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알고주알

천안 북면 하늘 쩍쩍 쪼개지는 천둥소리, 암행어사 박문수 출두여~~

실다이 2009. 7. 2. 20:10

 

 폐렴에 걸려서 병원에 다니고 있는 의현이.

그래도 웃고 묻고 먹는 것은 여전하다.

둘째가 묻는 말에 대답해주랴 맞장구 쳐주랴, 심신이 휴식을 갈망할 것이다, 애 엄마는 다 그러니까.

의현이 모친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북면에 나들이 갑시다."

"의현이가 바람을 조심해야 되는데, 가도 괜찮을까요?"

"에어컨 켜지말고 창문 열어서 더위 식히며 휙 갔다 옵시다."

"애 생각은 뒷전이고, 무조건 나갔다 오고 싶네요. 호호!"

 

 

취암산 터널을 지나서 연춘리까지 가는데 날씨가 꾸물거린다.

한바탕 치고박고 놀 모양이다.

이런! 두 돌도 안 된 의현이가 폐렴에 걸렸다는데, 나들이 하는 날이 소나기 오는 날이라니......

 

박문수 어사 묘와 영정사진을 보려면 다리 건너 좀 더 가야한다.

하지만 유성농장 있는 곳까지 수려한 왼쪽 코스가 마음을 잡아 끈다.

맞아, 좌회전 하는 거야!

 

 

 다리를 건너가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알이 자그마하기도 하고 굵기도 한 살구 나무들이 줄지어 맞이하는데,

뭉개지지않고 떨어져있는 것을 먹어보려 했더니,

"방제약 쳤으니 먹지말라"는 안내글이 붙어있다.

섭섭타.

 

왼쪽으로 '들밥'이라는 식당이 보인다.

열한 시가 넘어가니 점심 때로는 이르고, 돌아나올 때는 배가 고플 듯 하다.

이 곳에서 점심을 먹게 될까?

 

오른쪽으로 길게 흐르는 강물이 찰랑찰랑 그득해서 마음이 든든하다.

그 물과 흙의 사랑을 받아, 싱그런 낯으로 노닥거리고 있는 풀들.

가지 끄트머리 붉은 잎 뽐내는 왕버들, 억새, 개망초, 수북한 칡 잎사귀, 연두빛 잎새 가늘게 키우고 있는 짧달막 코스모스.

사이좋게 살고 있다.

 

 

 가슴이 콱, 막힌다.

휘도는 바람을 견뎠던 수 백년 밤들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태울 듯 찌를 듯 한 여름들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멀찌기서 찍어야 가지까지 모두 찍을 수 있는 가지가 뿌리의 깊이를 암시한다.

그런데 어디서도 보호수 안내판이 안 보인다.

 

 

 

 이 기세......

 

 

 이 역량......

 

 

 

 

 무진장 많은 바위, 너럭바위가 있던 곳인가보다.

무진교 필체는 보기 드물게 이쁘다.

전국 어디메에 더하다 덜하다 못할 필체를 지닌 다리가 생겼겠다.

내 지역을 보면 다른 지역도 알 수 있다.

 

 <서체는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2차례나 특선에 입상하신 국당 조성주선생님 작품. 1995년>

 

 

 

 오른쪽으로 무진교를 건너면 무진가든이 있다.

멀찍이 있어도 고전음악이 흘러나와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조금 더 가면 왼쪽에 이정표가 있다.

커다란 바위에 고운 우리말이 써 있다.

"느러니"

 

그 옆 '마을 유래비'에 느러니에 대해 써있다.

마을 앞 귀신골 모퉁이 넓은바위가 냇가에 있어서 '너럭바위(자라바위)'라 했다.

이 마을 안쪽 마을을 널안리라고 불렀는데, '느러니'로 바뀌었단다.

이 곳으로 흐르던 강물은 조선 중기 대홍수 때,

바위가 무진장 많아서 무진바위라고 불렸던 무진바위 밑으로 물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외진 산동네에서 산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초등학교가 있으니 참 든든하다.

 

촌에는 없어지는 학교가 늘고 있지만,

언젠가는 떠들썩한 학교가 되기를 빌어본다.

 

 

 

 1.4km 더 가서 오른쪽으로 들면, 신자경 선생 묘가 있다는데,

조금 들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털털털털 경운기가 따라온다.

갈래길 너머에 있는 이 곳을 찍고 싶어서 오른쪽으로 차를 정차하고 사진을 찍었다.

몇 장 더 찍으려는데 뒤에서 할아버지가 소리치신다.

"빨리 가!"

음...... 더 넓은 길이길래 왼쪽 길로 가실 것이라고 지레짐작 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오른쪽 길로 가야 하는 거였다.

