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사진, 피맺힌 눈으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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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맺힌 눈으로 찍은 사진
일찌기 로자가 그 한계를 역설했지만 오랜동안 노동자의 한길이 되었던 노동조합운동. 전태일이 불씨가 되어 노동자계급이 주체성을 드러냈고, 87년 이후 타올랐다가 '등 따습고 배 부른 어용노조' 지뢰밭에서 희나리만 남은 듯 했는데 쌍차 사건으로 노동자 혁명이 부활했다. 노조의 97.55%가 투표에 참여하여 86.13%가 쟁의를 찬성했으며, 기대하지도 예측하지도 않았는데 대중파업투쟁은 77일간 이어졌다.
비노동자라고 생각하는 계급이 보기에 노조운동이 과격강성 같지만, 노조가 사실은 안정사회의 마중물이었다면 놀랄까. 생계를 위협받는 사람이 악인으로 변하는 사례는 흔하게 널려있지만, 영화 <아메리칸 크라임>에서도 얼마나 짧은 시간에 극단적 살인이 일어날 수 있는지, 죽임의 사회가 어떻게 죽임의 가정을 낳는지 볼 수 있다. 지금껏 노조는 그 죽임의 도미노를 붙잡고 있었다. 파업도 혁명도 필요없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그런데도 사회는 노조를 싸늘하게 바라본다, 늘.
누구든, 미래가 막연해지면 불특정다수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잊는다. 쳐다보지도 않는 아랫녘이니 보일 리가 있나. 그러나 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존재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힘을 발휘하게 마련인 것이 생명이고, 그래서 모든 것은 정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노조운동과 혁명, 협상과 투쟁. 갈림길의 연속선에서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기회를 준다. 그렇다면 자본시대를 만든 자본가들은 풍요의 기회를 주면서 스스로 풍요로운 공생을 선택한 걸까, 독점을 선택한 걸까? 돈 놓고 돈 먹는 걸 선택한 거다.
그러나 자본의 속성이자 그 정체성인 '이윤창출'은 가속이 붙어서 더 큰걸 노린다. 명품이 된 자본은 그 유지비를 노동자 피땀에서 짜 버는 것도 모자란듯, 목을 치고 통째로 팔아넘겨 죽인다. 이렇게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시대가 왔지만, 자본가들이 만든 상황일지라도 노동계급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원래 세상의 주인은 노동자였으니까. 쌍차 문제도 자본가와 사측이 벌여놨지만 진짜 주인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수사경찰의 2차 가해를 당하면서도 하나하나 해결하고 있듯이.
정리해고로 합법적 살인을 저지르는 선진자본. 그 쪽을 편드는 시대를 살면서 노동계급이 다함께 목숨을 연명하고 싶다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친환경적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나, 노사가 합의하기 어려운 게 완전고용이고, 노노가 합의하기 어려운 게 노동시간 단축이고, 가족이 합의하기 어려운 게 친환경 생활이다. 색달라보이겠으나 비정규직 고용으로나마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다면, 정규직 노동자들은 완전고용을 지향할까? '기본소득'사회가 되면 그제야 동의할까.
자본주의 마지막 단계인냥 악명을 떨치는 '해고의 시대'를 탈출할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 노동자의 친구인 노동당이 한국에서 세력을 겨우 싹틔우고 진보신당까지 낳은 상태지만, 생태정치를 이미 시작한 사회당도 이제 그 싹을 틔워서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 노동정치에게 무시당했던 음지에서 오랫동안 견뎌온만큼, 역량이 쌓였을까. 만무하다. 견디는 게 용하다. 십 원이 아쉬운 판에 딸깍발이는 미운 법.
한국의 생태주의가 너무 일찍 자본주의에 감염되어 맥을 못추고 있는 실정에서, 청년진보당이 사회당으로 변신하여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에콜로지를 부르짖는 것이 과연 노동계급의 공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생태주의 노동자들의 한길을 꿈꿔 왔다. 쌍차 노동자 파업 사진에 배어있는 노동자와 가족들의 피눈물에 빠져보니, 안락하게 숨 쉬었던 77일이 부끄러웠던 날에 더 간절해지는 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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