싶어하고 있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또한 이런 상황의 개선이 추상적인 단결투쟁의 구호를 외친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모든 활동가들이 고민해야할 것은 우리의 목표를 분명히 하지 못함으로 해서 다시 말해 우리가 그런 내부적 한계 속에서 운동의 방향을 예각화 시키고 못하고 있음으로서 실질적인 노동자의 생존권 혹은 아주 온건하고 개량적으로 보이는 요구조차도 얼마나 간단히 무시당하고 있는가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우리 내부에는 뚜렷한 노선을 제시하는 것이 새로운 분열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토론을 회피하거나 애매모호하게 평론가의 입장에 서려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안팎의 위기상황에서 그것은 무력한 침몰노선에 불과하다. 대동단결의 큰 원칙하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분명히 제시해야 공동의 목표가 구체화될 수있다. 현장의 절실한 목소리는 이제 체면을 차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9. 기본소득 쟁취 운동을 시작하자!
80년대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 진보진영의 힘은 미약했다. 노동조합은 탄압받고 어용의 굴레에 묶여있었고 의사표현도 그것을 실천하는 일도 엄청난 개인의 결단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그때와 지금 2009년을 비교하면 실로 양적으로는 비약적 발전을 했다. 노동조합도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나름대로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패배적으로 된 까닭은 무엇일까? 진보운동세력의 양적확대가 질적 전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지체된 것, 그 가운데 진보적 이론의 방황이 자리하고 있다. 혁명적 이론없이 혁명적 실천없다라는 상식은 현재의 반지성주의적 실용주의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경제공황의 시기를 맞이하여 지금 여러 가지 방면에서 ‘통합’과‘단결’을 주문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애초 분열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것은 목표가 달랐기 때문이다. 만일 각 운동단체들이 목표가 같다면 통합하지 말라고해도 자연스럽게 공동의 사업과 공동의 장에서 만나면서 통일되어나갈 것이다. 따라서 통합을 하자면 과연 주체들의 목표는 무엇인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표가 추상적이거나 혹은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애매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노동해방이라는 목표조차도 그렇게 큰 철학적 차이와 노선의 차이를 안고 있는데 이에 대해 통합적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본 적도 없다. 진정 단결을 원하는 조직이나 개인이라면 먼저 목표를 분명히 하고 구체적인 제안을 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경제공황시기 당면한 슬로건 중 하나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 기본소득’ 보장에 대한 요구를 대중화하는 운동을 제안한다. 물론 하나의 슬로건을 채택하기 전에 신중하고 전문적이면서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기본소득을 전체 국민들 상대로 실시하려면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하며 또 막대한 ‘돈’이 필요하다. 우리 같이 기본적인 복지체제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에서 이런 혁명적인 복지체제를 도입할 수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돈’이 아니라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국가의 인식문제이다. 우리가 서구사회에서 경험해왔던 순서를 그대로 밟아야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미국자동차들이 탈석유에너지개발을 등한시하면서 일본에 뒤진 것처럼 후발자동차업체들이 꼭 시대에 안맞는 석유차부터 개발할 필요가 없이 바로 수소차를 개발해 들어갈 수있는 것이다. 둘째 세계적 경제위기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보다 혁명적인 조치가 긴급히 시행되어야한다. 지금 이 순간 자살을 생각하는 수백명의 가장들 앞에서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 차원의 이야기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이런 방향으로 전환되기까지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지 모른다. 분명히 이명박정부하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땜방식 케인즈주의 구호정책으로는 안된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아마도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기본소득개념에 대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딱지를 붙이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식의 소산일 뿐이다. 기본소득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정책일지는 몰라도 그런 이념의 딱지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본소득은 머리에서만 도는 피를 몸전체에 돌게 만드는 것, 그것이 경제를 살리는 요체이며 아래로부터 위로 건설하는 상향식 경제철학을 담은 요구이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의 뒷면, 그림자경제를 포착해 그것에 개념을 부여하고 이름을 부여해 대중들의 가시권에 드러내게하는 요구이다.
물론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아마도 연금술의 신세를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연금술로 인해 많은 과학적 진화가 이루어졌듯이 기본소득에 관한 많은 논의들은 현재 세상을 짓누르고 있는 자본의 이데올르기에 대항하여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당해온 하나의 갈망이 점점 커져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월드컵의 붉은 악마들에서, 소고기반대의 촛불집회들에서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욕망의 분출이 시작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정의, 자유, 그리고 진정한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근대사 속에서 개발독재 속에서 사이비 개혁 속에서, 신자유주의 속에서 배신당해온 평범한 대중들의 염원이 제대로 한번 꽃피워보자는 강력한 욕망이 움트고 있다. 이명박정부로 상징되는 보수지배세력들은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능력도 철학도 비젼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하루하루 확인되고 있다.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본소득을 보장하라’라는 우리의 이 제안이 절망에 빠진 대중들에게 다소나마 희망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조직은 오로지 진보적 노동운동과 진보적 정치세력뿐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 가족, 이웃, 동료들 모두가 생존에 대한 절망감없이 평등한 출발점에서 인생을 시작할 수 있고 마지막 안전판이 사회공동체 모두의 생산력에 기초해 지켜지고 있다는 믿음은 우리사회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