상대방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서 미루어 짐작하고 그 이유까지 마음대로 찾아내기가지 하는

독선적인 태도.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 나는.

이래가지고 어떻게 지역에서 선생 노릇, 어른 노릇을 할 것인가!

 

 

 답답한 사람때문에 노여웠을 할아버지, 경운기 몰아 저만치 그냥 가신다.

애기똥풀 혼자 엄마 찾는 아가처럼 서있다.

 

 

 각자 제 이유가 있어서 생긴 경계들이 어우러진 마을.

보기에 좋다.

나름대로의 이유로 맞부딪치기도 했을 터다.

숱한 시간과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과 물로 다투었을 게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게 그랬을 뿐이다, 이제는.

 

 

 비를 맞으며 뛰어다녀도 좋을 텐데, 폐렴을 다스리려면 참아야 한다, 의현이. ^^

 

 

 밖에 나가서 걸어다니고 싶다.......

 

 

 말나리던가, 그렇지 아마?

신자경 묘소까지 못 가고 비에 쫓겨 나왔다.

 

 

널안리(느러니)를 벗어난다.

 

 

어사 박문수(숙종~영조) 묘와 사당 가는 길 왼쪽이 환해서 덩달아 한껏 웃었다.

접시꽃과 자귀꽃이 으뜸과 버금을 가릴 수 없이 곱다.

좀 전에 지나쳐 온 어느 집 담벼락에 능소화도 고왔건만 여기서 눈을 떼기 어렵다.

 

 

은석산 아래에 고령박씨 종중재실(문화재자료 제 289호)이 앞서 있다.

 

 

 

 

 

 이백 년 세월에 담금질 한 나뭇결과 빛바램.

이렇게 편한 마음이 들어야

사회가 어른답고 전통이 서렸다고 할 것이다.

편한 마음이 드는 사회, 어른다운 사회의 품이 그립다.

 

 

 명자꽃이라나. 선홍빛이 온 몸의 피와 기를 한바퀴 돌려줘서 신난다.

 

 

 300년 전,  이쪽 마을에는 동래정씨 21세 손과 의성김씨 23세 손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부안김씨 29세 손도 들어와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종중 재실을 지키는 촌로 부부가 어린 아이를 돌보고 있다.

고령 박씨 대를 이었으니 큰시름은 없으시겠다.

 

 

 천안시나 충남도나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서

살림살이가 계속되고 있다.

 

 

 안채, 사랑채, 사당(충헌사, 1990년 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중 재실.

 

 

 아낙들이 곧 곡식을 담은 바가지를 들고 올 것만 같다.

 

 

 

 이끼류도 여기서 대를 잇고 있구나.

 

 

 

은석산 7부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쩍쩍 갈라지는 천둥소리에 기가 질리고 다리에 힘이 풀린다.

잠시 멈췄던 비가 억수로 쏟아질 모양이다.

 

조선시대 장군 복식을 연구하려면 박문수 묘를 지키고 있는 장군석 2기를 살폈다고 하는데

그 섬세함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니 안타깝다.

의현이 누나 가현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도 가까워지니

애가 끓는다.

 

 

바람이 쎄다.

댓잎들이 아예 바람을 따라가야 할 기세다.

박문수 묘자리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려고 했다가,

장차 나라에서 쓸 지역임을 알고 북면 은석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바람과 물의 기세를 따르면 인간사도 형통해진다.

 

요즘 물의 오래된 기세를 인간이 꺾어보겠다고 잔머리를 굴리지만,

결국 어거지라는 건 자업자득 하고서야 만인이 일인같이 인정할 것이다.

겪을 걸 다 겪어야 하는 게 사람인가.

겪고도 더 겪어야 아는 게 한국 사람인가.

조선 사람 박문수가 영남 관리들의 부정함을 적발했던 역사는

빛 바랜 거울일 뿐인가.

 

 

38 세에 이미 곧은 기품을 지닌 박문수 어사의 영정(보물 제 1189호. 1994년 지정)을 보려 했지만,

종중 어르신께 여쭈었더니 영정을 천안박물관으로 옮겨갔단다.

영조대왕이 하사한 호랑이가죽 깔개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려면,

천안박물관으로 가야한다.

 

 연춘리 생선구이집에서 천둥의 호령을 듣느라 지친 몸과 정신을 보살폈다.

새콤한 시골 막김치와 세 가지 생선구이에 된장찌개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먹어치웠다.

