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랑

[신영복서화에세이] 처음처럼 _랜덤하우스 _ 2007

실다이 2009. 8. 15. 01:21

 

 

 

 

처음처럼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지남철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민영규 글)

 

당신이 읽어준 이 간결한 글만큼

지식인의 단호한 자세를 피력한 글을

나는 이제껏 알지 못합니다.

 

 


 

훈도의 가마

 

아름다운 도자기가 익고 있는

가마의 아궁이 앞에 앉아서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을 저마다의 훌륭한 예술품으로

훈도해줄 커다란 가마를 생각합니다.

 

 


 

사랑과 증오

 

증오하는 경우든 증오를 받는 경우든

실로 견디지 어려운 고통과 불행이 수반되게 마련이지만,

증오는 '있는 모순'을 유화하거나

은폐함이 없기 때문에 피차의 입장과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오의 안받침이 없는

사랑의 이야기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증오는 '사랑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높이 나는 새는 뼈를 가볍게 합니다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겹게 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버립니다.

심지어 뼈 속까지 비워야 합니다.

무심히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가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성찰

 

불치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 여행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태산일출을 기다리며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엽서를 끝내고

옆에다 태산일출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에

그림 속의 해를 지웠습니다.

물론 일출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태산에 일출을 그려 넣는 일은

당신에게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곤경에서 배우고, 어둔 밤을 지키며,

새로운 태양을 띄워 올리는 일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말라야의 토끼가 주의해야 할 일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 살고 있는 토끼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살고 있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콤럼부스의 달걀

 

달걀이 둥근 모양인 것은 그 속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모지지 않고 둥글어야 어미가 가슴에 품고 굴리면서 골고루 체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타원형의 모양으로 만들어 멀리 굴러가지 않도록 하거나,

혹시 멀리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 한 것 모두

생명을 지키기 위한 고뇌의 산물입니다.

그러한 달걀을 차마 깨트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그것을 서슴없이 깨트려 세울 수 있는 사라므이 차이는

단지 발상의 차이가 아닙니다, 인간성의 차이라고 해야 합니다.

 

 


 

마추픽추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새로운 잎에게 자리를 내주는 낙엽이 아닌

모든 소멸은 슬픔입니다.

 

 


 

기다림

 

기다림은 더 먼 곳을 바라보게 하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찔레꽃잎 따먹으며

엄마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압니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이,

실천보다는 입장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