 

 

 

 

 나뭇가지 하나에 다닥다닥 모여사는 살구들, 실물크기로 확대했더니 흐릿한 것이, 좋게 말해서 파스텔톤으로 보인다. ㅠ.ㅠ

 

 

북면 천둥, 암행어사 납시는 듯 1

 

 

취암산 터널을 지나서 연춘리까지 가는데 날씨가 꾸물거린다. 떼구름이 한바탕 치고 박고 놀 모양이다. 가물더위를 식히려나보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맞부딪치며 생긴 경계에 기댄 채 강과 논, 밭과 마을이 어우러진 북면, 보기에 좋다. 어디나 그렇듯, 숱한 시간과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과 물을 두고 다투었을 게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게 그랬을 뿐이다, 이제는. 어사 박문수(숙종~영조) 묘로 가는 길 왼쪽이 환해서 비 낌새를 잊고 덩달아 한껏 웃었다. 접시꽃과 자귀꽃이 으뜸과 버금을 가릴 수 없이 곱다. 좀 전에 지나쳐 온 어느 집 담벼락 능소화도 고왔건만 여기서는 눈을 떼기 힘들다.

 

은석산 아래에 어사의 묘보다 고령박씨 종중재실(문화재자료 제 289호)이 앞서 있다. 천안시나 충남도나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서 문중 살림이 이어지고 있다. 안채, 사랑채, 사당(충헌사, 1990년 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중 재실. 세월에 담금질 한 마룻대 결과 빛바램을 보니, 이백 년을 따라 들어가는 듯 들뜬 혼이 가라앉는다. 아기 소리가 들리는 사랑채까지 닿은 마당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열린 문을 미는데, 돌쩌귀가 소리를 내지 않고 손님을 맞아들인다. 이런 집에서라면 상처투성이 외주둥이로 된주먹 날리듯, 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뱉을까. 마음을 다스린 공간이라서 감싸 안는 힘이 있다. 이렇게 편한 마음이 드는 사회, 어른다운 사회의 품이 그립다. 그런 품이 서면, 사회가 어른답고 전통도 서릴 것이다.

 

안마당에 들어오기 전, 바깥 정원 명자 꽃이 빨간 빛깔로 사람의 피와 기운을 돌려주는지, 신바람이 났었다. 그러나 마당에는 절구 둘이 아낙을 기다린 지 오래 되었는지 신바람이 들지 않아서 이끼로 얼룩져있다. 곧 곡식 담은 바가지를 들고 올 것만 같은데. 300년 전, 마을에 동래정씨 21세손과 의성김씨 23세손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부안김씨 29세손도 들어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던 고령박씨 종중의 재실을 지키는 촌로 부부가 아가를 돌보고 있다. 대를 이었으니 깐깐오월이 길어도 큰 시름은 없으시겠다. 38 세에 이미 곧은 기품을 지닌 박문수 어사의 영정(보물 제 1189호. 1994년 지정)을 보려 여쭈었더니 영정을 천안박물관으로 옮겨갔단다. 영조대왕이 하사한 호랑이가죽 깔개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려면, 천안박물관으로 가야한다.

 

묘소가 있는 은석산 7부까지 올라가려는데, 갑작바람이 쎄다. 쩍, 쩍! 치가를듯 한 천둥소리에 기가 질리고 다리 힘이 빠져나간다. 잠시 멈췄던 무더기비가 억수로 쏟아질 모양이다. 조선시대 장군 복식을 연구하려고 긴칼 짚고 박문수 묘를 지키는 장군석 2기를 살폈다고 하는데, 그 섬세함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니 애 닳는다. 댓잎들이 아예 바람을 따라가야 할 기세다. 박문수 묘 자리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려고 했다가, 장차 나라에서 쓸 지역임을 알고 북면 은석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바람과 물의 기세를 따르면 인간사도 형통해진다.

 

요즘 물의 오래된 기세를 인간이 꺾어보겠다고 잔머리를 굴리지만, 결국 어거지라는 건 자업자득 하고서야 만인이 일인같이 인정할 것이다. 겪을 걸 다 겪어야 하는 게 사람인가. 겪고도 더 겪어야 아는 게 한국 사람인가. 한국사람 재주 좋은 줄 지구촌에 소문 짜한데, 겪은 사람들 말로는 ‘사실 뒷재주더라!’는 평으로 모아진다나. 조선 사람 박문수가 영남 관리들의 부정함을 적발했던 역사는 뒷전에서 빛바랜 거울일 뿐인가. 황천걸음 같이 하다가 아깝게 먼저 간 벗들만 보인다.

 

* 마룻대 : 도리로 쓰는 긴 나무 = 마룻도리, 용마룻대

* 깐깐오월 : 주로 농촌에서 ‘음력 오월’을 깐깐하게도 몹시 지루하게 지나간다는 뜻으로 이르던 말.

 

 

 

북면 천둥, 암행어사 납시는 듯 2

 

 

 

취암산 터널을 지나서 연춘리까지 가는데 날씨가 꾸물거린다. 떼구름이 한바탕 치고 박고 놀면서 가물더위를 식히려나보다.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맞부딪치며 생긴 경계에 기댄 채 강과 논, 밭과 마을이 어우러진 북면, 보기에 좋다. 어디나 그렇듯, 숱한 시간과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땅과 물을 두고 다투었을 게다. 지나고 나니, 모든 게 그랬을 뿐이다, 이제는. 어사 박문수(숙종~영조) 묘로 가는 길 왼쪽이 환해서 비 낌새를 잊고 덩달아 한껏 웃었다. 접시꽃과 자귀꽃이 으뜸과 버금을 가릴 수 없이 곱다. 좀 전에 지나쳐 온 어느 집 담벼락 능소화도 고왔건만, 여기서는 눈을 떼기 힘들다.

 

은석산 아래에 어사의 묘보다 고령박씨 종중재실(문화재자료 제 289호)이 앞서 있다. 천안시나 충남도나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서 문중 살림이 이어지고 있다. 안채, 사랑채, 사당(충헌사, 1990년 복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종중 재실. 세월에 담금질 한 마룻대 결과 빛바램을 보니, 이백 년을 따라 들어가는 듯 들뜬 혼이 가라앉는다. 아기 소리가 들리는 사랑채까지 닿은 마당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열린 문을 미는데, 돌쩌귀가 소리를 내지 않고 손님을 맞아들인다. 이런 집에서라면 상처투성이 외주둥이로 된주먹 날리듯, 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뱉을까. 마음을 다스린 공간이라서 감싸 안는 힘이 있다. 이렇게 편한 마음이 드는 사회, 어른다운 사회의 품이 그립다. 그런 품이 서면, 사회가 어른답고 전통도 서릴 것이다.

 

안마당에 들어오기 전, 바깥 정원 명자 꽃이 빨간 빛깔로 사람의 피와 기운을 돌려주는지, 신바람이 났었다. 그러나 마당에는 절구 둘이 아낙을 기다린 지 오래 되었는지, 신바람이 들지 않아서 이끼로 얼룩져있다. 300년 전, 마을에 동래정씨 21세손과 의성김씨 23세손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부안김씨 29세손도 들어와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렇게 어우렁더우렁 살던 고령박씨 종중의 재실을 지키는 촌로 부부가 아가를 돌보고 있다. 대를 이었으니 깐깐오월이 길어도 큰 시름은 없으시겠다. 38 세에 이미 곧은 기품을 지닌 박문수 어사의 영정(보물 제 1189호. 1994년 지정)을 보려 여쭈었더니 천안박물관으로 옮겨갔단다. 영조대왕이 하사한 호랑이가죽 깔개에 앉아있는 기세를 느끼려면, 천안박물관으로 가야한다.

 

묘소가 있는 은석산 7부까지 올라가려는데, 갑작바람이 쎄다. 쩍, 쩍! 치가를 듯 호령하는 천둥소리에 기가 질리고 다리 힘이 빠져나간다. 잠시 멈췄던 무더기비가 억수로 쏟아질 모양이다. 긴 칼 짚고 박문수 어사 묘를 지키는 장군석 2기는 조선 장군복식 연구에도 쓸 만했다는데, 그 섬세함을 직접 보지 못하고 돌아가려니 애 닳는다.

 

댓잎들이 아예 바람을 따라갈 기세다. 요즘, 물의 오래된 기세를 인간이 꺾어보겠다고 잔머리를 굴리지만, 어거지일 뿐이라는 건 자업자득 뒤에야 만인이 인정할 것이다. 조선 사람 박문수가 영남 관리들의 부정함을 적발했던 역사는 뒷전에서 빛바랜 거울일 뿐인지, 황천걸음 같이 걷다가 아깝게 먼저 간 벗들만 보인다. 박문수 묘 자리를 지금의 독립기념관 자리에 정하려고 했다가, 장차 나라에서 쓸 지역임을 알고 북면 은석산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바람과 물의 기세를 따르면 인간사도 형통해진다.

 

* 마룻대 : 도리로 쓰는 긴 나무 = 마룻도리, 용마룻대

* 깐깐오월 : 주로 농촌에서 ‘음력 오월’을 깐깐하게도 몹시 지루하게 지나간다는 뜻으로 이르던 말.

 

                                          "김현옥님과 그녀의 둘째 주의현, 나들이에 동반해줘서 참말 고맙습니다. ^^"